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安언어의 부활

이종탁 | 논설위원

과거 독재정권 시절 정부가 즐겨쓰던 단골 언어가 있었다.

‘불법집회, 불순한 의도, 사회 혼란, 국론 분열, 배후세력, 유언비어 유포, 주동자 색출, 발본색원, 그리고 법과 원칙에 따른 엄정 대처.’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읊조려도 왠지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공안(公安) 언어다. 대규모 반정부 집회나 시위가 있을 때 정부는 늘 이런 언어로 된 담화문을 냈다. 여차하면 몽땅 잡아가겠다는 으름장이다. 실제 정부가 이런 담화를 낼 때마다 또 하나의 시국사건은 시작됐고, 국민 생활은 멍들어갔다.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이런 단어는 우리 곁에서 하나 둘 자취를 감췄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폭력시위로 당국에 잡혀가는 사람은 있어도 배후세력이니 발본색원이니 하는 말들은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 공간에서 낚고 낚이는 일은 있어도 권력의 눈을 피해 지하에서 퍼뜨리는 유언비어는 더 이상 필요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게 공안 언어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잊혀진 듯했다. 그런데 그 언어들이 요즘 불현듯 살아나 우리 귓전을 다시금 때리고 있다.

“국론분열, 배후세력, 발본색원…”

한승수 국무총리는 얼마전 미국 쇠고기 개방문제와 관련해 낸 담화문에서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불법 집회로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행위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처하겠다”고 했다. 과거에도 담화는 대개 총리 몫이었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출처가 불명한 괴담에 혼란을 겪거나 국가 미래가 조직적이고 악의적인 유언비어에 발목 잡히는 일이 없도록 사이버 폭력 척결에 검찰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했다. 한나라당 대변인은 “국민의 막연한 불안감을 악용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세력이 있다”고 지적했고,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은 “쇠고기 촛불집회의 배후세력은 전교조”라는 취지의 말로 불을 지폈다. 요직에 있는 인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공안 언어 살리기에 나선 것이다. 급기야 재향군인회는 “반미 친북좌파 세력이 부활을 꿈꾸며 날뛰고 있다. 이들을 일망타진하여 완전 척결해야 한다”는 신문광고를 실어 분위기를 잡았다.

검찰총장이 사이버 폭력이라고 성격규정을 한 유언비어는 무얼 의미하는 걸까. 촛불집회 참가자들 사이에 떠돈다는 ‘뇌송송 구멍탁’이라는 말은 광우병의 무서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니 유언비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휴교를 알리는 문자메시지나, 독도를 일본에 팔았다는 따위의 말은 명백히 유언비어이긴 하나, 그저 허무맹랑할 뿐 국가의 미래를 발목잡는 폭력으로 보기는 어렵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니니 공안 언어로 국민 겁주기라는 해석밖에 안 나온다.

정부 당국자의 입에서 겁주기식 공안 언어가 나온다는 것은 정부와 국민의 거리가 그만큼 멀어졌다는 뜻이다. 정부는 국민을 불순세력 또는 불순세력에 놀아나는 집단으로 보고, 국민은 그런 정부를 더욱 불신하면서 마찰의 파고가 높아가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광우병 얘기하는 사람들,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이 타결되면 한우농가 지원 문제가 논란이 될 줄 알았는데 광우병 문제로 흐르더라는 언급도 했다. 매사 색안경을 쓰고 보니까 핵심을 놓치거나 헛발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국민과 거리 멀어졌다는 의미

우열반 편성, 0교시 허용 등의 학교자율화 조치를 그 흔한 공청회 한번 않고 발표한 뒤 김도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보인 반응도 같은 맥락이다. 김 장관은 전교조뿐 아니라 교육계 다수여론이 반대하자 “전 국민이 환영하고 좋아할 줄 알았다”며 어리둥절해했다. 이번 쇠고기 촛불집회에 중·고생이 대거 참가한 것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지만 교육부의 민심과 동떨어진 교육정책도 촉발 원인 중 하나라는 게 정설이다.

결국 문제는 민심의 이반이다. 여섯달 전 사상 최대의 표차로 대통령을 만들어준 국민이 왜 벌써 탄핵을 입에 올리고 있는지 그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는 게 해결의 단초다. 공안의 추억을 떠올려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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