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이자 유일한 대안, 공공이 미래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얼마 전 일본의 ‘의료취약지 공공병원’ 견학을 다녀왔다. 인구가 채 3만명이 안 되고 노인 인구 비율이 40%에 달하는 농촌지역 시립병원들이었다. 이들 역시 의료인력, 특히 의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황은 훨씬 나았다.

우선 병상 150개, 그중에서도 급성기 병상은 50개에 불과한 아키타현 오모리 시립병원은 내과, 외과, 정형외과 전문의 13명을 고용하고 있는데, 외래는 이들 3개 과 외에도 신경과, 신장내과, 호흡기내과, 소아과, 비뇨기과, 안과, 피부과, 이비인후과, 재활의학과 등을 열고 있었다. 비결은 ‘파견’이었다. 아키타 의대에서 전문의들을 정기적으로 파견하여 주민들에게 필요한 외래 서비스를 제공했다. 병원 규모가 이렇게 작아도 위암과 대장암 수술을 직접 시행할 만큼 진료 역량도 탄탄한데, 이때 필요한 마취과 의사 또한 아키타 의대에서 파견해주었다. 영상 검사 역시 아키타 의대와 원격 진단 체계를 갖추고 판독 지원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았다.

또 다른 방문지 이와테현 하치만타이 시립병원은 전체 병상 60개, 그중 요양 병상을 제외한 급성기 병상은 24개에 불과한 더 작은 곳이었다. 역시 전문의는 내과, 외과, 소아과 6명에 불과했지만, 당뇨병내과, 순환기내과, 심장혈관외과, 혈액내과, 신경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등 여러 전문과 외래를 열고 있었다. 이와테 현립중앙병원, 이와테 의대, 같은 진료권에 속하지만 규모가 좀 더 큰 시립병원 의사들이 주 혹은 월 단위로 주기적으로 파견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보건지소에 해당하는 진료소도 한 곳 방문했다. 상근 의사는 현립중앙병원에서 은퇴하고 이곳 근무를 자원한 혈관외과 전문의였다. 여기서 진료하는 환자들은 대개 만성질환을 가진 노인들인데, 상급종합병원의 ‘고도진료’와 달라서 적응하기 어렵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는 현립중앙병원 근무 시절부터 주기적으로 의료취약지 파견 진료를 해왔기에 별다른 어려움이나 특별한 연수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고 대답했다. 진료소까지 우리와 동행해준 시립병원 원장은 자신도 이와테 현립중앙병원 근무 당시 계속 파견을 나왔었다며, 지역 책임을 지는 공공병원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지역 대학과 현립중앙병원의 후방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두 시립병원을 떠받치는 핵심 인력은 현 정부가 자치의대와 지역의대 장학금 지원(지역정원제) 제도를 통해 확보한 지역 의사들이었다. 오모리 시립병원 원장도 자치의대 6회 졸업생이다.

자치의대는 도도부현 정부(시도 광역자치단체)들이 공동출자하여 설립한 의대로, 지역별로 학생을 모집하여 교육하고 이들이 의사가 되면 정부가 의무복무 기간 근무지를 결정한다. 자치의대든 지역정원제든 의무복무 기간이 끝나면 도시로 나가는 의사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공공병원, 특히 의료취약지 공공병원에서 이들의 역할은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일본이 한국과 마찬가지로 민간 주도 보건의료체계라고 이야기하지만, 공공 병상 비중은 한국보다 3배나 높다. 단적으로 한국의 지방의료원에 해당하는 지자체 병원은 850여개로 40개 남짓인 한국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게다가 현립중앙병원들은 지역 대학병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작은 시립병원들을 후방 지원하고 있다. 고령화와 지역소멸이라는 도전 앞에서 공공병원은 ‘차선’이 아니라 ‘최선이자 유일한’ 대안이라는 점을, 우리보다 먼저 이 문제를 경험한 일본이 보여주고 있다. 이를 떠받치는 의료인력 양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귀국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 길에 일행 중 한 명이 ‘의료대란’ 때문에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공중보건의를 파견한다는 국내 뉴스를 읽어주었다. “뭐라고? 지방에서 서울로?” 일행의 허탈한 웃음과 한숨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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