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께 보내는 ‘東湖問答’

역시,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3년차는 잇단 인사문제와 이른바 측근·실세들의 ‘부적절한’ 행위들로 인해 적잖이 망가졌습니다. 설령 그것들이 부패나 비리와는 무관할지 몰라도, 정권의 능력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부패·비리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무능이 변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정권 담당자들은 하나 같이 인적쇄신은 없다, 필요없다고 확언합니다. 이건 거의 신념의 수준인 듯합니다. 가령 과거 정권 같으면 부동산 파동이나 군부대 총기난사 사건 같은 일로 민심이 들끓으면 인적쇄신을 통해 수습을 꾀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현정권은 그런 것을 국면전환용으로 간주, 벌레 보듯 합니다. 이런 판에 인사의 중요성, 쇄신의 필요성을 말하면 아마도 음모쯤으로 치부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우회로, 율곡 이이 선생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역사로부터 생환’해 보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정치는 경험측이고, 그래서 역사와의 대화는 정치에도 유효합니다. 그것의 정치공학적 학습법이 반면교사일 겁니다. 안으로는 사림 개혁정치가 비틀거리고 밖으로는 동아시아 정세가 격동하던 조선 중기,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일종의 정치개혁서가 ‘동호문답’입니다.

- “태평성대 기원 벌써 3년…” -

율곡은 먼저 당대(當代)를 이렇게 평합니다. “주상이 처음 즉위해서 백성들이 기뻐하면서 태평성대를 바란 지 벌써 3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도 민생은 곤궁하고 풍속도 야박하고 거칠며 기강 또한 바로 잡히지 않아서 선비들의 품행이 바르지 못한 것이 변화가 없습니다.” 과연 노무현 대통령의 지난 2년여는 어떻습니까?

율곡은 치세와 난세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때와는 상관없다고 강조합니다. 인사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군주의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여 뛰어난 인재들을 쓸 수 있으면 치세가 될 것이고, 비록 군주의 재능과 지혜가 모자라더라도 뛰어난 인재를 임용할 수 있다면 치세가 될 것이오. 그러나 군주가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더라도 자신의 재능만 믿고 인재를 불신한다면 난세가 되지요. 또 군주가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간사한 자의 말만을 편중되게 믿어 자신의 귀와 눈을 가린다면 난세가 되지요.” 이중 노대통령은 어느 군주의 틀에 해당됩니까?

율곡은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상의 마음에 그럭저럭 안일하게만 지내려는 사심이 싹튼다면 소인들은 그 틈을 노려 ‘국가는 이미 잘 다스려지고 있으므로 걱정할 게 없다’는 말로 주상의 귀를 현혹시키겠지요.” 혹여 노대통령은 이런 사심이 싹트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전 실세 국무총리가 여느 정권보다 나라가 잘 되어간다고 장담했기에 더욱 드는 의문입니다.

율곡은 적임자를 골라 정치를 하게 됐다면, 다음은 폐법(弊法) 개혁과 교육혁신 등 무실(務實)을 통한 안민(安民)이라고 했습니다. “아침 내내 밥상을 차려도 전혀 배가 부르지 않을 경우처럼 말을 헛되이 할 뿐 실제가 없다면 어찌 일을 구제할 수 있겠소. 지금 저 경연 석상이나 상소문 속의 말들 가운데 족히 치국할 만한 아름다운 방책이나 훌륭한 의논이 없는 것은 아니나, 한가지 폐단도 개혁되지 않고 한가지 정책조차 제대로 실시되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은 오직 무실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참여정부 역시 로드맵, 프로젝트 등등의 형식에만 종사해 제대로 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헛된 말뿐 실제가 없다면…” -

율곡은 걱정합니다. “응당 약하고 쇠잔한 백성들을 구휼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잘못된 정치로 그나마 아직 흩어지지 않은 백성들까지 흩어지게 만들려고 하니 이것이 군자가 차마 할 일이겠소. 지금 정치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몇해 못가 민생은 생선살 같이 부스러지고 흙더미처럼 무너질 것입니다.”

물론 ‘동호문답’은 436년전 젊은 군왕 선조에게 올린 월과(月課)입니다. 만일 노대통령이 역사로부터 생환된 ‘동호문답’을 받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율곡의 지적과 비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고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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