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도루묵 살리기

차준철 논설위원
강원도가 산란장 조성 작업을 벌여 연간 어획량이 한때 늘어난 2017년 강릉 주문진항에 도루묵이 널려 있는 모습. 연합뉴스

강원도가 산란장 조성 작업을 벌여 연간 어획량이 한때 늘어난 2017년 강릉 주문진항에 도루묵이 널려 있는 모습. 연합뉴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이 피란길에서 어부가 올린 생선을 맛있게 먹고 감복했다. 생선 이름을 물었더니 ‘묵’이라고 했다. 선조는 “맛에 비해 이름이 보잘것없다”며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훗날 궁궐로 돌아온 선조가 은어를 잊지 못해 다시 찾았다. 하지만 춥고 배고팠던 그때의 그 맛이 아니었다. 실망한 선조 왈, “도로 묵이라고 불러라.” 생선 이름으로는 어색한 도루묵의 유래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다. 이는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다. 선조가 도루묵 주산지인 동해안 쪽으로 피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팔도 별미를 소개한 <도문대작>에서 “목어(木魚)를 좋아했던 전 왕조의 임금이 은어로 이름을 바꿨다가 많이 먹고 싫증 나자 다시 고쳐 환목어(還木魚)로 불렀다”고 썼다. 환목어의 우리말이 도루묵이다. 조선 정조 때 이의봉이 쓴 <고금석림>에도 고려 왕의 환목어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기록들이 있어 도루묵 유래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시초가 불분명해도 일맥상통하는 점은 도루묵이 왕에게도 귀한 대접을 받다가 하찮은 생선으로 강등되는 부침을 겪었다는 것이다.

도루묵은 겨울철 동해안의 별미다. 비운의 유래 때문에 맛없는 생선으로 오해받지만 알이 가득 밴 제철 ‘알배기’ 도루묵은 구이로도, 조림·찌개로도 일품이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해안에 지천이었지만 그후 어획량이 급격히 감소했다. 1971년 2만5000t으로 정점을 찍고는 2000년대 중반 연간 2000t으로 줄었고 지난해 380t에 그쳤다. 기후위기로 동해 온도가 올라가 찬 바다에 사는 도루묵이 설 자리를 잃은 데다 무분별한 어획이 계속돼 씨가 마른 것이다. 수온 상승 탓에 도루묵이 알을 붙여 번식하는 해초가 줄어들면서 통발·그물에 낳은 알들이 파도에 휩쓸려 버려지는 게 큰 문제다.

도루묵이 돌아올 수 있을까. 강원도가 10년 만에 도루묵 살리기에 나섰다. 도루묵이 알을 낳을 수 있는 해조류를 바위에 붙여 인공 산란장을 조성하고 매년 치어 10만마리를 방류할 계획이다. 도루묵은 별미만큼 유명한 ‘말짱 도루묵’이라는 속담을 남겼다. 서민의 사랑을 받는 도루묵을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말짱 도루묵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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