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나라, 황가의 위기

중국 베이징에 있는 명(明)·청(淸)시대의 황궁(皇宮)인 자금성(紫禁城)을 둘러본 이들이라면 천자(天子)라고도 불렸던 중국 황제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와 위엄을 느끼게 된다. 그 웅장한 규모는 실로 장관이며 궁전의 기둥과 계단, 성문 등 모든 구조물들의 개수도 황제가 누릴 수 있는 극수(極數)인 아홉과 그 배수(倍數)에 맞춰져 있다.

자금성의 규모에야 도저히 미치지 못하지만 서울 이태원동에도 10년 공사 끝에 완공된 ‘황궁’이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이른바 ‘가족타운’이 바로 그것인데 건물 연면적 1,040평에 4개동의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공시가격만 85억2천만원으로 자체 발전기와 쿨링 타워, 차량용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건물 공사에 공급된 페인트는 아파트 한 동 전체를 칠할 수 있는 분량인 데다 품질도 여러차례의 엄격한 테스트 끝에 통과된 친환경제품이어서 화제를 낳았다.

-10년 걸린 이태원 ‘황궁’ 공사-

아닌게 아니라 대한민국은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이 분명한데도 곳곳에 황제들이 득실거리고, 황제라는 호칭을 즐겨 붙이는 기묘한 나라이다. 입장료를 내지 않고, 앞뒤 팀의 간격을 여유있게 잡은 채 즐기는 골프는 ‘황제골프’라고 한다. 사용료를 내지 않고 일반인의 출입을 원천봉쇄한 채 라켓을 휘두르는 테니스는 당연히 ‘황제테니스’이다. 강남 유흥가를 주름잡는 조직폭력배의 두목이나, 심지어 카바레·나이트클럽에서 활개치는 제비족들도 ‘밤의 황제’라는 별호를 어렵지 않게 얻곤 한다. 그뿐인가. 커피 전문점에 밀려 이제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재래식 다방의 이름도 ‘황제 다방’이 적지 않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명실상부한 황제는 ‘황제경영’을 하고 있는 재벌총수들이다. 계열사간 순환출자라는 기발한 방법을 동원해 불과 5% 안팎의 지분율로 그룹 전체를 떡 주무르듯 하는 강대무비한 권력과 그 자리를 자식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는 세습제는 제국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는 삼성의 막강한 영향력을 빗대 흔히 ‘삼성 공화국’이라고 하지만 이는 아무리 비유라 하더라도 잘못된 것이다.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혁명 등의 과정을 거쳐 주권재민, 민주주의, 자유, 평등 등의 원칙을 확립한 공화국을 삼성에 연결시킨다면 공화정과 공화주의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삼성은 ‘공화국’이 아니라 ‘제국’일 뿐이다. 지난해에만 부사장급 인사를 11차례 했고, 등기이사로 선임된 최고위 전문경영자들도 임기 도중 파리잡듯 잘라버린 현대·기아차 그룹도 제국이며 그 총수인 정몽구 회장도 당연히 황제이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황제의 제국도 시대적 변화를 읽지 못하거나, 그것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5대양 6대주에 걸쳐 ‘위대한 프랑스’의 기치를 높이 세웠던 부르봉 왕조도 자유·평등·박애라는 거대한 역사적 물결 앞에 단숨에 무너졌으며, 농노들의 비참한 삶을 외면한 채 연일 주지육림에 빠졌던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도 볼셰비키 혁명의 노도(怒濤) 속으로 허망하게 떠내려 갔다.

-비리관행과 결별 시대적 요구-

이 땅의 황가(皇家)인 삼성과 현대도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듯하다. 지난해 10월초 법원이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변칙 증여 사건에서 삼성 고위관계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것이나 며칠 전 검찰이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을 비자금 및 편법 경영권 승계 등과 관련해 구속한 것은 단순히 법원과 검찰의 전향적 조처를 훨씬 뛰어넘는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비자금 조성, 횡령과 같은 재벌의 관행적 비리, 특히 편법 경영권 승계라는 전근대적 대물림과는 결별하라는 시대적·역사적 요구의 응축이다. 삼성과 현대를 비롯한 황가들은 이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공화정으로의 전면적 이양은 도저히 불가능하겠지만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 입헌군주제쯤이라도 채택할 것인가.

〈손동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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