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화이팅”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는 말은 경주 최부잣집의 6가지 가훈 중 하나였다. 12대 300년에 걸쳐 만석꾼의 부를 누리면서도 ‘가진 자’의 도리를 다했다 해서 지금까지도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 집안의 이야기이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많은 이들이 굶어죽어 나갔고, 그나마 땅 마지기라도 있는 사람은 논과 밭을 헐값에 내다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이 어디 그 시절만의 이야기였을까. 불과 수십년 전인 1950~60년대만 해도 이런 모습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흉년이 져 먹을 것이 떨어지면 마을 부잣집을 찾아 식량을 꾸어오되 이듬해 추수기에 대략 2배로 갚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이도 여의치 않으면 갖고 있는 땅을 팔게 되는데, 그 가격이란 것이 대중없어서 논 한 마지기에 쌀 한 두 가마가 보통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 두 차례 흉년을 겪고 나면 웬만큼 땅을 가진 사람이라도 빈털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반면 근방의 유력 부자들은 흉년기에 대거 땅을 사들여 더 부자가 된다. 흉년기가 모든 이들한테 고루 재앙만은 아니어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부를 쌓을 수 있는 호기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재산은 모으되 남의 궁핍한 처지를 이용하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는 경주 최부잣집의 사례는 매우 교훈적이다.

- 최부잣집의 6가지 가훈 -

흉년이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예나 지금이나 통용되는 하나의 철칙일까. IMF 환란은 말하자면 ‘현대판 흉년기’였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더 커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를 헤맬 때 또 다른 무리들은 착실하게 재산을 불려나갔다. 처음에는 30%를 넘나드는 고금리에, 다음에는 벤처라는 깃발만 꽂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돈이 몰렸다는 벤처 바람에 힘입어 너무도 손쉬운 돈벌이를 한 것이다.

물론 외환위기를 극복한다며 도입한 정부 처방책이 부익부 빈익빈 구조를 강화하는 데 큰 몫을 했다. 기업에는 경영실적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사람을 자를 수 있고,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을 남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경영상의 위기가 있느냐 여부는 따질 필요가 없다. 반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각종 제도적 규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유주의, 규제완화, 시장경제 등등의 레테르가 이 모두를 합리화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외환위기와 그 이후 정부 정책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아가서는 더 부자가 될 사람과 더 가난한 자가 될 사람을 확실하게 갈라놓았다.

엊그제 각 신문에는 서울 강남 부동산값 폭등의 원인이 무엇이냐를 가늠케 하는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2000년 이후 강남지역 아파트를 산 사람 10명 중 6명꼴이 집을 3채 이상 갖고 있다는 국세청의 조사결과이다. 경제가 어려워도 자기 몫만큼은 분명히 챙기겠다는 이들에게서 경주 최부잣집 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그른 일이었을까. 돈이 돈을 낳는 세상이니, 이들의 행태만을 나무라는 것은 공정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것이 가능하도록 만들고 또 이것을 지속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진짜 주범이 누구냐는 것이다.

- 용두사미로 끝난 부동산대책 -

정부는 최근 몇년간 부동산대책을 수도 없이 내놓았다. 그러나 대개는 물타기나 본말전도, 용두사미로 끝났다. 보유세를 강화한다고 소리는 요란하지만 알맹이는 없다. 재건축을 규제한다고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저금리를 탓하는 여론에는 아예 귀를 막고 있다. 그러니 대책이 실효성을 거두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두어가지만 짚어보자. 부동산정책과 관련 있는 고위 관리의 70~80%가 강남에 산다. 일선 자치단체장들은 관내 유력인사들의 요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부동산 투기수요가 깨지고 나면 보수언론에도 득될 것이 없다. 이런 이들이 오늘도 입을 모아 외친다. “부동산이여, 파이팅!”

〈박승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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