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적을 갖자

박상훈 | 정치발전소 학교장

“직업이 자문위원”이라 불린 대학교수가 있었다. 정치권의 국정자문위원이나 정책자문위원, 나아가 시민단체의 자문위원 이름으로 발 넓게 활동했다. 그는 당적을 가져본 적이 없다. 정당의 자문위원을 오래 했는데도 그런가를 물었더니, 해달라기에 했을 뿐 그 때문에 당원 가입을 해야 했다면 자문위원 수락을 안 했을 거란다. 공천심사위원을 했던 다른 교수 역시 당적은 생각도 안 해봤단다. 또 다른 교수는 자신의 SNS 사이트를 통해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발언을 해왔다. 그 또한 당적은 없다.

[정동칼럼]당적을 갖자

아마도 자신은 특정 정당을 넘어 정치 전체의 계도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언론사나 기자 역시 파당적인 효과가 큰 의견을 초당적으로 말한다. 당연히 당적은 없다. 대부분은 회사 내규로 당원 가입을 금지하고 있다. 시민운동가는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당적을 기피한다. 변호사는 정당 가입 경력이 있으면 특검 참여를 못하는 등 불이익이 많다고 말한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모두가 당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우리의 지식사회는 좀 심하다. 그들에게 정당은 영향력 행사의 도구일 뿐, 정당이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은 무시해도 좋은 일이 되었다.

당원이 되는 일은 불편하다. 괜한 오해나 편견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가치 있는 일이란 대부분 그렇다. 비용을 치르는 일 없이 얻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당적을 갖지 않아야 좀 더 중립적이고 보편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영국의 보수당 리더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한 말이지만 정당이란 “조직된 의견(organized opinion)”이라 할 수 있다. 그게 두 개면 양당제고 더 많으면 다당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처럼 복수의 정당으로 조직된 그 어떤 의견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면, 사람들은 정치 전체를 대상화해 냉소적인 말을 쏟아내기 쉽다. 지식인도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하다. 이견과 차이가 있어야 합의도 조정도 의미가 있다. 처음부터 국민적 합의나 전체 의사를 앞세워 내 주장의 옳음을 강변하면, 목소리는 커지고 갈등은 더 격화될 뿐이다. 당적을 갖는 사람과의 대화가 반드시 대립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과 의견이 더 부드러울 수도 있다. 서로의 정치적 차이를 고려해 최대한 설득력과 보편성을 갖춰 말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당도 완벽할 수 없고 이런저런 문제를 안고 있기에, 상대 정당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일도 자제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없던 애정도 생기고 책임감도 갖게 된다.

부드럽고 보편적인 정치 언어를 갖는 문제가 당적 여부보다 개개인의 특성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사회의 정치 담론이 갖는 과도한 격렬함의 문제는 정당이 시민 삶 속에 얼마나 잘 안착해 있느냐와 깊은 관련이 있다. 말과 글을 다루는 지식인 집단 속에서 정당이 안정된 시민권을 갖는 문제는 특히나 중요하다. 정당을 자기 밑으로 내려보는 무책임한 언어 습관이 지식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과도한 도덕적 우월감을 주체하지 못해 가르치려 드는 경향이 강한 것도 잘못이다.

우리 지식사회의 그런 풍토는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결정과 정신적으로 상응하는 면이 있다. 정당을 우습게 알고 당적 갖는 것을 기피 내지 경원시할 일로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주 ‘네이버 열린 연단’에 실린 최장집 교수의 에세이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민주주의>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지금껏 역임한 헌법재판관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당적이 있었다. 아직 실감하긴 어렵겠지만, 정당 친화적인 사회가 오히려 더 평화롭고 말의 내용도 더 풍요로울 수 있다.

민주주의란 의견이 다른 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체제인데, 당적을 갖는 일을 모두가 회피하는 사회가 된다면 대체 무슨 재주로 민주주의를 좋게 만들 수 있을까? 모두가 당원이 될 이유는 없지만, 지금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당원이 되고 당 생활에서 참여의 보람도 찾는 일이 가능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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