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특별법과 인권

이진석 | 서울대 의대교수

“어제 그 의사 ×× 어디 있어? 이리 나와!” 3일 동안의 응급실 근무를 마치고 당직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내 귀가 번쩍 뜨였다. 그 의사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어린 여자아이가 유치원 원장과 엄마 손에 이끌려 응급실을 찾은 때는 하루 전날 오후였다. 여자아이의 다리를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담뱃불로 지진 것 같은 원형의 붉은 염증이 다리 이곳저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불량배가 유치원에 다니던 여자아이를 담뱃불로 지져서 화상을 입힌 사건이 나의 뇌리를 스쳤다.

“누가 뜨거운 걸 네 다리에 댔니?”라고 묻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동칼럼] 전공의특별법과 인권

원장은 펄쩍 뛰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이었다. 책임회피에 급급한 그의 태도에 덩달아 흥분한 나는 담뱃불로 인한 화상이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동네피부과에서 진료받은 결과는 급성 수포성 피부염이었다. 유치원은 누명을 벗었지만, 그때는 이미 학부모 여럿이 유치원을 찾아가 한바탕 항의소동을 벌인 후였다.

원장은 한 시간 넘게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돌팔이 의사를 불러오라고 고함치다가 돌아갔고, 그 동안 나는 응급실 구석 당직실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숨어 있어야만 했다. 그 당시 나는 새파란 신입 인턴이었다. 의학지식과 경험 부족이 그런 실수를 하게 만든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틀 반 동안이나 거의 잠을 자지 못했던 나의 상태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환자고 뭐고 다 귀찮았고, 오로지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태였으니, 환자 진료를 제대로 했을 리도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큰 의료사고를 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예전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전공의의 근로환경은 우리나라에서 단연 최악이다. 2014년 정부는 전공의 수련규정을 개정해서, 전공의의 주당 근무시간을 80시간 이내로 제한했다. 그러나 올해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전공의협의회의 공동 조사결과에 따르면, 근무시간이 80시간을 초과하는 진료과가 절반 이상이었고, 일부 진료과들은 주당 근무시간이 130여 시간에 이르렀다. 주 6일 기준으로 하루 평균 22시간을 근무하는 셈이다. 수련규정 개정 이후에 오히려 근무시간이 늘어난 진료과도 절반을 넘었다. 정부의 수련규정 개정은 무용지물이었다.

2014년 고려대 김승섭 교수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전공의 10명 중에 7명은 환자 진료 중에 존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고, 의료사고를 저지를 뻔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전공의도 10명 중 4명꼴이었다. 주당 80시간 이상 근무하는 전공의는 의료사고를 8배나 더 많이 발생시킨다는 외국 연구결과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7월 전공의 근무시간을 주당 80시간 이내로 제한하는 전공의특별법이 발의됐다. 그런데 이 법에 대한 병원계의 반대가 거세다. 전공의 근무시간을 줄이면, 당장 병원의 비용 부담이 늘어나고 대체인력을 구하기도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병원계의 현실적인 어려움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로 힘없는 전공의들에게 모든 희생을 감내하라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중소기업 납품난가를 후려치는 재벌,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기업, 골목상권을 붕괴시키는 대형마트에 대해서도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된다. 이들도 원자재 가격이 오르고, 국제경쟁이 격화되며, 경영여건도 악화되는 등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

힘이 있는 집단이 먼저 희생을 한 후에, 힘없는 집단에 고통 분담을 요구한다면, 이런 것까지 갑질이라고 질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힘없는 집단에만 희생을 강요한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도 그것은 명백한 갑질이다.

전공의는 미래가 보장돼 있으니 몇 년간의 고통은 감수할 만하다는 인식도 있다. 이런 인식이 열정페이라는 세대 폭력의 발원지이다. 비정규직을 쥐어짜듯 부려먹다가 헌신짝처럼 내버린 최고 대학, 인턴 직원에게 30만원의 월급을 주던 국내 최고 패션디자이너, 그리고 제자에게 똥을 먹이고 상상 못할 폭력을 휘두른 교수도 무기계약직 전환, 패션디자이너 데뷔, 교수 임용이라는 미래를 담보로 인권을 유린했다. 세상에 정당한 갑질은 없고 미래를 담보로 무시당해도 되는 인권도 없다.

내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소위에서 심의할 예정인 전공의특별법은 전공의만을 위한 법이 아니다. 안전하고 친절한 진료를 받을 권리가 있는 모든 환자를 위한 법이다. 그리고 모든 갑질과 열정페이의 횡포를 막기 위한 연대의 장벽에 벽돌 하나를 얹는 법이다.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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