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연극 ‘이 불안한 집’, 극단과 관객 모두에게 도전이다

허진무 기자

아이스킬로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재창작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정신병원으로 이동

광란하고 절규하는 배우 15명의 연기

명동예술극장에서 24일까지 공연

연극 <이 불안한 집>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이 불안한 집>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이 불안한 집>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이 불안한 집>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의 신작 연극 <이 불안한 집>은 극단과 관객 모두에게 ‘도전’이다. 공연 시간이 5시간에 달하는 데다 감상하기도 만만하지 않다. 영국 작가 지니 해리스가 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를 재창작한 작품으로 한국에선 이번이 초연이다. 아가멤논 왕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복수의 저주를 다룬다는 점은 원작과 같다. 하지만 남성인 오레스테스가 주인공인 원작과 달리 여성인 클리템네스트라, 엘렉트라, 이피지니아가 주인공으로 재탄생했다.

<이 불안한 집>도 <오레스테이아>처럼 3부로 구성됐다. 1부 ‘아가멤논의 귀환’은 원작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아가멤논(문성복)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딸 이피지니아(홍지인)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자 클리템네스트라(여승희)가 분노해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2부 ‘나뭇가지 부러지다’부터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가멤논의 복수로 클리템네스트라를 살해하는 인물은 아들인 오레스테스(남재영)가 아니라 딸인 엘렉트라(신윤지)이다.

3부 ‘엘렉트라와 그녀의 그림자’는 1·2부와 뚝 떨어진 것처럼 기묘한 부분이다. 갑자기 무대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정신병원으로 이동한다. 원작에 없는 캐릭터인 정신과 의사 오드리(김문희)가 엘렉트라와 상담하며 자신의 트라우마와 맞닥뜨린다. 원작의 3부에선 오레스테스가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다 아테나의 재판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는다. 복수의 여신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의 원리를 내세우는데, 아테나의 재판은 이러한 사적 복수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상징적 은유가 된다.

<이 불안한 집>에선 3부의 무대를 오드리와 엘렉트라의 내면으로 옮겨와 이야기 전체를 ‘트라우마 극복기’로 전환해버린다. 오드리는 1·2부의 막이 오르내릴 때도 등장해 앞선 피칠갑 복수극이 엘렉트라의 정신증일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신들의 저주를 인간의 정신증으로 전복하는 현대적 상상력이 독특하지만 그리스 비극의 장대한 스케일은 급격하게 왜소해졌다. ‘순수한 소녀’를 내세워 아수라장을 일거에 정리하고 구원하는 결말부는 너무 전형적이라 당황스럽다.

지니 해리스는 2016년 영국 일간지 ‘더헤럴드’ 인터뷰에서 “가족 이야기이긴 하지만 심리적인 측면을 더하고 여성을 무대의 중심에 배치했다”고 말했다. “어떤 식으로든 원작을 사랑해야 하고, 원작에서 가져올 무언가의 느낌이 없다면 그냥 원작을 따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클리템네스트라에서 탐구하고 싶은 부분을 느꼈어요. 3부는 관객을 보호자처럼 느끼게 하죠. 오늘날 우리가 복수의 여신에게서 도망치는 이를 어떻게 대할지 알아보고 싶었어요.”

연극 <이 불안한 집>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이 불안한 집>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이 불안한 집>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이 불안한 집>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김정 연출은 그리스 비극의 처절한 에너지를 배우들의 몸에서 극한까지 끌어내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기자가 관람한 지난 4일 공연에선 배우 15명이 광란하듯이 내지르는 비명, 절규, 고함이 계속돼 건강이 걱정될 정도였다. 배우가 무대 양편 경사면을 타고 위아래를 오르내려야 하고, 몸을 격렬하게 사용하는 동작이 많았다. 클리템네스트라를 연기하는 여승희가 한숨처럼 툭툭 뱉는 대사의 톤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카산드라를 연기하는 공지수도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참여 무용수답게 놀라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의 1악장을 작품 전반에, 5악장 합창 파트를 결말 장면에 사용한 것은 의외로 궁합이 잘 맞았다. 말러는 절망에 빠진 생명이 죽음으로 저문 뒤 다시 살아나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메시지를 이 곡에 담았다. 마음의 창문을 열어 새로운 삶의 빛을 받아들이는 결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 홈’ 춤 동작을 빌려오거나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을 활용하면서 예상치 못한 볼거리를 내놓기도 한다. 국립극단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도전적 작품임은 분명하다.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는 24일까지 공연한다. 공연 시간은 15분씩 2차례 휴식을 포함해 300분. R석 6만원, S석 4만5000원, A석 3만원. 만 16세 이상 관람가.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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