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포퓰리즘’의 정치공학

[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부자 포퓰리즘’의 정치공학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다수’란 실제 다수가 아닌
‘효과적 다수’
선거공학서 의미를 갖는
힘의 크기를 뜻한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다
누가 더 효과적으로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지는 분명하다

진정한 다수가 각성하여
크게 통합되게 하는
새로운 정치 공학이
탄생하지 않는 한
‘부자 포퓰리즘’은
성립할 수 있는 선거 전략

감세 포퓰리즘에 대한 비판이 뜨겁다. 그럴 법도 하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발표된 것들 중 당장 기억나는 것 몇 가지만 들어보자. 결혼 증여세 부과 기준 1억원에서 3억원으로 상향, 주식 양도소득세 부과 기준 10억원에서 50억원으로 상향,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다주택자 중과세 폐지 등이 줄줄이 발표되었거나 의제로 제기되었다. 그냥 감세가 아니다. 부자 감세이다. 유리지갑을 호소하는 갑근세 납세자들이나 저소득층을 위한 감세가 아니라, 그야말로 부자 감세라는 점을 진보매체 보수매체 할 것 없이 모두 지적하고 있는 판이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이 있다. 그냥 폭넓게 고소득층·자산계층에 유리한 방향으로 세제를 개편하는 큰 틀에서의 두루뭉술한 부자 감세 같은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소득과 자산이 얼마 이상 되는 사람들에게 정확히 몇 %의 이익을 안겨준다고 하는 ‘핀셋’ 감세이다. 정부 재정에 구멍을 내는 길은 무책임한 지출 증대만 있는 게 아니다. 400조원을 예상했던 2023년 세입에서 결손은 50조원이 넘을 것이 확실하다. 이런 재정 구멍에도 감세 드라이브이다. 가히 감세 포퓰리즘이라고 할 만하다.

이를 두고 경제 정책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올해 있을 총선을 대비한 부자 감세의 선거 전략이라는 지적도 많이 나와 있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다른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부자 감세와 감세 포퓰리즘이 결합된 ‘부자 포퓰리즘’이 어떻게 선거 전략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이다.

언뜻 보면 이해하기 힘든 형용모순의 용어이다. 어떻게 부자를 대상으로 포퓰리즘을 선동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식의 감세에 소수 부자들은 표를 던질지 모르지만, 국민 다수에게 인기가 있을 만한 정책은 결코 아니다. 노골적인 부자 감세 정책에 대한 서민 대중의 보복이 두렵지도 않은가? 인구의 몇 % 되지도 않는 부자들의 표를 얻으려다 되레 훨씬 더 많은 이들의 반감으로 역풍을 맞을 위험이 높은데, 이게 과연 좋은 선거 전략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고 본다. 게다가 아주 효과적이고 훌륭한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전환을 전후해 벌어진 정당 정치 및 대의제 민주주의의 변질을 역사적으로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아주 옛날은 말고 대략 2차 대전 이후의 미국 정치 상황 정도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때까지만 해도 선거 때마다 각 정당의 전략은 가급적 국민 통합적인 의제를 내걸어 다수를 획득한다는 덧셈 정치에 가까웠다. 민주당의 케네디 대통령은 물론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또한 선거 때마다 야심 찬 계획과 새로운 전망들을 내세워 표를 얻고자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전통적인 지지층뿐만 아니라 중도층의 표를 얻고, 나아가 가능하다면 상대방 지지층의 표까지 가져오고자 했던 것이다.

부자감세, 효과적이고 훌륭한 전략

이러한 교과서적 전략은 1960년대 말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라는 ‘문제적’ 정치인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생각해보라. 대의제 민주주의는 고전적인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다. 후자라면 전 인구의 51% 이상에게 동의를 얻어야 권력의 정당성을 쥘 수 있지만, 전자라면 국민들의 대표를 뽑는 투표와 선거라는 복잡한 과정에서 실제로 투표장에 나온 이들이 던진 표 중 최대 득표라는 ‘인위적인 다수’가 되면 그만이다.

닉슨은 ‘갈라치기 정치’의 원조가 된다. 딱딱한 바닥에 사탕을 내던지면 두 쪽이 나게 되어 있고, 똑같은 크기로 갈라지는 법은 없다. 두 조각에서 더 큰 쪽을 가진 편이 승자가 되는 게임이 바로 선거라는 것이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굳이 표를 더 많이 얻으려 통합적인 이슈와 의제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닉슨은 그전 정치인들과 달리 정치를 국민 통합의 계기로 보지 않았다. 그는 ‘정치란 적과 친구의 구별’이라고 했던 카를 슈미트의 이론을 현실 전략으로 구현한 인물이었다. 1960년대 후반 가장 뜨거웠던 국민적 쟁점이었던 베트남 전쟁과 흑인 민권 문제에 대응하여 자신을 지지할 보수파 백인층을 이른바 ‘침묵하는 다수’의 이름으로 호명하여 결집시켰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하지만 반대쪽은 절대로 찬성할 수 없는 정책들을 (예를 들어 임신중지 문제) 내걸어서 국민을 두 쪽을 내고 숫자상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 들어선 대처 정권과 레이건 정권에서 이러한 닉슨식 전략은 또 한 번 중요한 변형을 거친다. 딱딱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사탕이 꼭 두 쪽으로 쪼개지라는 법은 없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파편으로 산산조각이 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승자가 되기 위해 제일 큰 덩어리를 차지하는 데 필요한 표의 숫자도 훨씬 줄어든다. 여기서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의 새로운 갈라치기 정치가 등장한다. 이제 정당들은 닉슨 시대와 또 달라졌다. 아주 예민하고 분열적이지만, 동시에 더욱 골치 아프고 더욱 복잡한 쟁점들을 꺼내든다. 그러면 사탕은 찬성 집단과 반대 집단에 더하여 무관심·무의견 집단까지 세 조각으로 갈라지게 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필승 전략이 나온다. 무관심·무의견 집단을 가급적 크게 만드는 것이 좋다. 그리고 나머지 국민 가운데 반대 집단은 비록 절반 이상의 규모라고 해도 그 분노와 반대의 크기가 들쭉날쭉하고 조직도 되어 있지 않아 투표장에서의 의사 표현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면 된다. 반면 찬성 집단은 비록 숫자가 적다고 해도 아주 견결하게 결집해 반드시 투표로 연결시키면서, 그들이 부자 집단이라 돈이나 다른 자원이 많다면 자발적인 기부와 적극적 활동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대중 포퓰리즘의 통념도 깰 필요

이제 왜 ‘부자 포퓰리즘’이 성공적인 선거 전략이 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핀셋 부자 감세는 경제적 합리성으로만 생각하면 당연히 국민 다수에게는 인기가 없는 정책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얼핏 보면 효과적인 선거 전략이 되기 힘들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인위적 다수’를 차지하면 그만이다. 깨진 사탕 조각에서 가장 큰 쪽을 차지하면 그만이다. 먼저 알쏭달쏭한 경제학 논리를 구사하여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주면 그게 왜 국민 전체에게 이익이 되는지, 왜 국민 전체가 더 잘살게 되는지 길고 복잡하게 설명한다. 부자 감세에 대해 막연하지만 뭔가 아니다 싶었던 이들은 전문가들의 말발에 밀려 무관심층으로 떨어져 나간다. 그래도 살아남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들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반대자들은 파편화되어 있지만 찬성자들은 단결하며 조직된다. 부자 감세를 반기는 이들은 이런 정책 구사에 물질적·정서적·이성적인 세 차원 모두에서 호감을 갖게 되며, 이는 분명한 지지의 정서 및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다른 말로 하자면, 누진적인 기존 조세 체계에서 증세와 감세 정책이 도입된다면 부자들은 실제로 세금을 덜 혹은 더 내게 된다. 이들은 이러한 정책 변화에서 현실적인 고통 또는 편익을 얻는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이러한 정책이 도입되어봐야 실제로 세금을 크게 덜 혹은 더 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세금 정책 변화로 인한 고통 또는 편익은 막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다. 누가 더 효과적인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지는 분명하다.

‘좌파는 현상타파를, 우파는 현상유지를 원한다’는 낡은 도식은 전 세계적인 ‘우익 급진파’의 대두로 깨어진 지 오래다. 이제 포퓰리즘이 헐벗고 굶주린 대중에 기대어 생겨나는 것이란 통념도 깰 필요가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의 ‘다수’란 실제의 다수가 아닌 ‘효과적 다수’, 즉 선거공학에서 의미를 갖는 힘의 크기를 뜻한다. ‘부자 포퓰리즘’은 성립할 수 있는 선거 전략이다. 진정한 다수가 각성하여 크게 하나로 통합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정치공학이 탄생하지 않는 한.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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