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士林시대’와 현대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에 처할 때마다 종종 역사에서 해답을 구하려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사려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역사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으려면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 과거를 냉정한 시선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의 이면에는 대개 선(善)과 악(惡), 성(聖)과 속(俗), 합리와 비합리 등 어느 한쪽 잣대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들이 뒤엉켜 있게 마련이다. ‘역사의 필연성’을 앞세워 과거를 해석하고 현실을 개조하려는 것은 칼 포퍼의 말대로 ‘역사주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역사의 진실과 실체가 무엇이며, 그 시대의 경험과 가치가 현재의 문제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를 규명해야 역사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얼마전 여권인사들이 현 집권세력을 조선조의 사림파(士林派)에 비유했다. 어떤 이는 훈구파에 대항한 초기의 사림파, 다른 이는 당쟁으로 몰락해가는 후기 사림파 등 저마다 ‘다른 사림파’를 들고 나왔다. 수백년간 활동한 사림파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조선 지배구조 창출의 주역-

그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림시대’는 한국의 정치문화와 관련지어 연구할 가치가 많은 분야다. 사림시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조선왕조의 정치와 문화를 논할 수 없다. 우리 문화와 의식구조 저변에 남아 있는 유교적 유산도 따지고 보면 사림시대의 유산이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정치에서도 과연 사림시대의 유산을 찾을 수 있을까?

사림파는 유교적 문치주의라는 조선왕조 특유의 지배구조를 창출한 주역이다. 당초 기득권 세력(훈구파)에 대항하는 개혁 세력으로서 정계에 진출, 사화(士禍) 등 좌절과 실패를 겪었지만 결국 왕권의 지원을 받아 훈구세력을 척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정권 장악 이후 사림은 분열을 거듭하며 권력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왕권과 신권의 견제와 균형 등 사림정치의 틀을 오랜 세월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사림은 당초의 개혁정신을 뒤로 한 채 민생을 외면한 기득권 세력으로 변해갔다. 이들을 비난하며 개혁을 주장한 것이 조선후기 실학자들이다.

사림정치 시대를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파악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권력투쟁은 나름대로 명분과 도덕성, 게임의 룰이 있었다. 또 칼이 아닌 붓의 권력투쟁, 사간이나 홍문관 등을 앞세운 여론정치를 폈다는 점에서 당시로선 나름대로 진보적 정치를 했다. 그러나 부정부패를 감시하던 그들이 권력 추구에 집착하면서 도덕정치의 명분은 권력쟁취의 수단으로 변질됐다. 이에 따라 온갖 연고를 동원한 패거리 정치의 폐해를 낳고 말았다.

사림시대는 아무리 고결한 이념과 도덕성으로 무장한 정치집단도 시대변화에 대응한 자기 쇄신과 개혁의 노력이 없다면 수구집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상대의 오류와 약점을 찾는 데 급급했고 그 결과 사회 내부의 모순, 서세동점(西勢東漸) 등 시대의 변화를 읽는 혜안을 키울 수 없었다.

한국 현대정치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이러한 사림시대의 양면성이 잠재해있는 게 아니냐는 느낌이 든다. 겉으론 명분과 도덕성을 중시하면서도 패거리주의, 줄서기, 연고주의, 독선과 아집이 뿌리깊게 배어있다. 반면 선비정신, 도학(道學) 추구, 예의·염치 등 긍정적 유산은 점차 퇴색돼 가는 듯하다.

-기득권 집착 자기혁신 외면-

요즘 집권당의 내부 갈등이 심각한 모양이다. 개혁·실용 등 노선갈등처럼 비치지만 내심은 벌써 차기 대권의 향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오죽하면 사림파 얘기까지 나왔을까 일견 이해는 간다.

사림시대에서 진정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개혁세력의 선의지(善意志)만 내세울 게 아니라, 역사의 긴 안목에서 ‘내가 혹시 틀릴지도 모른다’는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위치를 재점검해보기 바란다.

〈송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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