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힌 가슴 풀엉 살게 마씀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제주 4·3평화공원에 다녀왔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의 깊은 내막을 사진과 전시로 접한 충격은 컸다. 일방적 매도와 학살로 제주도민들의 삶과 가족과 마을이 부서졌고, 존엄은 훼손되었다. 그 7년이 일단락된 후에도 국가권력은 이 사건을 시인하고 해결하지 않음으로써 가해를 이어갔다. 살아남은 제주도민들은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서로 다독이며 숨죽여 앓았다. 나는 이런 문제 방치 방식을 알고 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대하는, 세월호와 같은 사회적 참사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외면과 억압의 중요한 뿌리가 4·3 사건에 있을 수 있겠구나 내내 생각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내담자들 중엔 가정폭력, 괴롭힘과 왕따, 범죄 또는 성폭력 등으로 촉발된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 이분들의 치료를 돕다 보면 트라우마를 유발한 권력과 시스템의 구조에 역사적·사회적 트라우마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유발된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도 사회가 상실을 애도하는 방식, 고통을 겪는 사람을 돕는 방식이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그래서 지난 칼럼에서는 우리가 그 애도에 함께 하는 것이, 트라우마 당사자들이 상실에 대한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를 거치며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썼다.

그러나 트라우마 당사자의 온전한 회복에 필요한 핵심적이고 구체적인 어떤 단계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이 단계에 대한 실마리는 4·3 트라우마센터 홈페이지에 소개된 ‘4·3 이야기마당’에서 찾았다. 4·3 생존희생자 및 유족들이 모여 생애사, 마을사를 나누는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맺힌 가슴 풀엉 살게 마씀(맺힌 가슴 풀고 사세요)”이다. 그렇다. 트라우마 전문가 주디스 허먼이 이야기한 당사자들이 ‘진실을 통과해 회복에 이르는 과정’이, 이야기마당의 사진을 보며 구체화돼 와닿는 느낌이었다. 그랬다. 화해와 공감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공동체 앞에서 스스로 고통을 말할 기회를 마련하고 그가 진실을 말하며 부서진 삶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기다리는 일이었다. 4·3사건 당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고 그 일이 내게 무슨 영향을 미쳤는지를 남들 앞에서 낱낱이 풀어내는 과정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나의 고통을 고발하며 자신의 존엄을 회복하는 중대 행위다. 또한 이야기마당 참여자들이 이 풀이를 경청하는 것은 당사자의 맺힌 시간과 감정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분쟁지역 갈등 해결을 맡아온 도나 힉스는 자신의 책 <관계를 치유하는 힘 존엄>에서 “피해자들이 삶과 감정에 입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선 보상이나 처벌과 별개로, 그들의 고통을 시인하는 일종의 공개적 과정에 대한 욕구가 따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30여년 전 일어난 북아일랜드 분쟁에서의 총격 피해자와 가해자가 직접 대면하는 자리를 만들었던 <진실 마주하기>란 TV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을 적는다. 물론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피해자가 가해자 앞에서 그 일로 인한 고통과 상실을 솔직히 말하고 오랫동안 자신을 사로잡아온 질문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과정이 그야말로 그 당사자들과 공동체의 존엄과 정의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느껴졌다. 가해자는 그 폭력을 저지르기 위해 폭력을 피하고자 하는 자신의 인간성을 스스로와 분리함으로써 스스로를 비인간화했고, 또 피해자들을 정치적 적이라며 비인간화했다. 이렇게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가해자와 공동체 앞에서 직접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정당화했던 폭력과 이후의 묵인, 억압을 인간화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더 많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기다림과 자리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가려진 진실의 내력을 풀고, 맺힌 가슴을 풀고 살 수 있도록.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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