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부터 챙겨라" 경제파탄 악몽 러시아 … 가난한 사람부터 고통받는 무차별 제재 신중론도

박은하 기자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쇼핑몰 현금인출기 앞에 시민들이 줄지어 서 있다. 모스크바|타스연합뉴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쇼핑몰 현금인출기 앞에 시민들이 줄지어 서 있다. 모스크바|타스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서방의 경제제재 여파로 러시아가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연평균 성장률이 마이너스 5% 이하를 기록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온다. 불평등이 심한 러시아에서 취약계층의 어려움이 가중될 것으로 우려된다.

“첫 제재 때부터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약부터 챙겨놔라.’ 어머니 말이 맞다는 걸 빨리 이해했습니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모든 것들이 곧 사라질 테니까요.”

모스크바에 사는 엔지니어 율리아(가명·31)가 7일(현지시간) 르몽드에 전한 말이다. 율리아는 예금을 인출해 귀금속과 컴퓨터를 샀다. 율리아의 남자형제 이반은 가상통화에 눈을 돌렸다.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폭락해 종잇조각이나 다름없게 될 상황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식료품, 의약품, 생필품 부족 현상이 발생하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율리아는 “어머니가 소련 시절 겪었던 가난하고 세상과 단절돼 있던 시간을 우리도 겪을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서방의 경제제재로 러시아 경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퇴출하기로 결정하면서 지난달 28일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는 30% 가까이 폭락했다. 이에 러시아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9.5%에서 20.0%로 10%포인트 넘게 인상하면서 시장금리가 폭등하고 있다. 제재 시작 후 러시아인들이 줄을 서서 예금을 인출하고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케아, H&M, 애플, 넷플릭스 등 서방 기업들의 러시아 사업 중단도 잇따르고 있다. 이란, 아프가니스탄, 북한 등이 국제사회의 제재대상에 올랐지만 이렇게 전방위적인 경제 제재가 단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가부도 위험도 거론된다. 러시아 중앙은행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자산동결 조처 탓에 러시아 외환보유고 6300억 달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올해 첫 국채이자 지급일인 오는 16일이 1차 고비로 꼽힌다. 알리안츠 수석 이코노미스트 루도빅 쉬브랑은 “러시아는 2001년 아르헨티나가 겪었던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경우 경제는 더욱 혼란에 빠질 공산이 크다. 앞서 1998년 디폴트로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물가는 1년 동안 80%나 치솟았다.

러시아 역사상 최악의 경제 침체가 찾아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캐피털 이코노믹스는 올해 러시아 경제 성장률을 -5.3%, 미국계 투자은행인 JP모건은 -7%, 골드만삭스와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9%라고 각각 전망했다. 러시아 경제는 1998년 금융위기 때 -5.3%,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7.8% 역성장을 기록한 바 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석유 제재까지 가해지면 경제성장률이 -14%까지 하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중국과의 밀착이 러시아의 경제 침체 방어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중국은 경제강국이지만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항공기 부품이나 반도체 칩 등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은행이나 기업들 역시 세계경제에 긴밀하게 연결된 상황이라 러시아 기업들과의 교류를 꺼릴 수 있다. 러시아와 중국의 경제 중심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운송비도 많이 든다”며 “중국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생명줄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러시아 경제가 중국 경제에 종속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전방위적 경제제재에 대한 신중론도 나온다. 재재가 올리가르히들 뿐만 아니라 러시아 경제 전체를 옥죄는 방식으로 단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물가상승이 러시아 시민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캐피탈 이코노믹스의 경제분석가 리암 피치는 “1998년 금융위기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르몽드에 말했다. 런던정경대 연구원인 도미니크 뢰스더르는 “현재의 경제제재는 푸틴의 전쟁을 끝내지는 못하면서 민간인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다”고 미국 좌파 매체 자코뱅에 밝혔다. 러시아국가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전 국민의 14% 이상이 절대빈곤층이다. 자원의존형 경제구조, 2014년 크름반도(크림반도) 병합 이후 시작된 제재, 코로나19 충격 등이 겹치면서 불평등이 심해졌고 가계의 형편도 좋지 않은 상황이다.

경제제재가 전쟁을 중단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뉴욕 코넬대 교수 니콜라스 멀더는 1935년 국제연맹의 경제제재가 무솔리니가 집권하던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막지 못했던 점을 거론하며 “푸틴의 침략이 범죄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제재는 필수적이지만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이코노미스트를 통해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서방의 경제제재는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에 가깝다”는 입장이다. 경제재재를 적극 찬성하는 크루그먼 교수도 “올리가르히와 서방의 부패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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