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8·15

김봉선 논설위원

올해 8·15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각별했을 듯싶다.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어머니를 잃은 그가 대통령으로서 맞는 첫 8·15였다. 바로 전날 133일 만에 개성공단 정상화에 합의함으로써 ‘반쪽짜리 광복’으로 나뉜 남과 북이 긴 불통의 시간을 해소할 수 있는 여지도 마련했다. 남북이 상호 간에 광복절의 의미를 새기는 듯 이심전심으로 정상화를 서두른 흔적 역시 소중한 경험이다. 8·15 전날 밤 경축사를 다시 손질하면서 박 대통령은 잔잔한 흥분을 느꼈을 만하다.

그간 박 대통령의 8·15는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적으론 국가 경축일이지만 사적으로는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자연인 박근혜에게 경축과 기일이 등가일 수 없었을 터이니 아무래도 슬픔과 고통의 시간이었을 공산이 크다. 어머니 육영수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북한이 보낸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지 올해로 서른 아홉 해다. 시간은 흘렀고, 그 딸은 국립극장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 어머니가 숨진 기념식장에서 대통령으로서 축사를 했다. 북한 공작원에게 죽음을 당한 이의 딸이, 북한이라는 쉽지 않은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후속 조치인 추석 이산가족 상봉이 금강산관광 문제와 맞물리면서 회담장소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나 박 대통령이 큰 과제를 위해 작은 것은 양보하는 여유를 갖길 바란다. 그것이 북한을 ‘통 크게’ 극복하는 길이다.

[경향의 눈]박근혜의 8·15

박 대통령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어머니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날 묘소를 찾았고, 추도식에는 여동생 내외가 참석했다. 매년 추도식을 거르지 않았던 만큼 이례적이다. 청와대는 ‘정부 기념식과 추도식 시간이 겹쳐서’라고 설명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참석할 의향이 있었더라면 추도식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을 터이고, 무리해서라도 추도식장을 찾았다 한들 흉이 될 일은 아니라고 본다. 평소 자기 결정은 밀어붙이는 스타일을 감안할 때 박 대통령 스스로 참석을 접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번 불참을 박 대통령의 마음속 8·15가 바뀌는 징후로 읽고 싶어지는 이유다. 아니, 긍정적 신호라 믿는다. 이제는 비운의 가족사를 딛고 어머니와도 긍정적 의미의 단절이 필요한 시점이다.

여름 휴가 때 박 대통령은 창원의 저도를 찾았다. ‘저도의 추억’이라는 글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들은 박정희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현실은 그 이상이었다. 박 대통령은 74세 고령의 김기춘씨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불러냈다. 한 외교관이 아버지시대의 연으로 정무수석에 발탁되는 일도 생겨났다. ‘저도의 추억’은 단순한 향수나 추억담을 넘어 아버지를 이어받겠다는 신호였던 셈이다. 김기춘, 그가 누구인가. 청년 검사 시절 유신헌법을 기초했고, 아버지 시절 두 차례나 청와대 비서를 지냈다. 검사로서는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을 비롯한 각종 공안사건의 전면에 서 있었고, 20여년 전 대선 때는 지역색을 자극하는 초원복국집 사건을 주도했다. 지금은 박 대통령의 후원 모임인 ‘7인회’를 이끌면서 박정희시대와 현재를 잇는 가교를 맡고 있다.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아버지의 그늘이 걷히기는커녕 짙어지고 있다. ‘퍼스트 레이디’ 시절부터 몸에 밴 ‘박정희식 통치’가 기승을 부릴 태세다. ‘한국적 민주주의’란 수사로 민주주의를 유린했던 1970년대와 21세기도 10여년이 지난 현재의 충돌이다.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에 대한 박 대통령의 대응은 불길한 조짐이 그 이상으로 내달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촛불민심은 박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국가정보기관은 아버지시대의 통치를 가능케 한 유효한 수단 중 하나였다. 그때의 추억으로 박 대통령은 국정원의 정치개입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박 대통령은 사건 발생 직후에도 진상규명보다 댓글을 단 국정원 여직원의 인권을 거론한 바 있다. 훼손된 민주주의에 대해 저항하며, 민주주의 바로 세우기에 나선 시민들의 소리가 제대로 들릴 리 없다. 박 대통령의 위험한 민주주의관은 최대의 아킬레스건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촛불민심을 수용하고, 3자회담 등을 통해 야당을 껴안을 일이다. 이 과정을 통해 박정희식 통치를 청산하고, 의심받는 민주주의관을 곧추 세우며, 야당을 존중하는 정치의 본령 회복에 나서야 한다.

시쳇말로 박 대통령은 요즘 잘나가고 있다. 남북관계의 개선 기미가 뚜렷한 데다, 확고부동한 지지층과 야당의 미미한 존재감은 유리한 환경이다. 대선 고지까지 오르는 데 밑거름이 돼온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유산은 지금까지로 족하다. 그것은 과거의 언어이지 미래의 언어가 아니다. 부모로부터 ‘정치적 이유(離乳)’가 절실한 시기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8·15가 다시 두 갈래로 분화하기 시작한 문턱에 섰다. 국가적으론 통일의 기반 구축을 비롯한 완전한 독립의 추구, 개인적으론 아버지와의 단절을 통한 홀로서기가 그것이다. ‘박근혜의 8·15’는 또 한번 진화할 적기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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