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유신·3김의 영욕…서쪽 하늘로 지다

정제혁 기자
김종필, 유신·3김의 영욕…서쪽 하늘로 지다

한국 현대 정치사의 가장 논쟁적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부를 무너뜨린 군사정변 주역이었고,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2인자였으며, ‘3김 정치’의 길항 속에 권력의 중심을 탐한 정치인이었다. 그의 타계와 함께 한때 한국 사회를 지배한 ‘박정희주의’와 ‘3김 정치’도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게 됐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2세.

김 전 총리 측은 24일 “김 전 총리가 23일 오전 8시15분쯤 별세했다”고 밝혔다. 김 전 총리는 당일 오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119 구급대에 의해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병원 측은 전했다.

김 전 총리 빈소가 차려진 서울아산병원에는 주말 내내 주요 정치인 등 각계의 조문이 이어졌다.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5일장을 치른 뒤 서울 청구동 자택으로 이동, 노제를 지낸 다음 서초동에서 화장한다. 이후 충남 부여로 가는 동안 모교인 공주고등학교 교정을 들러 노제를 한 차례 더 지낼 예정이다. 이한동 전 국무총리, 강창희 전 국회의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김 전 총리 삶은 민주화와 산업화, 한반도 평화와 반공보수가 교차한 한국 정치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 동지였던 고인은 때로 박 전 대통령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도 평생 ‘박정희주의’ 자장 안에 있었고,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합종연횡하며 민주화 이행기 권력의 틀을 짰다.

고인의 타계를 놓고 ‘박정희주의’와 ‘3김 정치’의 종언을 상징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 박정희주의·3김의 종언…공안·지역·계파 정치도 저물다

5·16 군사쿠데타의 ‘설계자’…중앙정보부 설립도 주도
1987년 민주화 후 3당 합당·DJP연합 등 정치사에 족적

1988년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왼쪽)가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운데),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1988년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왼쪽)가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운데),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김 전 총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3김 정치’다. ‘3김 정치’가 주목받은 건 1979년 10·26 이후다.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이 무너진 자리를 메울 대안으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영원한 2인자’였던 김 전 총리가 떠올랐다. 그러나 민주화의 봄은 벚꽃의 낙화처럼 짧았고 이내 5공의 빙하기가 시작됐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켜던 ‘3김 정치’는 동결됐다.

‘3김 정치’는 7년의 ‘유예 기간’을 거쳐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본격화됐다. 3김은 민주화로 열린 1987년 대선 공간에서 호남(김대중), 부산·경남(김영삼), 충청(김종필) 등 지역 기반을 토대로 할거했고, 결과는 12·12 쿠데타 주역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집권으로 마무리됐다. 이듬해 소선거구제로 치러진 총선에서 3김은 각자 지역 기반을 휩쓸며 집권여당이던 민정당과 함께 여소야대 4당 체제를 형성했다.

3김은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권력 지도를 새로 썼고, 그때마다 김 전 총리는 조연이었다. 1990년 1월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여소야대인 총선 민심을 여대야소로 뒤집은 것이다. 민주화 세력의 한 갈래인 경남이 보수대연합에 합류했고, 호남은 고립·포위됐다.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는 등 민주화를 이행했지만, 3당 합당으로 형성된 지역구도는 지난 28년간 한국 정치를 규정했다.

김 전 총리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연합해(DJP 연합)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이다. ‘민주주의는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가능한 정치형태’라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 집권은 한국 정치 민주화의 질적 도약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 주역 중 하나가 김 전 총리인 것이다.

김 전 총리는 3당 합당 때나 DJP 연합 때나 ‘내각제 개헌’을 내걸었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 약속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행되지 않았다. 4·19혁명으로 들어선, 헌정사 첫 내각제였던 장면 공화정을 5·16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강력한 대통령제를 도입한 주역이 민주화 이후 내각제에 집착한 것은 역설적이다. 충청권을 기반으로 원내 캐스팅보트를 확보하면 안정적으로 권력을 분점할 수 있다는 셈법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 전 총리가 한국 정치에 남긴 흔적은 크고 깊다.

수평적 정권교체 등 민주화 이행기의 연착륙에 일조한 것, 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산업화에 기여한 것은 김 전 총리의 공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지역주의, 보스·파벌 정치, 수구반공주의 등 ‘JP 정치’의 유산이 남긴 그늘도 짙다.

3김의 차이도 간과하기 힘들다.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은 목숨을 걸고 1987년 민주화를 이끌었다. 1인 철권통치가 스러진 뒤라야 정당정치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3김 정치’는 87년 민주화의 부산물이었다. ‘양김’과 달리 민주화에 딱히 기여한 것이 없는데도 정치 전면에 등장한 김 전 총리는 민주화의 ‘무임승차자’에 가까웠다.

3김 정치의 키워드 중 하나는 지역주의다.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전 대통령 측이 ‘초원 복국집’ 사건을 되치기하려 경남 지역주의를 선동한 적은 있지만, ‘충청도 핫바지론’에서 보듯 김 전 총리처럼 당사자가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지역주의를 선동한 경우는 없다.

무엇보다 김 전 총리는 5·16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 질서를 왜곡한 주역이다. 고인이 설립을 주도한 중앙정보부는 이후 수십년간 음습한 ‘정보 정치’의 본산 노릇을 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대전환을 경험 중이다. 냉전 체제에 금이 가고 한반도 평화가 다가오고 있다. 6·13 지방선거 결과는 3당 합당으로 형성된 지역주의 구도에 커다란 균열을 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박정희 신화’는 저물고 있다. 새로운 정치 문법과 새로운 이념, 새로운 인물을 찾지 못한 보수는 미증유의 혼란에 빠졌다. 짧게는 28년, 길게는 5·16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한 구질서가 밑동부터 무너져내리고 있다. 구질서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는 김 전 총리의 타계가 ‘3김 정치’의 퇴장을 넘어 한 시대의 종언으로 읽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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