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판결, 재판부가 직접 하라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서울 강남역 인근 삼성타운에는 다른 재벌그룹 사옥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 발견된다. 바로 여러 이유로 장기농성을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의 사안으로 일시적인 농성을 하는 일은 제법 있지만 이 같은 경우는 삼성을 빼고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해고노동자 김용희의 고공농성은 여러 보도를 통해 이미 유명해졌다. 그밖에 보험사에대응하는암환우모임(보암모)과 과천철거민대책위원회(과천철대위)도 있다. 김용희의 고공농성은 5월20일로 346일이 됐고, 2018년 초 첫 집회를 한 보암모는 암환자 6명이 삼성생명 2층에서 128일째 점거농성 중이다. 또 16년 전 결성된 과천철대위는 2009년 삼성물산 앞에서 시작한 농성만 쳐도 11년째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오랜 기간 끈질기게 싸우는 것일까? 심지어 병원에 있어야 할 암환자조차 말이다. 답은 이들의 고집과 인내보다 삼성에서 찾아야 한다.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과천철대위는 농성을 접고 일상으로 돌아갈 기회가 두 차례 있었다. 과천시 공무원을 매개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삼성이 제시한 보상액을 철대위가 수용했다. 하지만 과천철대위에 따르면 그 뒤 삼성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가 2017년경 다시 나타났다. 이때는 과천시 공무원을 통해 의견을 전달했고 그나마도 협상 도중에 연락이 두절됐다고 한다. 보암모의 경우 금융감독원의 지급 권고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중재기구를 통한 협상을 제안했다. 상품별로 계약 조건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일괄협상을 통해 지급액을 낮추려는 목적으로 볼 수 있다. 보암모 환자들이 외치는 “약관대로 지급하라”는 구호도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 김용희의 경우는 지난 15일, 4월 말부터 진행된 삼성과의 협상 과정이 낱낱이 공개됐다. 삼성은 삼성의 안을 김용희 측이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합의문 작성을 일주일 뒤로 미뤘다. ‘조율할 내용이 더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25m 상공 0.5평의 쇠바구니 안에서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보내는 사람에게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다.

삼성이 이들에게 보인 것은 진정성 없는 태도와 무시다. 진정성 없이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협상 제안, 위기를 넘긴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외면하는 방식이었다. 기껏해야 한두 달, 또는 1~2년 싸우면 되겠지 했던 사람들이 인생을 온통 삼성과의 싸움에 쏟아붓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과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삼성타운 주변의 전선에서 가해자 삼성과 피해자들이 대치하고 있다면, 인근 서초법원에는 삼성을 둘러싼 또 다른 전선이 있다. 그것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심판받게 하려는 검찰과 재판부 사이의 전선이다. 이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작업을 위해 최순실과 박근혜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2017년 기소됐다. 1심과 2심, 대법원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파기환송심의 양형 판단만 남아 있다.

그런데 서초법원의 전선에는 삼성타운과 달리 제3자인 삼성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가 있다. 문제는 준감위가 삼성의 돈으로 운영되는 사실상의 내부기구이자 위원장이 김지형 전 대법관이라는 데 있다. 삼성은 재판부의 권고에 따라 준법감시위를 출범시켰다. 과연 이 준법감시위가 독립적 활동을 할 수 있을지, 이 부회장의 재판에서 유리한 양형사유로 삼기 위해 내세운 것은 아닐지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김지형 위원장은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의 대법원 주심판사로 1심과 2심 판결을 뒤집어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이 부회장에게 경영권 승계의 길을 터준 전력이 있다. 준감위는 이 부회장의 지난 6일 대국민 사과에 대해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내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의 제시를 삼성 측에 권고했다.

최근 유명가수 두 명이 집단성폭행으로 2심에서 징역 5년과 2년6개월을 받았다. 1심보다 형량이 줄어든 것은 반성 또는 피해자와의 합의 때문이다. 이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는 ‘반성’에 해당하고 준감위가 요구한 ‘실천 방안’은 피해자와의 합의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재판부는 준감위에 판사의 재량인 작량감경의 권한을 위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준감위는 이 부회장의 진정성 없는 사과를 수용했듯이 삼성이 제시한 실천 방안을 ‘합의’로 간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삼성이 피해자는 물론 국민들까지 무시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반성과 피해자 합의, 모두 준감위가 아닌 재판부가 판단해야 한다. 재판권은 사법부에 있지 피고의 대리인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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