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체계의 폭력을 넘어 ‘우리’의 현시로      

평론 부문 / 송종원

0. 초대장

얘들아, 뭐 하니?

나는 두 눈을 바깥에 줘버렸단다.

얘들아, 얘들아, 어딨니? 같이 놀자.

(시인의 말, <사춘기>)

이 글은 비평문이면서 동시에 초대장이다. 김행숙의 시 세계를 탐색하다보니 어느 순간 나의 손에는 초대장 하나가 들려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초대였다. 그녀가 열어 보이는 세계를 알게 된다면 그 세계로의 초대를 거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리하여 나의 비평은 그녀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는 김행숙의 세계가 조금 더 알려져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나의 글이 당신을 초대에 응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시가 지닌 매혹을 충분히 해명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확신한다. 그러므로 내가 글의 중간중간 당신을 부르더라도 당신은 당황하지 말고 부디 나에게 귀를 빌려주시길, 그리고 결국에는 당신 역시 도래할 ‘우리’에 함께 동참하기를.

1. 충동, 비상사태 그리고 징후

이상한 소리들이 읽는 이의 귀를 핥으며 그의 몸으로 침입한다. 아이들의 그치지 않는 울음(‘우는 아이’)과 귀신들의 야릇한 웃음(‘귀신 이야기2’), “으으으”, “아아아”와 같은 기이한 단말마들(‘가시’, ‘폭풍 속으로’)과 때론 “꺽, 하는 뭔가 한꺼번에 넘어가는 소리”(‘울지 않는 아이’)들. <사춘기>의 지면에 문자 상태로 잠들어 있는 이 소리들은 누군가에 의해 읽히는 순간, 그의 신체를 촉각적으로 자극할 태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유지하려는 힘의 작동에 의해 뜻하지 않게 “이순(耳順)의 귀”(‘新桃林’)를 지니게 되고 그리하여 순화된 소리만을 들을 수 있는 우리에게, 더욱이 들리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믿는 우리들에게(“있다니! 나는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믿음을 보이는 사람인데”, ‘사소한 기록’), 저 소리는 분명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가로지르며 분할하는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현실에서 주어진 쾌락을 고수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일정한 금지명령을 작동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둘의 작동은 현실에 낯선 것이 등장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할 때마다, 그것을 익숙한 것으로 치환하여 현실로 흡수시키거나 아예 현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거해 버린다.

그러나 실제의 사춘기가 그러하듯, <사춘기>의 목소리들 또한 저러한 현실원칙에는 무관심하다. 그들은 오직 현실에 대한 의혹과 꿈을 향한 충동에만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우리를 가로지른 저 분할선을 다시 가로지르고 일상적 쾌락이 설정하고 있는 한계선을 자꾸만 가볍게 넘어서 버리려 한다. 때로는 끊임없이 당신의 “귀를 좀 빌려야겠”다면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있”는 벽에 둘려 쌓인 “귀를 의심하”(‘귀를 의심하다’)라고 중얼거리거나, 때론 “제발 눈을 떠”라는 외부의 강권에 “정말 현실은 눈동자 바깥에 있을까?”(‘눈꺼풀 속의 눈꺼풀’)라는 질문으로 맞서거나, 또는 오직 무모해 보이기만 하는 모습으로 이렇게,

[2009 경향 신춘문예]재현체계의 폭력을 넘어 ‘우리’의 현시로      

으으으 달릴 뿐이다 입에서 쇠 냄새가 난다 무엇에 대한 맹목 때문인가? 무엇에 대한 공포 때문인가?/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무엇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나는 으으으 느낀다 내 속도는 잡아끄는 머리카락의 힘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두피가 힘차게 당겨진다 나는 變身을 도모한다/ 입에서 쇠 냄새가 난다 나는 순수해진다 나는 一點으로 수렴될 것이다/ 집중은 부분적인 마비를 동반한다 심장이 뛰는 속도에 비하면 으으으 내 동작은 슬로우 모션이다 어떤 것도/ 먼저 멈추지 않겠다 나는 지금 무엇에 대한 直前이다 아직 -‘폭풍 속으로’ 전문

<사춘기>의 제일 마지막에 배치된 작품이다. 배치된 자리만을 보더라도 이 시가 김행숙의 시 전반에 대하여 암시하고 있는 바가 상당함을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분석된 결과 역시 이러한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다. 시인 특유의 감각적인 시선이 포착한 세계의 틈을 스스로가 자신의 내부로 끌고 들어와, 그 틈을 드러내기 위해 희생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더욱 덧나게 하거나 또는, 내면의 풍요로움을 통해 그것을 메우는 인간적인 치유책을 마련함으로써, 이기적인 충동이 타인의 승인을 받고 승화로 귀결되던 서정시의 기존 문법을 가지고 보자면, 이 시는 참 특이하다. 왜냐하면 이 시에는 타인에게 승인을 받을 만한 내면이나 이기적인 충동을 승화시켜 주는 어떤 기제나 제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시인 스스로가 적어 놓았듯 내부 없이(“무엇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외부로만 향하는, 기계적 충동에(“입에서 쇠냄새가 난다”) 휩쓸려 있는 운동과 그것의 모호한 방향(“나는 變身을 도모한다”)과 실패로 보이는 것(“나는 지금 무엇에 대한 直前이다 아직”)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를 읽은 당신이 시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분열증적인 것으로 취급하거나, 과잉적인 감정의 노출로 여기더라도 그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이 시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주체의 무방비적인 노출을 목도한 것과 관련되었다는 말에 당신이 조금이나마 동조한다면, 당신은 이 시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목소리가 자신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당신은 시인과 충동의 방향을 달리했을 뿐이다. 일상의 우리가 그것을 내부로 향하게 하여 우울증을 유발하고 있는 데 반해, 시인은 “으으으”와 같이, 고통과 쾌락이 뒤섞인 단말마를 내뱉으면서 머리채를 잡아끌어 자신을 단속하려고 만드는 힘들과 겨루는 방향 쪽으로 나아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혹 당신이 스스로가 고집하고 있는 우울증적 주체의 자리에서 슬그머니 방향을 트는 “變身을 도모”해 준다면, 당신에게는 이 시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당신은 자신을 우울로 오염시키고 있던 그 어떤 것들로부터 벗어나면서, 스스로가 “순수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기대는 쉽게 충족되지 않을 것 같다. 이 시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예술작품에 기대하는 것 중에 하나인 감정적인 전이를 차단하고 있다. 동시에 시의 목소리는 타인과의 공감에는 무심한 채 주체의 특이한 존재방식에만 몰입하고 있다는 인상까지 풍긴다. 일반적으로 충동(drives)이라는 것이 특정 대상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그러므로 항상 “나는 무엇에 대한 直前이다”) 방향만을 가질 수 있다고 알려진 것처럼, 시인 역시 작품의 중심에 넌지시 그것의 방향(“나는 變身을 도모한다”)에 대해 적어 놓고 있기까지 하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자면 이 시는 현실의 상징적 질서를 넘어서려는 충동을 현시(presentation)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때의 충동은 전적으로 ‘나’에 국한된 문제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 시와 유사한 부류의 작품들에 대해 이기적 자폐성을 거론하며 부정했던 평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시인이 강박적으로 반복해서 “나”(“내”를 포함)를 말하고 있음을 보라. 이러한 상황은 저 “나”를 개체적 존재로서의 ‘나’(individual)를 지시하는 말로 한정하기 어렵게 한다. 그것은 차라리 말이라기보다 몸짓에 가까운 무엇으로 여겨지며, ‘너’에 대립하고 있다기보다 ‘나’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충동’과 그것의 방향인 “變身”의 문제 역시 간단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좀더 복잡한 파장을 동반하고 있다.

더 이상 울지 않는 아이는 위험해요, 아주 조용하지만/조용히 내린 눈이 마을을 고립시키죠

-‘울지 않는 아이’ 부분

당신의 자장가야/고운 가루약이야/당신을 재우지//(…)//초코릿과 밤하늘은 분간이 안 되고/비명 소리는 분쇄되지/기계는 말없이/생산해내지/엄마/언니/그런 여자들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고 싶어/당신은 어른이 됐지 -‘초코릿 분쇄기’ 부분

“아이”의 울음과 “당신”의 “비명소리”가 현실의 상징적 질서가 억압하는 존재의 소란 내지 으르렁거림이라는 말은 이미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와 “당신”의 위험이 “마을”과 “여자들”이라는 공동체의 비상사태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한 개체의 발작을 구성하고 있는 기이하고 불길한 소리들이 공동체를 염려하는 말로 접맥되는 현상은 김행숙의 시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시인은 이 시들을 통해 한 개체의 발작과 충동이 개인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비상사태를 드러내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저 기이하고 불길한 소리들이 현실의 징후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의도한 것 같다. 실제로 <사춘기>의 뒷 표지에 실린 ‘시인의 말’은 이러한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흔들리는 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위기’와 ‘죽음’의 징후만을 드러내는 데서 끝날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김행숙의 시 세계로 초대하기 위해 아직 에둘러 돌아가야 할 먼 길이 남았다. 그렇지만 앞선 이야기를 정리하며 다소 성급하게 말하자면, 김행숙의 시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목소리들은 ‘우리’를 위한 어떤 목적 내지는 방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입을 “앙, 앙 하고 다물어” 보고, 지나치게 힘을 쓴다하더라도 “이빨과 이빨 사이” 메울 수 없는 “틈”(‘내 입속의 떡갈나무’)으로 올라오는 소리들이기도 하다. 불안한 말부터 하자. 우리의 일상적 쾌락을 넘어서는 저 기괴하고 불길한 소리들은 분명, 우리의 존재 지반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어떤 위기의 순간을 도래시킬 것이다. 그러나 희망을 조금 앞당겨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그 소리들은 우리에게 일종의 진실을 알게 해준다.

2. “거울아, 거울아, 앞만 보면 세상은 화려강산이니? 거울집은 칠흑인데,”

하루에 두 번, 五臟六腑를 운행하는 협궤 열차가 있다고 말해준 건 상고머리의 여자 귀신이다. 귀신도 사기를 치는가? 그녀와 나는 사이좋게 지내지만 그녀가 말하길,/너는 십 년 만에 비춰보는 내 거울이야. 난 그때 네가 꼭 죽을 줄만 알았는데, 그래서 유감없이 탈출했는데, 같이 죽기에는 피차 지겨웠으니깐, 이해해?/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떤 기억이 이런 식으로 복구된다니! 그녀에게 철썩, 붙어서 도망친 파도들이 막 밀려올 때, 괜찮다고 괜찮다고 나는 누구를 향해서 웅얼대는 것일까?//기차가 ……기차가……기차가……푸른 새벽에 기차가……//어쩌면 정말 괜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은가? 십 년 사이에 나는 아무것이나 용서하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말하길,/너는 십 년 만에 비춰보는 내 거울인데, 거울아, 거울아, 앞만 보면 세상은 화려강산이니? 거울집은 칠흑인데, 나의 外道가 너를 살렸니? 문득, 뒤돌아서서 뭔가 보아야 할 게 있다고/아, 길을 놓쳤다고 느낄 때, 너는 뭐 했니? 하루에 두 번, 五臟六腑를 통과하는 협궤 열차를 놓치고 너는 엑스레이만 찍었니? 그냥 싸르르 지나가는 복통이었니? 나는 정말 없었니? -‘귀신 이야기 1’ 전문

[2009 경향 신춘문예]재현체계의 폭력을 넘어 ‘우리’의 현시로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상황이 또는 당신에게 난해하게 여겨졌던 문제가 결국엔 해결되지 못하고 당신이 살(아지)기 위해 묻어둔 것들이 되었다면 그것들은 언젠가 반드시 귀환하게 마련이다. 의식에 흠집을 낸 그것은 그 자리에 파편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가 방출될 활로가 열리는 순간 밀려간 “파도”처럼 필연적으로 당신의 앞에 돌아온다. 사실 “기억”의 이러한 “복구” 형식은 시인의 의문과는 달리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다. 진정으로 이해하기 힘든 문제는 “기차가 ……기차가……기차가……푸른 새벽에 기차가……”라는 표현처럼 완전한 묘사를 불가능하게 하면서 내밀하고도 파편적인 언어의 잔여물로만 귀환되는 저것일 텐데, 저것의 실체나 의미를 묻는 일은 의외로 이 시를 읽는 데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시를 읽어내는 데 중요한 것은, 저 묘사 불가능한 것의 의미가 아니라 저 말의 주위를 회전하면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시인의 두 목소리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두 목소리 사이의 낙차가 이 시의 핵심이다.

그 목소리 중 하나가 “거울아, 거울아, 앞만 보면 세상은 화려강산이니? 거울집은 칠흑인데”라고 말하며 상대의 안위를 염려할 때, 이 말에서는 왠지 낯익은 음성 하나가 감지된다. 이는 분명 시인 스스로가 자신의 생을 통해 발견한 목소리이겠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 시사(詩史) 안에서 발굴할 수 있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마취상태에 빠진 듯 통각을 결여하고 있는 이에게 그가 처한 위험상태를 지적하는 목소리, 언젠가 이미 들어봄직한 이 목소리, 그렇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이성복, ‘그날’,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라고 썼던 한 시인의 시대에 대한 반성적 선언과 저 귀신의 말은 묘하게 겹쳐져 있다. 두 작품의 연관을 통해서 우리는 반복되는 역사 내지는 변하지 않은 현실의 지세를 보는 것도 같다. 하지만 두 목소리에는 미세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다. 이성복의 다급함이 현실을 고발하는 목소리를 만들고 있었다면, 김행숙은 그러한 현실의 작동에 기여하는 자기 내부의 욕망(“어쩌면 정말 괜찮은 것인지도 모른다…십 년 사이 나는 아무것이나 용서하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까지도 포착한다. 이제 우리 스스로가 애초부터 자신이 현실에 연루되어 있음을 자각해야 하는 순간까지 도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두 가지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안정적인 쾌락과 욕망 사이의 어긋남을 그려내는 중이다. 그 과정은 폭로와 구제를 동반한다. 저 목소리 사이의 갈등은 현실의 가상적 면모는 폭로하고, 현실에서 구제되길 기다리는 욕망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만약 당신이 현실에 연루되어 있는 자가 시인 혼자만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시인이 이끌어내고 있는 저 귀신의 말을 다음과 같이 당신에 대한 추궁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자신이 억압했던 목소리로부터 존재 상태를 염려하는 질문을 받은 당신은 우선, “어쩌면 정말 괜찮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자처럼,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갈등을 애써 무마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갈등의 무마란 언제나처럼 쉽지 않다. 그러니 당신은 애초부터 “용서”할 수 있는 자리와는 무관하면서도,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환상을 보며, 억압되었던 목소리의 출현에 자기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려고도 할 것이다. 여기에 뻔한 것도 있다. 당신은 자신의 존재 내부에 자리한 어둠(“칠흑”)이나 통증(“복통”) 따위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혹여, 통증을 감지한 순간이 오더라도 당신이 한 일이라고는 고작 체계 내 결여와 자신의 위험상태를 근거 짓기 힘든 가시적인 검사이다(“너는 엑스레이만 찍었니”). 그러나 거기에는 당신의 존재 상태 내지 현실의 결여를 증명할 어떤 것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가진 “거울”이 비추는 것은 당신의 실제 존재상태가 아니라 현실 유지에 복무하는 재현체계의 환상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욕망을 보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작동시키는 체계의 욕망을 보는 것이다. 이성복의 시 구절을 한 번 더 빌리자면, 저 욕망의 내용은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그날’,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정도가 될 터인데, 김행숙이 판단하기에 현실은 그리 완벽하지 못하다. 그녀가 파악한 현실은 “집 나간 개”가 “조금씩 더러워져”(‘전화 받는 여자’)가는 곳이며, 이상하게 “썩지 않는”(‘에코’) 어떤 것이기도 하다. 확실히 <사춘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기이하고 불길한 소리들 대부분은 현실의 결여를 상기시킨다.

귀신의 추궁은 어떠한가? 혹시 당신은 어쩐지 약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는가? 당신은 잠시나마 자신의 존재 상태에 대해 의심해 보았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시인의 작업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던 것일 테고, 당신은 <사춘기>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소리들의 요청에 응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강도를 약간 높여보자. <사춘기>에 등장하는 또다른 열차의 운행은 당신을 폭력의 공간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귀신의 목소리가 언급했던 그 “칠흑”이, 또는 환상을 작동하게 했던 “오류”가 “개봉”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늙은 사내 머리를 흔들며 존다. 늙은이의 머리가 가볍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낮술 먹은 청년이 상대 없이 삿대질을 한다. 분을 푸는 청년과 묵묵부답 耳順의 귀./오류, 개봉, 구로, 신도림…… 문은 개폐를 반복했지만 문의 개폐는 역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신도림역 혹은,//재수생 시절 서소문 공원에서 삼립식빵을 뜯다가 뺨을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벤치에 길게 누워 자던 남자는 홀린 듯이 일어나서 나를 때렸다. 더러운 사내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유감없이 구겨진 신문을 적선하고 사라졌다. 이유 모르게 나는 자꾸 불량스러워지고 싶었다./카세트를 어깨에 맨 맹인이 천천히 지나간다. 오류, 개봉……점입가경.//검은뻐꾸기 운다. 신라음반 자연의 소리는 사계의 경계가 없다. 쟁이갈매기와 휘파람새 나란히 날아간다. 동전을 몇 닢 그의 모자에 떨어뜨린 임부는 가볍게 웃으며 슬며시 배를 쓸어본다. 툭툭 발로 찬다고?/맹인의 지팡이가 발등을 때렸다. 나는 그에게 들킨 기분이었지만 여운 없이 날아간 검은 뻐꾸기. 오류, 개봉, 구로, 신도림……

-‘新桃林’ 전문

열차 안은 노쇠한 신체를 점령한 피로(“늙은 사내 머리를 흔들며 존다.”)와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한 취한 젊음의 분노(“낮술 먹은 청년이 상대 없이 삿대질을 한다.”)로 뒤범벅되어 있다. 디스토피아(dystopia)적인 풍경이다. 분노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고, 목숨을 겨우 연명하는 듯한 생명은 어떤 소리에도 반응할 줄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의 재현체계가 이 열차의 목적지로 명명하는 “신도림(新桃林)”은 유토피아(Utopia)를 연상시킨다. 열차는 내부의 불길한 풍경과는 무관하게 유토피아를 향한 자신의 순항을 반복해서 공포하는 중이다. 여기에 당연한 말이면서 시적인 말이 덧붙는다. 재현체계와 실제 사이의 괴리를 일상적 공간을 소재로 날렵하게 표현한 시인이 “문의 개폐는 역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라는 당연한 말을 덧붙일 때, 우리는 이 시가 노리는 것이 단순히 재현과 실제 사이의 거리만이 아님을 눈치채야 한다. 저 당연한 말은 현실 공간의 분할과 지배가 철저히 재현체계의 욕망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알린다. 열차는 늘 체계가 마련한 분배지점에 우리를 이송시키지만, 우리가 도착한 지점은 언제나 우리가 진정 원하는 곳과는 거리가 있지 않던가. 정확하게 체계에 종속적인 공간에서 시인은 자신에게 배분된 지점을 이탈했던 경험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현실의 재현체계가 마련한 지점에서 이탈한 “재수생 시절”, 시인은 그 신분에 부여된 임무를 벗어나 “공원”이라는 허공을 배회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시인은 하나의 얼굴을 본다.

허공에서 허기를 “뜯”던 시인의 앞으로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폭력의 얼굴이었다(“벤치에 길게 누워 자던 남자는 홀린 듯이 일어나서 나를 때렸다.”). 그것은 “이유” 없는 돌연함으로 인해 더욱더 포악스러웠다. 그런데 저 폭력의 얼굴은 사실 체계의 법이 감추고 있던 맨얼굴이기도 하다. 별 이유 없이 병치된 듯한 1연과 2연의 풍경은 현실의 재현체계가 지닌 외설스러움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법의 외설성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나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의 내용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이미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이 말은 은연중에 법과 주먹의 동질성에 대해 폭로하는 말이 아닐까)는 말을 쓸 정도로 법의 맨얼굴을 은연중에 실감하고 있지 않던가. 현실의 질서를 이탈하는 자가 발생했을 때, 현실의 체계는 자신이 내장하고 있던 폭력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 폭력은 대부분의 이탈자들을 길들여 다시 체계의 선로로 보낸다. 그러나 시인은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 체계의 가상이 철저하게 무너진 자리에서, 시인은 “불량스러워지고 싶었다”고 선언한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의 맨얼굴을 본 시인에게 “신도림”이라는 목적지를 거듭 말하고 있는 체계의 알림이 검은색으로 채색되는 것(“검은뻐꾸기 운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는 자연의 소리들이 사실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채기도 쉽다(“신라음반 자연의 소리는 사계의 경계가 없다.”). 여기에 타인의 고난을 보듬는 자기 초월적인 행위조차 체계 내적인 논리로 오염되면서 아이러니하게 교환의 수단이 되고 있음을(“동전을 몇 닢 그의 모자에 떨어뜨린 임부는 가볍게 웃으며 슬며시 배를 쓸어본다.”), 시인이 목격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또 있을까.

이쯤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재현체계의 가상성과 폭력성을 목격한 당신은, 체계의 욕망에 사로잡혀 환상만을 보는 자와 체계의 폭력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는 자 모두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당신은, 이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당신의 “위치”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있는 이 말은 사실 나의 것만은 아니다. 시인 김행숙의 말이기도 하다.

커튼과 커튼이 보폭처럼 펄럭였지만 다른 창문으로 걸어가지는 않을 것이다.//당신은 거기 있는가? 십 년 전에, 혹은, 십 년 후에, -‘위치’ 전문

3. 얼굴과 이별한 자의 능력

당신의 “위치”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말인 것 같지만, 실은 당신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임에 빠질 것까지도 예측한 말이다. 당신의 시선을 차단하고 있던 어떤 베일(“커튼”)이 조금씩 “펄럭”이면서 다른 삶에 대한 전망을 슬그머니 엿보여주더라도, 당신은 태도를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다(“다른 창문으로 걸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변신”이란 대체로 목숨을 건 도약이고 모험이다. 그 과정은 “으으으”(‘폭풍 속으로’), “아,아,아”(‘가시’, ‘으르렁거리다’)와 같은 고통의 단말마가 절로 흘러나오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온 듯하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글의 시작 지점에서 묻어둔 것들이 귀환하는 중이다. 시인이 도모한다던 그 “變身”의 문제 말이다. <사춘기>의 제일 마지막에 배치된 ‘폭풍 속으로’에서 시인이 충동의 방향으로 제시했던 그것은 사실 두 번째 시집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이별의 능력> 곳곳에서 우리는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시인의 변신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점점 더 작아지”기도 하고(‘더 작은 사람’), 호르몬의 신호에 따라 “검은 스크린”이 되기도 하며(‘호르몬그래피’), “고양이”가 되었다가(‘소녀 고양이를 만나다’) 심지어 “훈련소”가 되기도 한다(‘지옥 훈련’). 이와 같은 변신은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일까. 그 비밀은 우선 ‘얼굴’을 버리는 데 있다.

김행숙의 두 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에는 ‘얼굴’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띄게 등장한다. “얼굴의 탄생”과 “얼굴의 몰락”, 해변과 어둠 속에서 출몰하는 얼굴과 얼굴들. 기이하게도 이 얼굴들은 어느 것도 일목요연하게 정돈된 상태가 아니다.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이목구비들 각각이 얼굴을 초과해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모습 내지는(“코로부터 넘친 코”, “귀로부터 넘친 귀”) 얼굴에 남아도는 그 무엇이다. 이 기이한 얼굴 앞에서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당신이라면 이미 이 얼굴에 어느 정도는 근접했다.

우리는 모두 그 얼굴을 밟고 있었다//영원한 미소 위의 신발이거나/썩은 이빨 위의 맨발이거나//우리는 모두 그 얼굴 위에서 휴가를 보냈다/세번째 잠에 빠진 사람과/ 네번째 잠에 빠진 사람과//처음인 듯 흑설탕 같은 잠에 빠진 사람이 있었다/우리는 모두 그 얼굴에 영혼과 발목을 묻은 채, 그 얼굴을 넘어서 멀리 느끼거나/ 점점 가까이 감촉하고 있었다

-‘해변의 얼굴 2’ 부분

시 읽기의 곤혹 속에 시인의 얼굴을 떠올려본 당신이라면 얼굴이 정체성의 지반을 형성하고 있다는 말에 수긍하기란 쉬울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그 얼굴을 밟고 서 있었다”는 시인의 말을 이해하는 데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의 말들일 텐데, 저 모호한 말들을 만들어 낸 바탕에는 얼굴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작용하고 있다. 얼굴은 정치적 영역 또는 전쟁터라는 것. 우리의 얼굴은 스스로가 믿는 자신의 이미지와 타자의 욕망이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곳이다. 얼굴 위에 하나의 표정이 자리하게 되는 과정에서 나의 시선은 늘 타자의 시선을 동반한다. 그런데 이 영토분쟁에서 승리하는 쪽은 대체로 내가 아니다.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우리는 타자의 시선이 우리의 신체를 점유하는 상황을 수락해야만 한다.

일상의 얼굴은 이미 외부의 시선에 의해 구조화된 공간 구성을 마친 상태이니 우리는 그 분쟁지역 위에서 “미소”라는 “신발”을 신고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때때로 무방비상태인 “맨발”로 “썩은 이빨” 같은 고통을 노출할 뿐이다. 그렇게 얼굴은 애초부터 우리의 “영혼과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 얼굴이 일상의 반복으로부터 벗어나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어떤 곳으로 간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세번”도 “네번”도 “잠”에 들어 “얼굴” 위에서 일어나는 힘들의 싸움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면, 그 얼굴은 여전히 그 얼굴로 남을까? 혹시 조금은 “모르는 사람”처럼 되어 있지 않을까?

강변에 서 있었네/얼굴이 바뀐 사람처럼 서 있었네/우리는 점점 모르는 사람이 되고//(……)/숫자로 헤아려지지 않는 표정들이 부드럽게 찢어지고 빠르게 흩어질 때마다/ 모르는 얼굴이 태어났네/물결처럼, 아는 이름을 부를 수 없네/피부가 펄럭거리고

-‘모르는 사람’ 부분

“숫자로 헤아려지지 않는 표정들이 부드럽게 찢어지고 빠르게 흩어질 때마다/ 모르는 얼굴이 태어났네”의 구절이 암시하듯, 김행숙은 우리의 얼굴이 지닌 잠재성을 믿는다. 어느 순간엔가 우리의 얼굴이 자신 위에서 벌어지는 영토분쟁의 결과적 배치를 초과할 가능성을 믿는다는 말이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이냐고,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냐고 묻고 싶을 수도 있겠다. 당연한 물음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과신하는 측면이 있다. 그래도 여전히 의심하는 당신이라면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당신을 항상 당신이게 하는 당신의 실체는 무엇이냐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주체의 분열에 관한 담론은 이젠 너무도 흔한 말이 되어 있지 않던가. 여기에 시간까지 개입시켜 보면 답은 좀더 분명해진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을 곰곰이 돌이켜보면 당신은 고정된 동일성을 유지하며 살아왔다기보다 의외로 수많은 차이를 겪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의 모호한 정체성 내지 우리가 늘 차이 속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들은 어디에 모여서 한 사람이 되었나. 우리는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많은 이름들은 붙였다, 뗐다, 붙였다, 투명테이프처럼. 안녕. 안녕. 금방 버려진 이름들과 함께하였던 우리의 유머와 블랙. 사랑과 블랙. 우리들은 사랑스럽고 드디어 모호해진다.

-‘한 사람 3’ 부분

시인이 우리들을 “사랑스럽고” “모호”하다고 말한 건, 그녀가 우리가 지닌 이별의 능력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이름을 “뗐다, 붙였다” 하면서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이름들에게 순순히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저 능력 말이다. 이러한 능력에 관해서라면 당신 또한 예외가 아니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할당된 기표(“이름”)를 초월적인 범주로 여겨 그것에 자신을 봉합하고 그로부터 새어나오는 어떤 것들을 단속하지 않는 한, 당신 또한 어떤 것의 직전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 길을 돌아 마주한 우리의 얼굴은 애초부터 이런 상태가 아니었을까.

해변의 얼굴

녹아내리는, 끝없이 다가오는, 웅웅웅웅 끓어오르는, -‘소수점 이하의 사람들’ 부분

형식이라는 것은 없고 오로지 “끓어오르는” 질료로만 가득 찬 저 무너진 얼굴의 폐허를 보고 당신이 너무 당황스러워 한다면, 우리보다 먼저 저것을 본 사람의 이름을 불러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제공된 지금-여기의 재현체계로는 비추어보기 힘든 이 사건적 얼굴의 도래에 대해서라면, 사실 시인보다 먼저 시인과 같이 “해변”에 서서 말하던 자가 있었다. <말과 사물>의 말미에서 푸코는, 인간이란 지식의 근본적 배치가 변화된 결과에 따라 최근에 생겨난 산물이라고 언급하며, 그러므로 다시 배치가 바뀌는 사건이 도래하면 인간은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 이내 지워지게 되리라’고 적은 바 있다.

푸코는 인류의 지식체계들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하면서 어떠한 지식도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지식-권력에 의해 구성되고 관리되는 인간 또한 일시적인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혔다. 지식체계의 지층들을 파헤쳐가며 그것의 변동에 따라 사라진 얼굴들을 마주한 그이기에 근대적 지식으로 구성된 인간의 얼굴 또한 몰락한다는 것을 예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인간의 얼굴과 이별하고 도래하게 될 새로운 주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도래할 주체는 분명 ‘주어지지 않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식론적 대상이라기보다 새로운 존재론적 태도를 요하는 문제다. 푸코가 과거의 지식체계를 탐험하며 사건적 순간의 도래를 예측하는 데서 멈춰 섰다면, 시인 김행숙은 그 멈춰진 지점에서 몸을 쓴다. 그녀의 몸은 새로운 존재론을 실험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지금-여기로 끌어당기고 있다. 다시, ‘해변의 얼굴 2’의 부분이다(앞서 인용된 부분이 시의 앞부분이고, 지금 인용하는 부분은 나머지 뒷부분이다).

가까이 큰 새가 날고/ 멀리 작은 새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높아졌다, … 라라라 음악의 계단처럼/ 큰 새가 먼저 사라지고 작은 새가 나중에 사라졌다// 그 얼굴의 끝이 세계의 뒷면으로 반원처럼 돌아가고/ 메아리처럼 다시 한 번 돌아오고 있었다

-‘해변의 얼굴 2’ 부분

몰락하고 있는 얼굴 위에 새들이 나는 풍경이 있다. 시인은 이 풍경을 분화된 감각 이전의 원초적인 감각적 형태, 다시 말해 공감각적으로 감지하는 중이다. 새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듣기도 하는(“라라라 음악”) 시인의 태도를 보라. 얼굴이 지워지고 잠재되어 있던 가능성들이 “돌아오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존재론의 단초를 본다. 저 공감각적 능력의 회복은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얼굴의 끝이 세계의 뒷면으로 반원처럼 돌아”간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저 말은 단순히 기존의 존재방식의(“그 얼굴”) 몰락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우리의 얼굴에 특권을 부여했던 한 세계상의 몰락이 함께 있다(세계의 뒷면으로 반원처럼 돌아간다는 말은 세계 역시 뒤편으로 사라진다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 우리의 존재 방식의 변화가 곧 세계의 변화까지도 이끄는 것이다.

4. 연대하는 리듬으로 도래하는 ‘우리’

얼굴을 버리자 존재 방식의 변화와 세계의 변화까지 너무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우선 존재 방식의 변화에 대해 정리하자. 얼굴과 이별하며 원초적 감각을 회복하는 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피부”(“살갗”)이다.

투시불가능한 피부에 대하여/ 너는 어떤 가능성으로 도달하는가/ 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검은 해변’ 부분

전우처럼 함께했던 얼굴은 또 한명의 전우처럼 도망쳤다. 끝을 모르는 고요한 밤의 살갗 속으로

-‘얼굴의 몰락’ 부분

생각해보면 얼굴과 이별하기 전부터 우리는 분명 피부를 통해 세계와 맞닿아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피부로 와 닿아야 했을 저 감각들은 도대체 모두다 어디로 갔던 것일까. 우리가 근대적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감각이란 세계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형식이 아니라 세계와 대면하는 또 다른 고차원적 형식에 쓰이는 자료에 불과했다. 또한 그것은 명확히 분절되었었고 위계 지워졌었으며, 때때로 인식의 필요에 따라 쉽게 제거될 수도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니까 얼굴을 지우기 전의 우리는 피부 위에서 명멸하는 저 수많은 감각들에 무심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식적 주체가 아닌 신체적 주체로서 존재는 피부를 통해 항상 변신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시인은 그것을 “투시불가능”하다고 썼다. 맞는 말이다. 그것은 분화된 감각의 일종이면서 더군다나 근대적 질서 체계에서 특권을 누리기도 했던 시각과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투시가 불가능한 피부의 가능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신체적 주체의 가능성 또는 피부의 가능성에 대해서라면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에서 벤야민이 한 말을 빌려올 수 있겠다. 벤야민은 인간의 모방능력에 관해 설명하면서 ‘아이들은 장사꾼과 선생님만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풍차와 기차도 연기한다’고 했다. 타자들을 대상화시키거나 추상화시키지도 않고, 그것들의 물질성을 그대로 수용하며 존재론적 닮기를 시도하는 이 아이들의 감각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하는 가능성이다. 이는 현실의 재현체계가 요구하는 상투적 인간형을 거부하고 타자들과의 접속을 통해 자신의 존재 지평을 창조적으로 넓히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끝을 모르는” 농밀한(“고요한 밤”) “살갗”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제 세계의 변화를 말할 차례다. 김행숙의 작품은 이미 존재했던 세계를 재현(representation)한다기보다 시를 통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세계를 현시(presentation)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지각의 대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작품이 당신의 감정적 전이를 차단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김행숙의 시는 새로운 시·공간을 창출하며 읽는 이의 참여를 유도시킬 뿐이다. 그리고 이때의 참여는 앞서 말한 존재방식의 변화와 연동한다.

우리는 아픔 없이 잘게 부서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섞일 수 있습니다. 만두의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별빛.//(...) 썩은 과일은 술이 됩니다. 우리는 만두가 됩니다. 끓는 물에 둥둥 떠오를 수 있습니다. 환하게 터질 수도 있습니다. -‘초대장’ 부분

김행숙 시의 매혹을 확인하기 위해 먼 길을 에둘러 돌아온 당신 앞에 다시 ‘초대장’이 놓였다. 이번에는 시인이 직접 쓴 초대장이다. 이 ‘초대장’에는 당신에게 아직 말하지 못한 어떤 것이 들어 있으므로 천천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아픔”이 없다는 말은 고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픔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말일 것이다. 현실 원칙이 제공하는 쾌락에 순응하는 한 사실 새로운 존재론적 사건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초대장에 적힌 열도(熱度, “끓는 물”)와 파열(破裂, “터질 수도”)을 보라. 존재 방식의 변화를 유도하는 김행숙의 시들이 전쟁과 관련한 수사들을 몰고 다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두꺼운 무지개’, ‘지옥훈련’, ‘얼굴의 몰락’을 포함한 <이별의 능력> 다수의 시편에서 “전우”, “전투화”, “전쟁터” 등의 시어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현실의 체계가 제공하는 욕망이 아니라 그 외의 다른 것을 욕망할 수 있다면, 얼굴의 가상적 특권을 중단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잘게 부서”져서 “잘 섞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도래하는 가능성은 앞서 우리가 확인했던 것들과는 약간 다른 면모가 있다. 왜냐하면 이때의 가능성은 “變身”의 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몇 가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전체지향적인 성격을 띤 우리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 폭력들을 빚어냈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초대장에 적힌 “우리”란 말이 돌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대여 안심하길. 지금부터 우리가 말하는 ‘우리’란 새롭게 도래하는 무엇이다. 덧붙여 시인은 비롯된 애초부터 우리와의 공명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 글의 맨처음에서 보았던 ‘폭풍 속으로’에 시인은 변신과 연동하며 도래할 우리를 이미 감추어 놓았다. 시인이 충동의 방향으로 제시했던 문장을 다시 보자. “나는 變身을 도모한다”에서 “나는”과 “變身” 사이에는 ‘우리의’라는 말 내지 ‘당신과 함께’라는 말이 감춰져 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아무래도 그랬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시인이 우리를 알려주었던 존재 방식의 변화를 떠올려보라. 그것은 타자와의 무수히 많은 접속을 필요로 하던 것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확신하게 만드는 것은 첫 시집의 첫 시이다. 그것이 이렇게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비둘기 한 마리가 발가락 사이에 부리를 넣었다 뺐다 넣었다를 시계추같이 반복한다. 그의 발가락 옆에서 ‘무제Ⅱ’라는 그의 이름을 보았다. 끄덕끄덕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잔디를 손바닥으로 쓸면서 한 여자가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느리게 움직일 때마다 풀들은 순순히 몸의 방향을 바꿨다. 그녀가 하는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조각공원’ 전문

이 시에 대해 말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이 시에는 의미 대신에 의미로 환원되기 이전의 길고 긴 리듬만이 있기 때문이다. 조각의 움직임(“비둘기 한 마리가(…)반복한다”)이 시간의 흐름(“끄덕끄덕(…) 있었다”)을 비추고 “잔디”의 움직임이 그녀의 움직임을 이끈다. 주어의 자리에 위치한 각각의 사물들이 자신의 의지를 초과하여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 듯, 서로가 서로를 “순순히” 불러들이고, 만지고, “끄덕끄덕” 긍정한다. 애초에 시인의 눈을 찌르고 들어온 매혹은 저렇게 하염없는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별 존재들 사이에서 소통과 연대를 이끄는 리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저 리듬을 위해서라면 시인은 눈 따위야 누구에게 줘버려도 상관이 없었다(“나는 두 눈을 바깥에 줘버렸단다./ 얘들아, 얘들아, 어딨니? 같이 놀자.”, 시인의 말, <사춘기>) 피동도 능동도 아닌 상태로 서로가 서로에게 “몸의 방향”을 바꾸도록 이끄는 이 힘, 개체들의 막을 진동시켜 서로를 공명하게 만드는 그 힘이 도래하는 순간을 자신의 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어디 눈뿐인가. 우리는 이미 얼굴까지도 지워버리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시인은, 저 순간이 재현의 폭력으로 휩싸인 일상이 전복되는 일종의 사건의 순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라는 명명이 진정 가능해지는 시간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시인은 당신과의 차이를 긍정하고, 당신의 모호성을 매만지면서, 당신과 함께하기를 갈망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같으면서도 다르게, 새로운 ‘우리’와 ‘너’ 그리고 ‘나’를 위해. 아니 좀더 정확히는 다른 것들과 접속을 만드는 저 ‘도’와 ‘와’와 ‘그리고’와 ‘등등’을 위해. 그리하여 시인은 마지막까지도 “나는 충분히 섞이지 않았다”며 “더 휘저어” 달라고 요청했고, “연약한 것, 갈 곳 없는 것, 사라지는 것”들과의 연대를 희망하며 “아주 길어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이별의 능력>의 마지막 시) 당신 쪽으로, 당신의 피부를 진동시키기 위해, 소리쳤던 것이다.

이제 당신의 선택만이 남았다. 당신은 어찌할 것인가. 당신을 부르는 저 세계로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그냥 지금 이대로 살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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