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끝 모를 ‘애그플레이션’

박재현 논설위원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유명한 폴 볼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1927~2019)은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물가 상승을 막았다. 미국의 기준금리를 남북전쟁 이후 최고 수준인 연 21%까지 끌어올리기도 했다. 반면 물가 상승을 막을 기회를 놓친 아서 번스(1904~1987)는 최악의 연준 의장으로 꼽힌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 기류에도 금리 인상을 꺼리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굴복해 금리를 내리기까지 했다. 결국 미국 물가 상승률은 13%까지 치솟았다. 이처럼 물가는 한번 고삐가 풀리면 다시 잡기가 매우 어렵고, 고금리 극약처방과 고통도 피할 재주가 없다. 번스 의장은 인플레이션을 만만히 본 셈이다.

물가 상승의 발원점과 위력은 다양하게 변주돼 왔다. 농산물발 물가 폭등을 뜻하는 애그플레이션은 농업(agriculture)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성한 말이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07년 12월 ‘식품 헐값 시대는 이제 종말을 고했다’는 제목으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애그플레이션이 다시 화두가 된 건 러시아가 밀 곡창지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였다.

먹거리 비상벨은 국내에서도 곧잘 울린다. 우유 품귀로 가격이 오르자 ‘밀크플레이션’이 등장하고, 원재료 가격 상승이 외식물가를 부채질하면서 1만원짜리 점심 메뉴를 찾을 수 없다는 ‘런치플레이션’이 언급됐다. 가격 인상 대신 용량을 줄이는 식료품 업체들의 ‘슈링크플레이션’도 얌체 상혼으로 지탄받았다.

농산물값 고공행진이 길어진다고 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10일 ‘농업 관측 3월호’ 보고서에서 이달에도 비싼 과일·채소 가격이 지속될 거라는 전망을 내놨다. 토마토 도매가격은 1년 전보다 43.9% 급등하고, 대파는 50.5%, 딸기도 17.7% 비쌀 것으로 봤다. ‘금’자가 붙은 사과·배 전망도 암울하니, 애그플레이션이 쉬 진화되지 못할 걸로 보인다.

그렇다고 시골에서 소득이 늘었다는 얘기는 없다. 고물가 여파 속에 지난해 농어촌 지역 소득·지출은 도시보다 더 크게 감소했다. 도시에서도 저소득 가구는 ‘먹는 소비’부터 줄인다는 통계가 잡혔다. 어디에 사는지 구별할 이유도 없다. 물가가 꺾이지 않으면, 서민들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다.

신선과실(과일) 물가가 41.2% 상승하며 32년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한  것으로 발표된  지난 6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청과물시장에서 시민이 장을 보고 있다. 한수빈 기자

신선과실(과일) 물가가 41.2% 상승하며 32년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한 것으로 발표된 지난 6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청과물시장에서 시민이 장을 보고 있다. 한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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