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호기심…고도로 발달한 ‘창작’은 ‘탐구’와 구분할 수 없다

박주용 교수

(34) 통하는 과학 콘텐츠와 문화-1

과학 서사의 특징과 과학적 정신

단편적인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과학물이 되기고 하고, 공포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 서사의 발생 과정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단편적인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과학물이 되기고 하고, 공포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 서사의 발생 과정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지난달 필자에게 한국과학창의재단이라는 곳에서 흥미로운 질문이 하나 날아들어왔다.

‘<오징어 게임> <기생충>처럼 세계적으로 성공한 콘텐츠를 만든 우리나라에서 <인터스텔라> <마션> <빅뱅이론> <돈 룩 업>과 같은 과학기술 소재의 문화 콘텐츠가 생산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 과학기술은 세계 공통이지만 문화라는 것은 지역색이 강한데 둘을 융합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생각을 알려달라는 요청에 따라 필자는 지난 11월25일 동재단에서 개최한 ‘과학문화산업 비즈니스 매칭데이 행사’에 가서 재단에서 육성하고 있는 과학문화 콘텐츠 전문인력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였다. 과학과 문화 산업이 직접 교차하는 지점에서 지금까지 필자가 즐겨왔던 과학 콘텐츠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기회라고 판단돼 짧지 않은 시간에 정성을 들여 강연을 준비해 갔다. 금요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강연장을 가득 채운 청중들이 집중하며 끝까지 듣고 좋은 질문들을 해줘서 강연자 입장에서도 마음에 들었는데, 그 내용을 퓨처라마 독자들과 함께하는 것도 뜻깊을 수 있겠다 싶은 마음에 한 시간을 훌쩍 넘어 진행된 그 강연 내용을 정리해 두 차례에 걸쳐 전하자고 한다.

좋은 콘텐츠의 기본은 ‘서사’…과학은 새로움을 찾는 사고방식
‘불신의 일시정지’란 무기로 상황의 제약 뛰어넘어 세계관 구축
전 세계서 통하게 하려면 ‘과학의 정신’ 살릴 문화적 토양 필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왜 한국에서는 <오징어 게임> <기생충>처럼 성공적인 과학 콘텐츠가 만들어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관심을 갖고 이 자리에 와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평소에 저도 중요하게 여겨온 이 문제에 대한 저의 생각을 여러분들 앞에서 풀어볼 수 있게 되어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오늘의 강연을 준비해보았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한 답을 마련할 수는 없겠지만, 문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또 지금까지 여러 과학 콘텐츠를 즐겨온 애호가로서 생각해온 점들을 정리해 전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재미있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오늘 강연에서 언급될 작품은 <배틀스타 갤럭티카> <듄> <돈 룩 업> <공기인형> <승리호> 그리고 <파이어플라이>입니다. 이 이름들을 미리 말씀드리는 것은, 이 작품 전부 또는 일부를 보신 경우 그 경험을 속으로 되살려보며 제 강연을 들으신다면 제가 드리는 말씀을 더욱더 깊고 밀접하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럼 먼저, ‘과학과 문화 콘텐츠’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과학문화 콘텐츠란 과학을 서사(敍事·narrative)라는 장치를 통해 이야기·미술·음악이 종합된 형태로써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과학문화 콘텐츠라고 불리려면 ‘과학의 본질’을 잘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린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겠지요. “과학은 열물리학, 양자역학, 무기화학, 뉴턴역학, 유전자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요. 사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대답에 나열된 저 이름들은 인류가 ‘과학이라는 활동’을 함으로써 생겨난 부산물입니다. 그래서 이 대답은 과학의 과거와 현재를 일컫는 것이지,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미래를 상상한다’는 의미의 과학의 본질을 썩 잘 나타내주진 않습니다.

오늘 제 강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 더 적합한 답은 “과학이란, 새로운 것을 찾게 해주는 생각의 방식이다”라고 하겠습니다. 즉, 우리가 아직 본 적이 없는 것,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인간이 갖고 있는 ‘호기심’과 서로 밀어주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는 시공간을 열어나가게 해주는 사고방식으로서의 과학의 본질을 마음에 새겨주셨으면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과학 서사, 영어로는 Science Fiction을 줄인 SF에 성장하신 시절에는 ‘Amazing’(기막힌), ‘Astounding’(대경시키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것이겠죠. 당시 일상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법한 이야기들이니까요. 금성에 사는 외계 종족의 대표들이 지구로 온다는 이야기 같은.

1926년부터 발행된 Amazing Stories의 1958년 10월 표지(왼쪽 사진)와 Astounding Stories 창간호 표지(오른쪽).

1926년부터 발행된 Amazing Stories의 1958년 10월 표지(왼쪽 사진)와 Astounding Stories 창간호 표지(오른쪽).

이제는 ‘서사’가 무엇인지 알아볼 차례입니다. 서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논리나 인과관계로 묶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서사가 생겨난 이유로는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엮어야 더 잘 기억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역사라는 것 또한 민족, 국가, 인류 단위의 기억을 서사로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사건으로부터 서사가 만들어지는 간단한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눈앞에 다음의 세 가지 일이 벌어진다고 가정합시다.

[풍선이 터진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여성이 아이를 안아준다]

이 사건들을 다음처럼 묶으면 서사가 만들어집니다:

[풍선이 터져서] 슬퍼진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아이를 달래주려고 [여성이 아이를 안아주었다].

‘과학 서사’도 서사의 하나인 만큼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 요소 사건 또는 사건을 잇는 성분들에서 과학의 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가령, 터진 풍선에 들어 있던 것이 공기나 헬륨이 아니라 미지의 외계 기체여서 그걸 마신 아이가 울도록 조종을 당하게 되었다든가, 그 여성이 아이 엄마가 아니라 미래에서 온 그 아이 자신이었다든가라면 서서히 SF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죠? 그와는 달리 저 사건이 여자고등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데 저 여성이 몇 년 전 이 학교를 다니다가 자취를 감춘 여학생의 혼령이었다고 생각하면 제가 좋아한 우리나라 영화인 <여고괴담> 같은 공포물이 되는 것이겠지요.

이 지점에서 여기 계신 분들께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누군가 괴담은 여고에만 있고 남고에는 없다고 얘기해줬는데, 역시 제가 다닌 남고에서도 괴담 따윈 없었거든요. 다른 분들도 같은 경험을 하셨나요? (청중 동의함) 여고는 역시 무언가 다른 곳이었군요. 항상 궁금했었는데, 감사합니다(청중 웃음).

과학적인 소재를 다룬다는 것 말고 과학 서사의 제일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불신의 일시정지’를 뜻하는 ‘Suspension of Disbelief’(이하 SoD)입니다. 즉 ‘저게 될 리가 있어?’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달라고 감상자에게 부탁하는 일이죠.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SoD가 황당무계를 정당화하는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 과학 서사에서 중요한 실현과 미실현의 세계 사이 경계를 조절하기도 하고, 과학 서사가 벌어지는 ‘상상 가능한 세계’의 영토를 적극 넓히는, 정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한번 찾아볼까요?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보면 스티브 로저스가 날아가는 헬리콥터를 맨몸으로 잡아 끌어내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일상에서 저런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시청자들에게 SoD를 부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시청자로서 그것 하나만을 허용한다면 이제 시청자는 로저스가 맞았던 슈퍼솔저 세럼(혈청)의 효과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깨닫고, 이 혈청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에 나서는 각국 정부와 테러리스트 집단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면서 더욱더 마블의 서사에 빠져들게 되는 거죠. 이게 SoD의 역할입니다.

또 다른 흔한 예로는 우주선 안에 중력이 존재해 인물들이 바닥에 붙어 걸어다니는 걸 들 수 있죠. 서사 안에서 굳이 정당화시킨다면 원심력 또는 영구자석과 비슷한 인공중력 기술이 있다는 설정을 넣긴 하는데, 그런 설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 SoD 덕분에 우리 눈에 익숙한 자연스러운 물리적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여 다른 서사 요소들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2013년 영화 <그래비티>가 실사 영화로는 예외적으로 완전한 무중력 상태를 연출했는데, 사실 그 효과만 부각되고 서사적으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작품이 되고 말았으니까요. 영화 보는 내내 쉴 새 없이 허공을 날아가는 볼펜이 보였는데, 감독이 대놓고 “내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후계자야”라고 외쳐대는 것 같아 오히려 영화에 몰입할 수가 없었습니다(허공을 나는 볼펜이 <스페이스 오디세이> 특수효과의 상징입니다).

또한 특별한 SoD는 서사의 대주제를 상징하는 큰 역할도 맡습니다. 최근 영화로도 개봉한 <듄> 시리즈의 거대한 모래벌레가 그러한 예입니다. <듄>의 모래벌레는 지구의 사막에서 관측된 적이 없는 환상의 동물이지만, 주인공이 생존을 위해 맞붙어 이겨내야만 하는 사막이라는 환경에 역동성을 입히는 하나의 캐릭터로서 나중에 주인공이 모래벌레를 타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장면을 통해 주인공이 사막을 정복했다는 영웅 서사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사막이라는 물리적 환경에 대한 작가 프랭크 허버트의 과학적 이해에 기반한 모래벌레가 단순한 과학적 사실성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상징하는 고차원적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 SoD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학 서사의 기본 요소를 이야기하였으니, 이제 주제를 조금 더 진보시켜서, 콘텐츠의 서사 안에서 과학이 하는 주된 역할이 무엇인지 얘기해보겠습니다. 2015년 영화 <마션>에서처럼 세밀한 과학적 묘사로 인해 사실성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사실성보다도 핵심적인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세계의 영역을 넓혀준다’는 점입니다. 아직은 지구와 달을 벗어나보지 못한 인류이지만, 그보다 더 먼 우주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과학이라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작은 세계, 발딛지 못한 먼 세상을 탐구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과학인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을 좋아하고 그에 감명을 받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일상을 벗어나 자꾸 밖으로 밖으로 가고 싶어지고, 거기에 SoD라는 무기까지 장착해 어떠한 상황의 제약도 깨부술 수 있는 서사를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볼 때, 오늘의 주제인 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과학 콘텐츠란 바로 이 ‘과학의 정신’을 잘 살릴 수 있는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의 정신과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신흥 억만장자로 유명한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와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아시지요? 이 둘은 최근 스페이스X(머스크), 블루오리진(베이조스)이라는 회사를 차려서 우주로 나가겠다며 열을 내고 있지요. 머스크는 우주의 법칙을 탐구하는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베이조스는 학생 때부터 우주 여행 클럽 활동을 해왔다고 합니다. 성인이 되어 마련한 거대한 부를, 어린 시절 갖고 있던 우주 탐험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쓰도록 하는 문화가 바로 과학 서사가 융성할 수 있는 토양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과연 우리나라는 어떠한 토양인지 다음번에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박주용 교수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중요한 건 호기심…고도로 발달한 ‘창작’은 ‘탐구’와 구분할 수 없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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