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반도체 장비기업인 네덜란드 ASML이 “2040년까지 고객 업체들을 포함한 모든 생산·유통 과정에서 ‘넷제로(탄소배출량 0)’를 달성하겠다”고 최근 연간 보고서에서 밝혔다. ASML은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세계 유일 기업이다. ASML의 장비를 납품받지 못하면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최첨단 반도체 생산을 멈춰야 하기 때문에 ‘슈퍼 을’ 기업으로 통한다.
ASML의 ‘넷제로’ 선언은 자사의 반도체 장비 생산은 물론 고객사의 반도체 생산 과정 전체에서 탄소배출량을 제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고객사도 2040년까지는 재생에너지를 100% 사용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불이익을 줄 가능성을 비친 것이다. 문제는 ASML이 제시하는 재생에너지 범주에 원자력발전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이 극히 낮은 국내 반도체 기업들에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ASML의 선언은 ‘원전 편중’ 에너지 정책으로 나아가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경고장이기도 하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재생에너지 사용률은 매우 저조하다. 삼성전자는 국내 전력사용량 중 재생에너지 사용률이 9%(2022년 기준)에 그친다. 주요 반도체 생산시설이 국내에 있는 SK하이닉스 역시 재생에너지 전환율이 낮다. 2040년까지 15년 남짓한 기간 동안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100%로 높이려면 급격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ASML뿐 아니라 세계 유수의 반도체 장비기업들이 탈원전·탄소중립을 속속 선언하고 있다. 애플·구글 등은 이미 원전을 배제한 RE100(재생에너지 100%)을 요구하고 있다. 석탄화력이나 원전, LNG발전으로 만든 반도체는 앞으로 외국에 팔기 어려워지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자칫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이 ‘왕따’가 될 가능성도 우려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용인 반도체 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에 LNG발전소 건립을 서두르겠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 22일 소형 원전을 포함한 차세대 원전 개발에 4조원을 쓰겠다고 하고,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이날 “RE100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떤가”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의 안이한 사고방식에 분노가 치민다. 수출이 한국 경제 엔진이고, 반도체가 수출의 최대 품목인데 원전 중시 ‘이념’에 사로잡힌 정권이 기업의 수출길을 막을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