시민의 초능력은 시민의 것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시민의 초능력은 시민의 것

“인민은 죄가 없다. 죄는 희생을 강요하는 자에게 있다.”

강풀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무빙>(사진)에 등장하는 대사이다. 웹툰 <무빙>은 ‘엑스맨’이나 ‘어벤져스’로 익숙했던 초능력자를 우리식 이야기로 재창조해냈다. 눈길을 끄는 건 그 과정에서 초능력자들이 상대해야 할 적이 초월적 외계인이나 평행 우주 속 악당이 아니라 ‘희생을 강요하는 자’로 바뀐다는 점이다. 변화는 서구식 영웅들과 다른 우리식 도피 서사에서 도드라진다. <무빙>의 초능력자들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초능력을 차출하는 국가조직, 현실 권력자들을 피해 도망친다. <무빙>의 초능력은 개인의 영달이나 부귀영화가 아니라 철저히 국가권력에 의해 소모된다. 희생을 강요하는 자들의 죄, <무빙>의 한국식 현실감은 바로 이 강요에서 비롯된다.

초월적 힘을 갖는다는 건 우리식 이야기에선 두려움과 불행의 원천이었다. 전통 설화인 아기장수 이야기만 봐도 그렇다. 하늘을 나는 날개와 엄청난 힘을 가진 아기장수가 태어난다. 역모자의 운명이라 주위 사람들이 경계하자 부모는 서둘러 아이를 없애려 한다. 여러 판본의 변주가 있긴 하지만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의 뛰어난 능력이 위험 요소로 취급되는 건 같다. 초능력은 자랑하고 휘두를 수 있는 재능이 아니라 숨겨야 할 비밀이 된다.

<무빙>의 부모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초능력을 국가에 차압당했던 부모들은 유전된 능력을 가진 자녀 세대마저 노예화되기를 원치 않는다. 국가권력의 감시와 통제로부터 숨어 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녀에게 ‘강요된 희생’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할리우드식 영웅 서사에서 초능력은 만능열쇠다. 스파이더맨, 배트맨과 같은 슈퍼 히어로 이야기들이 화려한 활약 이후 늘 자기 정체성 서사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웅과 시민의 정체성 사이, 소명과 사명 사이에서 고민할 여유가 있는 것이다. 이미 고민 자체가 영웅적이다. 하지만 한국의 초능력 서사에서 정체성은 선택이 불가능하다. 자기 삶을 운용할 선택권조차 공권력에 빼앗기기 일쑤다. 그래서 한국식 초능력자들은 정체성을 고민할 겨를 없이 생존을 위해 숨어야 한다.

문제적인 건 국가가 함부로 차출하는 초능력자가 모두 소시민이라는 사실이다. 결혼을 하고 공무원 아파트에 살게 된 역사 장주원은 임대 기간 연장에 쩔쩔맨다. 맞아도, 부서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초능력자이지만 주거권 앞에선 작아진다. 철거 과정에서 아내를 구하기 위해 초능력을 쓴 남편은 폭력 전과범이 된다. 현실 권력은 그래서 금권과 법으로 초능력자들을 옥죈다. 부족한 것, 없는 것을 빌미로 관리자 민용준 차장은 초능력자들을 관리한다. 아버지의 전과 말소와 사면복권을 무기로 아들 강훈을 끌어들이고,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날 수 있는 능력을 무력화한다. 민 차장이라는 국가권력의 화신은 협박과 거래의 초능력자에 가깝다. 민 차장류에겐 사랑과 연민이야말로 도구화하기 좋은 인간성이다.

극중 민 차장은 현실권력으로부터 이미 한 번 추방되었던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국가안전기획부가 국가정보원으로 바뀌는 혼란을 틈타 그는, 핵심 권력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사유화해 개인의 이익을 증폭하는 전형적 인물이다. 남북한 화해 무드도 조직이라 불리는 사익에 위해가 된다면 방해물로 여겨 부숴버린다.

2015년 연재되었던 작품이지만 강풀의 이야기는 2023년에도 현재적이다. 세월을 거슬러 권력의 중심부로 되돌아오는 인물들도, 조직과 국가를 빌미로 개인을 묵살하는 국가폭력도 다르지 않다. 국가를 참칭해 개인의 이윤을 추구하는 세력들도 여전하다.

<무빙> 속 초능력자들은 모두 소상공인이다. 치킨 가게, 돈가스 가게, 미장원, 헌책방처럼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소시민들의 초능력은 국가로부터 멀리 있을 때 더 완전하고 행복해 보인다. 개인의 것은 개인의 것이 되고, 시민의 능력은 오롯이 스스로의 삶에 쓰일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진짜 살 만한 세상일 것이다. 국가권력이나 폭력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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