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파란 눈의 ‘한센인 할매’

차준철 논설위원
소록도에서 40여년 간 헌신한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가 지난달 29일 오스트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2017년 9월 촬영한 마가렛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소록도에서 40여년 간 헌신한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가 지난달 29일 오스트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2017년 9월 촬영한 마가렛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서럽도록 외로운 ‘작은 사슴섬’ 소록도에 파란 눈의 천사 할매들이 있었다. 한 살 많은 마리안느가 큰할매, 한 살 적은 마가렛은 작은할매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병원 간호학교를 마치고 1960년대 한국의 한센인 격리 수용지 소록도를 찾아 온 두 간호사는 20대 청춘 시절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환자들과 함께했다. 1995년 12월 소록도에 간 경향신문 기자는 “짓물러가는 환자의 발가락·손가락 상처를 맨손으로 하나하나 떼어내 소독을 해주었고, 어쩌다 피고름이 얼굴에 튀어도 담담했다”고 할매들의 모습을 전했다.

두 이방인을 보고 처음에는 ‘노랑머리 귀신’이라며 도망쳤던 환자들은 “험상궂은 상처를 섣달그믐날 떡 주무르듯 매만져준다”며 마음을 열었다. 부모도 버린 우리를 돌봐주는 참 대단한 분들이고 ‘소록도의 마더 테레사’라고 했다. 둘은 젊은 시절 ‘수녀님’으로 불리다가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지면서 ‘할매’로 불렸는데, 이 친근한 호칭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소록도에서 한평생을 무보수 자원봉사자로 헌신한 할매들은 작은 방에 TV조차 들여놓지 않고 환자복을 재활용한 옷을 입으며 검박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2005년 11월21일 아침, 할매들은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홀연히 소록도를 떠나 고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입국 때 가져온 여행가방 하나가 이삿짐의 전부였다. “이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돼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난다”는 게 마지막 인사였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하늘만큼 감사하다”고도 했다. 그렇게 소록도의 천사, 한센인의 할매들은 마지막까지도 큰 울림을 전하고 떠나갔다.

‘백수선’이라는 한국 이름도 가진 작은할매 마가렛 피사렉이 지난달 29일 오스트리아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귀국 후 요양원에서 지낸 그는 단기 치매 증상을 겪으면서도 소록도 삶과 사람들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2016년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당시 한국 초청을 받고도 건강이 좋지 않아 오지 못했던 마가렛은 끝내 소록도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운명했다. 소록도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생전 꿈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한없는 사랑과 나눔을 펼친 그의 이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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