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서 기억해야할 이름들

〈양권모/논설위원〉

1987년 13대 대선을 엿새 남기고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전주역 유세에 나섰다. ‘광주학살 주범 물러나라’, 돌멩이가 빗발쳤다. 연설을 중단한 노 후보는 부랴부랴 전주 시내 한 호텔로 자리를 옮겨 기자회견을 가졌다. “서해안 지도를 바꾸게 될 새만금 지구 대단위 방조제 축조사업을 최우선 사업으로 선정, 신명을 걸고 임기내 완성하여 전북 발전의 새 기원을 이룩하겠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유사한 구상이 수립됐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 구체 계획이 수립됐으나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장된 새만금 사업은 이렇게 탄생했다.

허겁지겁 새만금 공약을 발표한 노태우 정권도 문제는 알고 있었다. 갯벌의 가치, 환경의 중요성은 안중에도 없었지만 새만금이 국민 혈세만 쏟아붓는 경제성 없는 개발이라는 정도는 알았다. 노태우 정권 3년차 정기국회에서 통과된 새해 예산안에는 새만금 사업비가 들어 있지 않았다.

예산 한 푼 들이지 않고 백지화될 수 있었던 새만금은 김대중 총재(평민당)가 있어 살아났다. 1988년 7월 16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가 영수회담을 가졌다. 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중간평가와 유보와 김 총재의 숙원인 지방자치제 실시의 합의가 발표됐다. 김 총재가 이때 얻은 게 하나 더 있다. 당시 평민당에서는 실질 소득은 ‘이거’라는 평가가 돌았다. 바로 새만금이다. 노 대통령은 김 총재에게 새만금 추진을 약속했다. 곧장 새만금 사업비 2백억원이 추경 예산에 편성됐고, 그해 11월 18일 새만금 방조제 축조가 시작됐다.

- 정치공약으로 출발한 방조제 -

이후 새만금은 성역이 됐다. 왜곡된 정보와 선전으로 전북 도민의 숙원이 되어버린 새만금을 백지화하는 것은 정치생명을 걸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 후보,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회창·이인제 후보 모두 새만금을 약속했다.

역설적이게도 새만금 사업이 처음 중단된 것은 국민의 정부 때다. 문전옥답에 농사를 짓지 않으면 휴경지 보상금이 나오고, 새만금으로 만들어지는 땅의 네 배에 달하는 농경지를 없앤 정부에서 농지를 만들기 위해 방조제를 쌓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억만년이 걸려 생성된 갯벌의 가치, 환경의 소중함을 인식하기 시작한 시대도 새만금의 정치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새만금은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한” 게 됐다.

새만금만 생각하면 답답한 김 대통령에게 당시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은 “갯벌의 가치가 상승해 최근에는 매립공사를 중단하고 복원하는 추세”라고 조언했다. 그 노 장관은 대통령이 되자 ‘새만금을 논으로 만든다는 계획은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이로써 새만금은 농지조성이라는 목적마저 상실했다. 방조제를 쌓아 만든 새만금의 땅은 농지가 아닌 골프장·리조트·공장·비행장 등속이 들어설 땅임이 공식 선포된 것이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농지 조성을 전제삼아 ‘새만금 사업 계속’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도 이 판결의 모순을 알았기에 “법원은 행정처분의 무효나 취소 사유가 있는 지를 법적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지, 새만금 사업의 타당성을 정책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게 아니다”는 보충의견을 냈다. 새만금은 결국 책임을 회피한 지도자와 정부 덕분에 결국 사법의 잣대로 결론났다는 증언이다.

- 수년후 허위로 드러났을땐… -

그그제 새만금 방조제는 이어졌다. 연결된 방조제 위에서 대통령이나 경제부처 장관이 아닌, 농림부 장관이 만세 삼창을 외쳤다. 축제의 날에 친환경 개발 운운이 사기극이라는 것을 자인하지 않기 위해서는 끝까지 농지 조성이라는 것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이제는 당장에 방조제를 허물기는 어려워졌다. 가고, 보는 수밖에 없다. 몇 달 후 농지조성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수년 후 원상회복 얘기가 나올 지라도 가서 깨닫는 수밖에 없게 됐다.

다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새만금 방조제로 인해 사라진 갯벌, 복털조개·진주담치·가는갯능쟁이·비오리·말오줌때 같은 생명의 이름과 함께 새만금을 만든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다. 새만금의 허위가 드러났을 때, 새만금 같은 선심성 토건 공약이 어떤 재앙이 될 수 있는 지를 교훈으로 세우기 위해서도 그들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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