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기적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

백승찬 기자

‘총알 막은 음악’ 몽상을 현실로 바꾼 기적

음악이 총알을 막았다. 시를 써서 부자가 됐다는 말만큼이나 황당하게 들리는 소리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에선 클래식 음악이 총알을 막았을뿐더러, 마약을 피하고, 가난을 이기고, 감성을 키우고, 희망을 얻게 했다.

[리뷰]다큐 ‘기적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

12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기적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를 보고 나면 베네수엘라가 미인대회의 나라, 차베스 대통령의 나라가 아니라 ‘엘 시스테마’의 나라라고 여기게 된다. ‘엘 시스테마’란 영어로 ‘시스템’이다. 이는 ‘베네수엘라 국립 청년 및 유소년 오케스트라 시스템 육성 재단’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대학에서 정치학, 경제학을 전공했고 음악에도 소양이 깊었던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8명의 동료와 함께 이 독특한 프로젝트를 출범시킨 건 1975년. 전과 5범의 소년을 비롯해 빈곤과 범죄에 물든 11명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오케스트라 연주를 가르친 것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30여년이 흘렀다. 지금 엘 시스테마는 2~16살까지 단계별로 이루어진 100여개의 청소년 오케스트라, 합창단, 성인 오케스트라, 이를 지원하는 교육센터, 악기 제작 아카데미 등을 총칭한다. 지금까지 26만여명이 엘 시스테마를 거쳐갔다. 그 중에는 미국 정상급 오케스트라인 LA필하모닉 수장이 된 구스타보 두다멜, 베를린 필하모닉 최연소 단원인 에딕손 루이즈도 있다.

<엘 시스테마>는 엘 시스테마의 오늘을 그린다. 아울러 문화의 무한한 힘,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증명한다. 영화 속 인터뷰이들의 말대로 베네수엘라는 “재수 없으면 총 맞는 동네”였다. 저녁이 돼도 아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엄마는 끔찍한 생각에 미리 몸서리쳤고, 집에 들어온 아이는 총소리가 들리면 자연스럽게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아이들에게 총이나 마약 대신 악기를 들게 하자는 것이 아브레우를 비롯한 ‘몽상가’들의 생각이었다.

아브레우는 확고한 비전, 이를 실행할 방법을 갖고 있었다. “죽으면 쉴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이 아브레우의 생각이었다. 리더의 영도력 아래 엘 시스테마는 뚜벅뚜벅 전진했다. 협상하고 타협하고 인내했다. 이들은 가장 가난한 동네를 먼저 찾았다. 그곳 아이들을 다른 곳으로 구해내는 대신, 그곳에 엘 시스테마의 터를 닦았다. 현이나 건반을 짚지 못하는 유아들은 장난감 악기를 들었다. 유아들로 구성된 악단 이름은 ‘종이 오케스트라’. 실제 연주는 하지 못해도 각자 파트를 정해 연주를 흉내냄으로써 합주의 의미, 음악의 아름다움을 알게 한다는 취지였다.

엘 시스테마는 복지 제도일 뿐 아니라 음악 교육 체계다. 이미 두다멜의 존재가 이 체계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아이들은 오디션을 거쳐 상급 오케스트라로 ‘진학’한다. 경쟁 논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엘 시스테마의 정점에 위치한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연주 장면이 영화에 나온다. 묵직한 연주를 들려줄 때는 한없이 진지하다가도, 신나는 음악일 때는 악기를 들고 무대를 춤판으로 만든다. 기쁘면 기쁘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는 클래식 연주, 체험에서 우러난 감정을 담은 음악. 이들의 연주는 서유럽 중심 기존 오케스트라의 헤게모니에 유쾌하게 균열을 낸다.

다큐멘터리로써의 형식미를 따졌을 때 <엘 시스테마>가 뛰어나다고 보기는 힘들다. 지역 주민, 단원, 아브레우 등의 인터뷰를 통해 엘 시스테마의 장점을 설명하고 간혹 연주를 들려주는 식이다. 그러나 배우의 연기력만으로 흥미진진한 극영화가 있듯, 피사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볼 만한 다큐멘터리가 있다. <엘 시스테마>는 그런 다큐멘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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