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통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폐지안 만장일치 채택”
정부 “북한, 일방적 폐지 선언…효력 사라진다고 보진 않아”
경협 원천 차단 가능성 낮아 “실리 외교 전환 땐 재교류 물꼬”
북한이 남북 경제협력과 관련된 법과 남북 간 경협 관련 합의서를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관계를 특수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것에 대한 후속 조치다. 북한이 남북 합의 백지화 가능성을 언급하거나 무효화를 선언한 적은 많지만 법적 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폐기한 것은 이례적이다.
북한 공식 매체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7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제14기 제30차 전원회의에서 “상임위원회 정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남경제협력법, 금강산국제관광특구법과 그 시행 규정들, 북남경제협력 관련 합의서들을 폐지함에 대하여’를 전원일치로 채택하였다”고 8일 보도했다.
북남경제협력법은 남북 경협에 대한 일종의 기본법이다. 관세와 결제 방식, 사업 방법 등 경협 절차와 적용 대상이 담겨 있다. 금강산국제관광특구법은 한국이나 외국의 기업 혹은 개인이 금강산지구에 투자할 수 있다는 내용이 골자다. 경협 관련 합의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밝히지 않았다.
이번 조치는 북한이 남북관계를 기존의 특수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것에 따른 후속 조치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말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전쟁 중인 두 교전국가 관계’로 새롭게 규정했다. 이후 남북 간 교류·협력 전담 기구인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 등을 폐지했고, 이번엔 법 폐기에 나선 것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통화에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이후 오랜 기간 쌓아온 최소한의 남북 간 신뢰관계에 기초해 이 같은 법률적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라며 “이제는 북한이 이 모든 것을 부인하고 폐기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이번에 경협 관련 법 등을 언급한 의도에도 관심이 쏠린다. 김 위원장 입장에서 아무리 남북관계 재설정을 공언했어도 선대부터 내려오는 남북 간 모든 합의를 한꺼번에 폐기하는 것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협이 남측의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깔렸다는 해석도 있다. 관세·임금 등 북한이 특수관계를 기반으로 남측 기업에 혜택을 제공해왔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취지라는 것이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경제 분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을 과시하는 차원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국 정부는 북한의 이번 조치가 예견된 것이었다며 당장 한국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북한의 일방적 폐지 선언만으로 합의서 효력이 폐지된다고 보지는 않는다”면서 “현재 남북 간 경협이 진행되는 상황이 아니다. 정부가 당장 취하기로 예정된 조치는 없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법적 토대를 폐기했어도 남북 경협의 가능성까지 원천 차단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북한은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다가도 필요에 따라 실리 외교로 돌아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며 “앞으로 틀림없이 한국과 다시 교류·협력 관계를 맺을 것이라고 본다. 그때는 남북을 두 국가로 두고 북한의 해외 투자 관련 법률 등을 활용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은 워낙 간단하게 법을 만들 수 있다. 어디까지나 지도자의 의지 문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