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위령비, 일 피폭국 정체성 상징 장소···‘강제동원’ 덮고 평화 강조

유정인 기자

기시다, 이달 G7 회의 때 윤 대통령과 히로시마 위령비 참배

일본 원폭 피해 부각, 한국과 비핵화 연대·미와 협력 노림수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한국 원폭 피해자 위령비. 연합뉴스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한국 원폭 피해자 위령비.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리는 오는 19~21일 한·일 정상이 처음으로 일본 히로시마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하게 됐다. 일본 제안으로 이뤄진 데다 당시 희생자에 한국인 강제동원(징용) 피해자들이 포함된 점을 들어 한국 정부는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하고 있다. 히로시마는 일본이 전쟁범죄 가해국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세계 유일 피폭국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상징적 장소다. 한·일 정상 공동참배의 의미는 결국 기시다 총리가 내놓을 구체적인 메시지에 의해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8일 위령비 공동참배 의미를 강조하는 데 집중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일본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뿐 아니라 많은 분이 희생을 당했는데 과거에는 이분들의 희생이 그렇게 많이 알려지거나 추모되기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면서 “한·일 정상이 공동으로 히로시마 한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에 참배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히로시마에서 희생된 한인 중 강제동원 피해자가 포함된 것을 “일본 정부 측에서 알고 제안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전날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일본 정부가 공동참배를 제안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과거사에 대해 진정성 있는 행보를 이어가겠다는 표현”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기시다 총리가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개인적 차원의 ‘위로’ 외에 진전된 사과를 하지 않으면서 윤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은 높아진 상황이다. 이에 따라 위령비 공동참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과거사에 비판적인 국내 여론을 가라앉히려는 뜻이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히로시마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1970년 재일동포 모금으로 세워졌다. 당초 일본 측 반대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밖에 건립된 위령비는 일본 시민사회 등의 노력으로 1999년 공원 안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위령비에는 한글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히로시마엔 약 10만명의 한국인이 군인, 군속, 징용공, 동원 학도, 일반 시민으로 살고 있었다. 원폭 투하로 약 2만명의 한국인이 순식간에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고 적혀 있다. 이는 당시 히로시마 전체 희생자(20만여명)의 10%에 달하는 수치다.

일본이 당시 희생자에 강제동원 피해자가 포함된 점을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원폭은 한·일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 측 목소리에 대한 한국 국민의 민감도가 낮은 분야다. 유일한 전쟁 피폭국인 일본 정부로서도 한·일 양국의 피해자를 함께 추모하며 평화·연대 목소리를 내는 데 부담이 적다.

일본 측은 강제동원 피해자를 명확하게 거론하기보다 다수의 피해자를 추모하며 비핵화를 위한 연대를 강조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전날 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에도 “저 자신도 당시 혹독한 환경 속에서 많은 분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는 개인적 소회를 밝히는 수준으로 과거사 문제를 언급했다.

일본의 위령비 공동참배 제안은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국과 일본이 원폭 투하·피폭국으로서 공동행보를 추진하는 것과도 연관된 것으로 분석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G7 정상회의 기간 중 당시 미군의 원폭 투하에 대해 어느 정도 수위에서 입장을 밝힐지가 벌써부터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016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아 추모한 바 있다.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국 견제 카드로 한·미·일 3국 공조를 강조하는 만큼 이달 열릴 3국 정상회담과 함께 원폭 희생자 추모 행보에서도 3국이 보조를 맞추는 모습을 보이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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