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정치를 위하여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지난여름의 일이다. 오후 5시 우체국에 갔다. 한참이 지나도 대기 번호가 바뀌지 않았다. 중앙전산시스템이 마비됐다 한다. 이미 한 차례 안내를 했다며 기다리든가 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오란다. 이럴 때 대비한 매뉴얼이 없냐고 물으니 없다고 한다. 뉴스에도 나오지 않고 우정사업본부 홈페이지에도 아무 얘기가 없다. 사고도 막아야 하지만 사고가 났을 때를 대비한 매뉴얼이 더욱 절실해 보였다.

[정동칼럼]더 많은 정치를 위하여

코로나19 때문에 나라가 온통 비상사태다. 시장과 공연장에 사람이 없고 자영업자는 울상이 됐다. 질병에 대한 공포는 예외가 없지만 없이 사는 사람들은 위기상황에서 더욱 힘들어진다. 방역마스크를 사려고 줄이 길게 늘어섰지만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은 그 줄에도 설 수 없다. 병마도 무섭지만 하루 일을 쉬는 게 더 무섭기 때문이다. 2주 전 일반열람실의 휴관을 시작한 동네 도서관이 이번주부터는 전면 휴관이다. 자기 공부방 없고 독서실 갈 돈 없는 학생들만 더욱 힘들게 됐다.

마스크 대란이다. 이쯤 되면 공공재라 할 만하다. 기업과 시장에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정부가 적극 개입했어야 할 일이다. 2018년 봄 황사가 기승을 부릴 때 여당 원내대표가 미세먼지 마스크의 공공재화를 언급한 일이 있다. 관련 부처에서는 건강보험 적용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놨다. 하지만 취약계층에 무상공급하거나 가격정보 공개로 가격 인하를 유도하는 등 실행 가능한 다른 조치도 있었다. 손 놓고 있다가 위기가 찾아오니 이제 와서야 분주해지고 있다.

평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위기상황이 되면 고개를 불쑥 내민다. 보통 때는 필요하지 않던 것들이 비상시엔 긴요해지기 때문이다. 행정도 평소엔 윤활유 역할에 그치지만 긴급사태가 되면 생명유지장치처럼 중요해진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평소엔 시끄럽기만 하고 불필요한 존재 같지만 비상시국엔 모든 책임이 정치에 돌아간다. 행정 수요를 측정해 공급 여부를 결정하는 일이 정치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정치와 행정이 자꾸 어긋나는 것은 정치가 국민의 삶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이 적과 동지를 가르는 유일한 표식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진영논리가 지지자를 단결시키는 가장 큰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정당과 정치인이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경쟁하지 않고 상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경쟁하고 있다. 다양한 가치와 이해를 대변하는 것으로 경쟁하는 대신 각자의 도그마를 지지자들에게 주입하고 세뇌시키는 것으로 경쟁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는 E P 톰슨이 적대성과 공격성의 자가증식체제라 한 ‘절멸주의’와 다르지 않다. 진영논리로 서로에 대한 적대성을 끊임없이 강화시켜 결국 양쪽 다 절멸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신념과 가치로 지지자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적에 대한 분노를 키워 표만 얻으려는 정치, 정파의 이해를 이념으로 포장해 국민을 동원하는 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절멸의 정치는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적에게 이긴다고 해서 내 삶이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없이 사는 사람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적에게 이기는 것보다 공준(公準)의 확립이 필요하다. 나의 반대편이 적이 아니라 상식의 반대편이 적이 돼야 하고 그 상식의 수준이 점차 높아져야 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 직선제와 절차적 민주주의가 사회의 공준이자 국민들의 상식이 됐다. 2016~2017년 촛불집회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은 그 확인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회적 합의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정당과 정치인이 못한다면 국민이 하면 된다. 정치권력에 내 운명을 맡기는 대신 국민의 힘으로 더 높은 수준의 합의와 더 나은 상식을 만들면 된다. 우한 교민들의 아산·진천행이 결정됐을 때 지역 정치인들은 반대여론을 주도했지만 시민들은 마침내 따뜻한 포용을 결정했다. 정당과 정치인은 그간 국민이 이뤄낸 성과를 전리품처럼 포획했을 뿐이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 해냈듯 더 나은 정치, 더 큰 정치도 국민이 하면 된다.

정치인들이 가장 절박해지는 시기가 선거 때다. 지금부터 시작하자. 노동권을 신장하겠다는 약속을 믿지 말고 강남역 철탑의 김용희씨가 땅으로 내려왔을 때 비로소 표를 주자. 책임은 뒷전이고 적대적 공존으로 최악의 국회를 만든 정치인들을 컷오프시키고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상식을 주장한 이를 선택하자. 시민사회는 ‘을’들을 위해 분투한 정치인과 재벌에 영합한 정치인을 공개해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서서히 국민의 힘으로 더 많은 정치를 계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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