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발전 성과 ‘그림자 노동’에도 대가 지불해야

특별취재팀

‘기본소득’ 논의 왜 필요한가

NHN이 운영하는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지식iN은 독특한 공간이다. 플랫폼만 깔아두면 네티즌들의 소통이 지식iN을 풍부하게 한다. 질문이 올라오고 답변이 많이 달릴수록 이 공간은 활성화되고 광고수입은 올라간다. ‘재주는 네티즌이 넘고 돈은 NHN이 받는’ 격이다. 네티즌들의 소통 등을 학계에서는 ‘비물질적 노동’으로 부른다. 예전에는 노동으로 생각할 수 없었던 활동들이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셈이다.

[고용난민 시대, 일자리 없나요?]기술발전 성과 ‘그림자 노동’에도 대가 지불해야

완전고용의 시대는 저물었다. 세계대전 이후 호황기를 누리며 성장이 고용, 복지로 연결되던 유럽 역시 1970년대 이후 고실업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실업자에게 잔여적 복지를 제공하는 전통적 해법으로는 실업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맞고 있다. 고용을 늘리기 위해 추진돼온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은 고용난민을 양산할 뿐이다.

금융위기 이후 정부가 재정지출을 통해 ‘희망근로’ 일자리들을 만들었지만 꼭 필요한 일자리들이라고 하기 어렵다.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자리를 늘려 소득을 분배하려는 고용대책이 해법일 수 없음을 방증하는 사례들이다.

‘고용없는 성장’이 일반화된 요즘 소득과 일자리의 연결을 당연시해온 생각들을 바꿔야 한다는 혁신적인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그 대표주자가 ‘기본소득(Basic Income)’론이다. 연령, 취직 여부, 재산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국민 모두에게 일정한 급여를 주자는 것이 골자다.

기본소득론은 지난해 2월 한국기본소득네트워크가 출범한 뒤 진보운동과 학계에서 주목받는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기본소득은 진보진영만의 몽상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기업가들이 주창하는가 하면 일본에서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지지할 정도로 현실성을 갖춘 이론이다. 독일의 생활용 화학제품 체인업체 데엠(DM) 회장인 괴츠 베르너는 2006년부터 직접세를 폐지하고 모든 세금을 부가가치세로 단일화해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세금을 부가가치세로 단일화하면 직접세의 폐지로 생산가격이 크게 감소할 뿐 아니라 수출가격도 인하돼 수출과 고용이 늘어날 것이라는 논리다.

기본소득론자들은 ‘고용없는 성장’ 시대에 생산 자동화가 초래하는 고용감소 현상에 굳이 맞서기보다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생산력 발전에 따른 실업은 노동수요의 감소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일본 사상사가 세키 히로노는 ‘녹색평론’에 기고한 글에서 “선진국들이 자동화 기술을 100% 활용한다면 현재 노동력의 4분의 1로 모든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분석이 있다”고 말했다.

이수봉 민주노총 사무부총장은 “고용없는 성장은 뒤집어보면 인류가 이전보다 일을 적게 해도 먹고살 수 있는 역량이 쌓였다는 방증”이라며 “이 기술발전의 성과를 자본과 소수의 부자들이 독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 성과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토록 하자는 게 기본소득론의 요체다.

기본소득은 저소득층에게 세금을 퍼주자는 시혜적인 복지국가론과 궤를 달리한다. 물론 신자유주의 이후 복지마저 고용과 연계시키는 마당에 보편적 복지 틀인 기본소득은 낭만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소득을 줄 수 없다(무노동 무임금)’는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본소득론자들은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어떤 형태로든 일을 하거나, 기업의 이윤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임금노동에 대해서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야기다.

실제 현실에서는 주부의 가사노동처럼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는 ‘노동’이 많다. 주부 박모씨(61)는 “가사노동이 없으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의 존재가 병원 영리 창출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의 노동을 대가가 지불되는 ‘임금노동’과 그렇지 않은 ‘그림자노동’으로 분류했다. 그림자노동은 비생산적·비상품적이라는 이유로 임금노동에 가려져 왔다.

또 현대 경제에서는 사회적 부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산되는 흐름이 나타난다. 고객불만센터에 제품의 결함을 호소하거나 블로그에 제품 사용 후기를 올리는 행위들은 임금노동은 아니지만 자본의 이윤 창출에 기여하는 ‘비물질적 노동’이다. 독일 마부르크대 김원태 박사(과정)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임금노동 형태가 아니면서 기업의 이익에 직접 기여하는 활동이 많아진다”며 “그러나 기업은 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보통신의 발전 역시 대가가 지불되지 않던 활동이 생산에 기여하는 흐름을 가속화하고 있다. 강남훈 한신대 교수는 “네이버 지식iN 검색은 사용자들이 올린 지식이 많아질수록 좋아진다”며 “말하자면 사회적인 생산력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일들이 늘어날수록 기본소득 필요성은 커진다”고 말했다.

물론 현 단계에서 기본소득이 국내 경제상황에 도입되기는 쉽지 않다. 진보신당 장석준 연구기획실장은 “기본소득을 도입하려면 조세 시스템을 완전히 탈바꿈해야 하는 등 과제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의 한 형태인 무상급식 논의가 지방선거 등을 전후해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처럼 기본소득 논의도 구체성과 현실성이 뒷받침된다면 급물살을 탈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서울시립대 곽노완 교수는 “기본소득으로 전환하려면 복지 시스템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한 유럽에 비해 우리나라는 복지 시스템이 일천한 수준”이라며 “국민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정치적 의지가 부응한다면 예상보다 빨리 현실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 기본소득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취업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일정 수준의 생활을 보장하는 소득을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개념. 1980년대 중반 유럽에서 제기됐으며 현재 나미비아, 브라질 등 몇몇 국가에서 실험을 진행 중이거나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 서의동·권재현·김지환(경제부), 전병역(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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