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김정은에게 주한미군은

손제민 논설위원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평양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Gettyimages/이매진스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평양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Gettyimages/이매진스

‘주한미군 철수’라는 북한의 공식 입장과 달리 이따금 북한 지도부가 ‘주한미군 용인 가능’ 언급을 했다는 전언이 나오곤 한다. 이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90년대 초 김일성 때이다. 김용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1992년 아널드 캔터 미국 국무차관과 만나 ‘조·미 수교를 해주면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 통일 후에도 미군은 남한 또는 조선반도에 주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탈냉전 후 고립 위기에 처한 김일성이 핵 개발을 지렛대로 대미관계 정상화를 하겠다고 전략적 결정을 한 뒤 내놓은 것이다.

김정일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비슷한 입장을 밝혔다. 당시 김정일은 ‘미군은 통일된 후에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머무르는 것이 좋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에게도 ‘냉전 이후 우리 입장이 달라졌다. 미군은 이제 안정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군 철수라는 공식 입장을 밝히면서도 북·미관계 정상화, 주한미군 지위·역할 변화를 전제로 미군 주둔을 용인할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일종의 전략적 모호성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국경을 접한 중국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과 관계 있다.

김정은도 이를 계승한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이는 2018년 북·미 정상회담 조율을 위해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을 통해 알려졌다. 폼페이오는 회고록에서 “김정은은 자신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주한미군이 필요하고, 중국 공산당은 한반도를 티베트와 신장처럼 다루기 위해 미군 철수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선대보다 좀 더 직접적 발언이다.

다만 지금 김정은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똑같이 대답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시 김정은은 첫 북·미 정상회담 성사에 적극적이었고, 미국 입맛에 맞는 얘기를 했을 수 있다. 그때와 달리 북핵 문제는 점점 미·중 경쟁의 하위 변수가 되고 있고 북한은 이 구도 속에서 운신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럼에도 김정은이 물려받은 지정학적 유산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북 지도부의 주한미군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이 폐기됐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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