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대표 정민석씨 “또 다른 변희수의 죽음만은 막아야죠”

박주연 기자

동성애자인권연대 창립 초기부터 25년째 인권활동

2월 27일 변희수 하사 1주기를 며칠 앞둔 지난 22일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대표인 정민석씨가 서울 종로구 돈의문박물관마을 입구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트랜스젠더 군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린 희수는 꿈을 이루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무거운 숙제를 남겼다”고 말했다. / 김영민 기자

2월 27일 변희수 하사 1주기를 며칠 앞둔 지난 22일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대표인 정민석씨가 서울 종로구 돈의문박물관마을 입구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트랜스젠더 군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린 희수는 꿈을 이루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무거운 숙제를 남겼다”고 말했다. / 김영민 기자

2월 27일은 변희수 하사 1주기다. 육군 제5기갑여단에서 복무하던 중에 성전환 수술을 한 변 하사에 대해 육군은 심신장애 판정을 내리고 2020년 1월 강제전역 결정을 내렸다. 여군으로 살고 싶었던 변 하사는 기자회견을 열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고 전역처분 취소소송을 내 는 등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첫 재판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묻는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공존할 수 없냐고.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차별받지 않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권리에서 끝내 배제되는 거냐고. 답을 찾는 것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대표이자 인권재단 사람의 사무처장인 정민석씨(44)도 해법을 구하려, 변화를 일구려 고군분투 중이다. 동성애자로, 이미 인생에서 수많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그는 동성애자인권연대 창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25년째 인권활동을 하며 오늘도 또 다른 변희수들을 만나고 있다. 게이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2010)의 주인공이자 에세이 <브라보 게이 라이프>(2011)의 저자이기도 하다. 지난 2월 22일 경향신문 사옥에서 정씨를 만났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후 강제전역 판정을 받은 변희수 하사가 2020년 1월 22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입장 표명 후 눈물을 흘리며 경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성전환 수술을 받은 후 강제전역 판정을 받은 변희수 하사가 2020년 1월 22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입장 표명 후 눈물을 흘리며 경례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고 변희수 하사 경제적으로 고통받아
모금활동 벌이지 않은 것 많이 후회돼”

-변희수 하사 1주기를 맞는 소회가 어떻습니까.

“벌써 1년이 지났구나, 지난 1년간 나는 무엇을 했나, 생각해요. 희수는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는 깊은 상처와 슬픔, 원망과 분노 같은 감정을 품고 떠났을 거예요. 저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요.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희수가 생전에 말한 대로 단지 성 정체성을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사회가 되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해요.”

-고인과 개인적 인연이 있었나요.

“희수가 부사관 양성 특성화고(삼계고교) 3학년일 때 띵동이 매달 한 번씩 열었던 거리이동 상담소인 ‘띵동 포차’에 찾아왔어요. 희수는 질문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군인 이야기만 했어요. 큰 자부심이 느껴졌어요. 스스로 닉네임도 ‘명예’라고 지었어요. 포카리 분말 같은 군 상품들도 사와서 나눠줬고요. 그런 희수가 신기했어요. 저를 비롯한 대다수 성소수자들에게 군 생활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거든요.”

-고 변 하사는 고교시절에 이미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았던 거군요.

“희수는 당시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때였어요. 저는 희수가 트렌스젠더라고 확신했지만 말하지 않았어요. 결국 스스로 찾아야 하니까요. 희수는 그렇게 여러 번 띵동 포차에 찾아왔어요. 군에 복무하고부터는 띵동에 후원금을 내며 가끔 안부전화만 걸어왔고요. 그러다 어느 날 TV에서 희수가 기자회견하는 장면을 본 거예요. 이후 ‘변희수 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가 꾸려졌을 때 띵동도 함께했어요.”

고 변희수 하사는 2020년 1월 22일 자신의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며 기자회견 카메라 앞에 섰다. 육군본부가 그에게 ‘강제전역’을 결정한 날이었다. 그가 세상을 등진 뒤인 2021년 10월 7일 1심 법원은 고인이 생전에 제기한 전역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무부가 육군에 항소 포기 지휘를 함에 따라 같은해 10월 26일 고 변 하사의 승소가 최종 확정됐다.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제가 희수가 아니니 말하는 게 조심스럽지만, 저는 2월 27일로 추정(변 하사는 3월 3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되는 사망 시점에 주목해요. 전역 만기일(2021년 2월 28일)을 딱 하루 앞둔 날이거든요. 또 희수는 경제적으로 몹시 힘들었어요. 아르바이트라도 해보려 했지만 이미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터라 번번이 실패했어요. 선택의 폭도 좁았고요. 희수가 군을 상대로 싸우는 동안 버틸 수 있도록 모금활동을 벌이지 않은 게 지금은 많이 후회돼요.”

-그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겼다고 생각하나요.

“그는 트랜스젠더 군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렸어요. 사람들은 2년 만에 갑자기 여군이 되면 군대는 받아줘야 하느냐부터 시작해 각자의 입장을 갖고 희수에게 악플을 달았죠. 하지만 그런 혼란이 희수가 우리 사회에 준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이 없었다면 얼마나 다양한 존재가 공존하고 있는지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군을 비롯해 희수를 애써 지우려는 이들이 있어요. 성소수자들의 존재와 그에 따른 당연한 권리를 요구해야죠. 특히 취업문이 좁은 트랜스젠더에게도 정당한 노동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요.”

-그러고 보면 트랜스젠더가 취업할 수 있는 곳이 상당히 제한돼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결과를 봐도 구직 경험이 있는 트랜스젠더 중 절반이 넘는 57.1%가 성 정체성을 이유로 구직을 포기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고요.

“아르헨티나는 작년 7월에 트랜스젠더의 정규직 취업 장려법을 공포했어요. 행정, 사법, 입법 등 3개 권력기관은 채용 인력의 1%를 트랜스젠더에 의무 배정하고, 트랜스젠더를 고용하는 민간 기업에는 1년간, 중소기업에는 최장 3년간 감세 등 특혜를 줘요. 성전환 수술을 하고 법률적으로 성을 정정한 경우는 물론이고, 성전환 수술을 안 받았으나 생물학적 성과 자신이 느끼는 성이 다른 경우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고 있어요. 우리도 그런 날이 오면 좋겠어요.”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는 국내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트랜스젠더 591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조사결과 트랜스젠더의 65.3%는 지난 1년간 성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법적으로 성별을 정정한 응답자는 8%에 그쳤다. 86%는 의료비용, 법적 절차, 건강 부담 등의 이유로 성전환 수술이 전제된 법적 성별 정정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구직 경험이 있는 트랜스젠더들은 채용과정에서 외모가 남자 또는 여자답지 못하고(48.2%), 주민등록번호에 제시된 성별과 성별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37.0%)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응답자의 57.1%는 우울증, 24.4%는 공황장애로 치료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22.3%는 가족 등으로부터 성적 지향을 강제로 바꾸도록 유도하는 전환치료를 권유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등학생 때 성 정체성 깨달아
대학교 진학 후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 가입
“제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죠”

-변 하사의 사망과 법원의 전역 처분 취소 판결 후 우리 군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국방부가 트랜스젠더 군 복무 관련 연구 용역을 국방연구원에 발주했다는 보도를 봤지만 실제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현재까지 트랜스젠더 관련 정책은 전무해요. 반면 지난해 1월 기준으로 총 21개 국가에서는 트랜스젠더임을 밝히고 군 복무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이들을 위한 별도의 규정과 지침을 마련한 나라도 있고요. 미국의 몇몇 주와 영국에서는 이들에 대한 의료지원도 제공하고 있어요.”

-트랜스젠더 군인 관리지침은 없지만 동성애자 군인 관리지침은 있지요. 특히 군형법 제92조 6의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는 규정에 대해 오랫동안 인권침해 논란이 있었어요. 폭행이나 협박 없이 합의된 동성 간 성관계도 처벌 대상인데, 동성애자 병사의 경우 민간인 애인과 휴가 때 영외에서 잠자리를 가져도 처벌되나요.

“같은 군인 신분이 아니더라도, 적발될 경우 이 조항을 들어 처벌이 가능해요. 어느 집단에 동성애자가 있으면 성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그래서 솎아내야 한다는 의중이 담긴 동성애 혐오적 조항이에요. 이 법의 폐지를 위해 십수년간 싸워왔지만 번번이 좌절했어요. 헌법재판소는 세차례나 합헌 결정을 내렸고요.”

-정민석씨도 아주 힘겨운 군 복무 시절을 겪은 것으로 알아요.

“만 스물한 살 때 군에 입대하고 2~3개월 후, 사귀던 동성 친구로부터 온 편지를 부대원들이 장난으로 공개했어요. 놀림이 이어지면서 아우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에 대한 공포를 극심하게 느꼈죠. 탈영을 감행했다가 겁이 나 하루 만에 돌아갔어요. 군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저를 2개월 동안 정신병동에 반강제적으로 입원시켰어요. 매시간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했고, 밤에는 독방에서 자야 했어요. 수치스러운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며 견뎠는데, 군의관이 부모님께 저의 성 정체성을 알렸어요.”

-부모님이 많이 놀라셨겠군요.

“한걸음에 달려오셨어요. 충격을 받은 부모님은 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제가 바뀌기만 바라셨죠. 하소연하거나 다그치며 설득하려 하셨어요. 부모님 생각을 하면 늘 마음이 아파요.”

-몇년 전 이름을 정욜에서 정민석으로 바꾼 이유도 친척들이 언론보도로 알아볼 것을 걱정하는 부모님 때문이었나요.

“50%는 그래요. 저도 욜(YOL은 터키어로 길을 뜻함)은 이름이 특별하니까 흔한 이름을 갖고 싶었어요.”

-지금은 부모님과의 관계가 어떤가요.

“제 성 정체성과 관련한 이야기는 아예 서로 꺼내지 않아요. 서로에게 큰 상처니까요. 부모님은 제 마음이 아플까봐 늘 걱정하세요. 저는 그런 부모님 앞에서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많은 말로 과장되게 설명해요. 하지만 저를 포함한 성소수자들이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행복하면 좋겠어요.”

정민석씨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 복무 시절 정신병원에 반강제적으로 수용됐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떠날 계획이었지만, 육우당의 죽음 후 청소년 인권문제에 집중했다. / 김영민 기자

정민석씨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 복무 시절 정신병원에 반강제적으로 수용됐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떠날 계획이었지만, 육우당의 죽음 후 청소년 인권문제에 집중했다. / 김영민 기자

동인련서 참여형 프로그램 꾸준히 기획
그 후 2014년 띵동 공식 출범시켜
청소년 상담·지원 요청 3000건 넘어

-군 제대는 정상적으로 했습니까.

“군의관은 제가 너무 멀쩡해 바로 전역할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자대로 복귀할 것인지, 다른 부대로 갈 것인지 묻길래 자대로 복귀하겠다고 했어요. 이후 병장으로 제대할 때까지 다른 병사들이 피해 보지 않도록 스스로 스킨십을 멀리하면서 방어막을 쳤던 것 같아요.”

-언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나요.

“고등학생 때예요. 워낙 조용해 여자애 같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사춘기가 늦게 오나 보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차츰 제가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평생 가져가야 할 비밀이라고 생각했죠. 당시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트랜스젠더를 다뤘는데, 화장하는 그들을 보며 저는 그들과도 또 다른 부류임을 알았어요. 1997년 세종대 일어과에 입학했는데, 교내 게시판에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이 붙인 대자보를 봤어요. 몇 번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 찾아갔죠.”

-비슷한 고민을 하는 또래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거군요.

“제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어요. 모임 장소가 서울시립대 후문에 있는 반지하 자취방이었는데, 퀴퀴한 냄새 속에서도 모두가 환한 얼굴이었어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용기를 얻었어요. 이후 저도 인적이 드문 새벽시간에 대학들을 돌아다니며 대자보를 붙였어요. 저와 같은 고민을 할 누군가에게 우리가 있음을 알리고 싶었거든요.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은 이후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로, 지금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행성인)로 바뀌었어요.”

-원래 꿈은 뭐였나요.

“제빵사요. 대학 졸업 후 빵을 배우러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어요. 성소수자 차별이 심한 한국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컸고요. 하지만 2003년 4월, 만 열여덟 살 육우당(본명·윤현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포기했어요. 그의 죽음을 수습해야 했고, 책임감을 느꼈으니까요.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문제에 적극 발언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청소년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학교에서 커밍아웃(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했다가 따돌림을 당한 후 자퇴한 육우당은 2002년 처음 동인련을 찾아왔다. 2003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청소년보호법에 있는 동성애자 차별조항을 삭제하라고 권고했다. 그러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노골적인 동성애 혐오를 드러냈다. 시인을 꿈꿨던 육우당은 그해 4월 26일 동인련 사무실 문고리에 목을 매 숨졌다. 그의 죽음 후 수많은 동성애자가 집단 커밍아웃하며 거리로 나섰다. 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시민의 마음도 움직였다. 청소년보호법의 동성애차별 조항은 삭제됐다.

-그동안 동인련에서 ‘무지개 놀토반’을 운영하는 등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위한 참여형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했지요. 그러다 2014년 띵동을 공식 출범시켰고요. 현재 사무실에 상주하며 상담 등을 하는 활동가가 6명인 것으로 아는데, 누적 상담 청소년은 얼마나 됩니까.

“3000건이 넘어요.”

-주로 어떤 고민을 토로하나요.

“저희가 상담유형을 38가지로 구분하는데, 가장 많은 유형이 정신건강이에요. 힘든 마음을 토로하는 건데, 자살의 전조일 수 있어요. 그다음은 가족과의 갈등과 트랜스젠더에게 나타나는 젠더 디스포리아(성별불일치)가 많아요. 상담자 10명 중 5명이 희수와 같은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가진 아이들이에요.”

-이유는요.

“게이나 레즈비언은 어쨌든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학교생활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트랜스젠더의 경우는 더 힘들어요. 2차 성징이 나타날 때 젠더 디스포리아로 인해 몹시 고통스러워하거든요. 자기 몸에 대한 혐오로 인해 자해 확률도 아주 높아요. 그것이 학교와 가정, 교우관계에 영향을 줘서 가출, 자퇴율도 높고요. 그렇다 보니 평균 학력이 낮고 취업문은 더욱 협소해지죠.”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3색 중 하나인 하늘색 꽃을 든  정민석씨 / 김영민 기자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3색 중 하나인 하늘색 꽃을 든 정민석씨 / 김영민 기자

“하루빨리 차별금지법 제정됨으로써
내가 겪는 차별이 참아야 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임을 모두가 깨닫게 됐으면”

-위기에 빠진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뭘까요.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남녀로 구분된 쉼터에 가는 것을 힘들어해요. 그래서 띵동은 이들이 위기의 순간에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잠시라도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주거공간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어요. 여성가족부에도 촉구하고 있고요. 기존 청소년기관들이 이 아이들을 잘 상담하고 지원하는 것도 필요해요. 아이들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시기에 적어도 그들의 고민을 함께 들어주는 성인과 기관이 오롯이 있다면, 이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가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우리가 벼랑 끝에 선 성소수자들의 손을 마지막으로 들어주는 단체는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다양한 방식의 노력을 기울여왔다”며 “하지만 지난해 성소수자들의 잇따른 죽음을 마주하며 왜 노력해도 늘 제자리걸음처럼 성소수자들의 죽음이 반복되는지 암담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지난해 변희수 하사의 죽음에 앞서 트랜스젠더 작가 고 이은용씨, 고 김기홍 전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도 목숨을 끊었다.

-차별금지법(평등법)이 국회에서 표류 중이에요. 어떤 생각이 드나요.

“차별금지법이 지닌 메시지는 매우 중요해요. 내가 지금 경험하는 것이 차별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힘, 그리고 용기 내 말할 수 있는 힘을 주니까요. 많은 성소수자들이 수많은 차별을 겪으면서도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존재로 스스로를 비하하며 살아요. 이 법이 제정됨으로써 내가 겪는 차별이 참아야 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임을 모두가 깨닫게 되면 좋겠어요. 그러면 삶도 달라질 테니까요.”

-3월 대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들은 ‘국회에서 논의할 사안’이라거나 ‘국민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며 차별금지법 제정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심상정 정의당 후보만 적극적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장하고 있는데, 다른 후보들도 용기를 내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차별금지법은 비단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당신들이 국민이라고 이야기하는 많은 약자를 위한 법이고, 그들이 차별을 인지했을 때 삶은 좀더 나아질 수 있다고요.”

그의 말처럼 그가, 그리고 또 다른 변희수들이 우리 사회에서 진짜로 ‘행복’을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고 변희수 하사의 추모문화제는 2월 27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유플렉스 광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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