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싱크탱크’를 새로 만들자

천정환 민교협 회원·성균관대 교수

코로나19로 인한 미증유의 사태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포스트 코로나’는 높은 수준의 분석과 예측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물론 세밀한 관찰과 큰 인사이트(통찰력)가 동시에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보유한 지적 능력과 학문적 역량은 당장 세계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과 빠른 변화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모으기조차 벅차다. 말은 많지만 기실 들을 만한 이야기는 적다. ‘이제 코로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고들 하지만, 현재에 대한 분석이 부정확한데 미래에 대한 예측을 어떻게 믿을까? 그래서 어떤 언론과 사람들은 인기 있는 해외 저술가나 학자들에게 큰돈을 들여 마이크를 주지만, 이 상황은 그들에게도 ‘미증유’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번에 본 대로 코로나19는 서구 ‘선진국’들의 모순과 취약함도 여지없이 드러내버렸기에 오히려, 외국 ‘석학’이나 인기 학자의 논변이 그들의 현실에서도 관념적이고 얇은 것임을 드러내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천정환 민교협 회원·성균관대 교수

천정환 민교협 회원·성균관대 교수

코로나19 사태와 ‘포스트 코로나’ 담론의 홍수 속에서 다음의 경우들은 일단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첫째, 주관적 기대와 현실 분석을 뒤섞어 놓은 경우. 재난과 혁명을 구분하지도 못해 ‘코로나혁명’ 같은 말을 주워섬기는 철학자도 있고, 임시방편 국가자본주의적 조치를 ‘새로운 공산주의의 요청’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둘째, 구체적 현장에 근거하지 않은 거대 담론. 종교문화 전통, 국가와 개인 등에 입각한 거시적 해석은 심오하고 매력있는 듯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 셋째, 쉬운 비교. 오리엔탈리즘, 인종주의, ‘국뽕’에 기댄 담론은 선정적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쉬 끌지만, 기실 더 눈을 가리게 될 뿐이다. 넷째, 성급한 ‘뉴노멀’ 담론. 주로 관료집단이나 자본으로부터 나오는 ‘뉴노멀’ 담론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현재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쓰인다. 이런 ‘뉴노멀’은 위험하다. 임시방편과 재난적 상황을 이용하여 평범한 보통의 삶을 뒤처진 것으로 취급하고, 회복해야 할 것마저 쉬 폐기처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뉴노멀’보다 ‘회복’이 필요한 곳도 분명 많지 않은가?

미래는 의지나 바람으로부터가 아니라 객관적 현실에서 온다. 현재를 이루는 물질적 제관계와 냉엄한 주체의 조직과 힘으로부터만 미래가 만들어진다. 그러니 ‘포스트 코로나’나 ‘뉴노멀’의 실재가 장밋빛 유토피아일 리 없다. 미국, 중국, 유럽국가들의 권위와 소프트파워가 거덜나고 앵글로색슨 신자유주의가 파탄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강권과 자본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 회복력과 적응력은 어느 집단의 것보다 클 것이다.

필요한 것은 냉정한 유물론이며 집단지성이다. 개별자의 주관과 개별 학문의 한계를 돌파해야만 판타지 아닌 현실이 보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수준의 국가 싱크탱크가 필요하다. 패권의 동요로 인해 야기되는 리스크 극복의 방략을, 가치 중심의 공백과 강권의 대두를 막을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한반도 거주민의 안전과 생명을 옹호할 사회원리를, 소위 4차 산업혁명이 야기하는 인간 잉여화에 대비할 방도를, 공정과 능력주의의 허위의식을 해체해버릴 교육과 가치체계의 변화를 연구하고 언어화할 두뇌 집단이 필요하다.

정부의 고등교육과 학술 정책의 공백을 메우는 일은 이제 정말 절실하다. 몇몇 학자들이 주장한 대로 학술진흥청 같은 조직도 좋지만, 교육과 정책 기능을 함께 가져 새로운 융합 인재를 길러내는 고등인문사회과학원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한국연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학술원 등 학술진흥법상 기구의 기능을 재구조화하고 인문한국(HK), 사회과학연구지원사업(SSK)의 성과와 교훈을 제대로 계승하여 두뇌를 키우고 모아야 한다.

그것은 곧 부패한 학벌체제와 장삿속에 빠진 대학을 넘고, 586세대의 세계인식 수준을 넘는 집단지성의 새로운 육성과 제도화일 것이다. 비정상적인 사학 중심 대학체제와 재벌의 사회 지배를 생각하면 독립적이고 공공적인 제도화의 역할을 일단은 국가가 맡아야 한다. 대신 거기엔 교주(校主)의 전제와 관료의 간섭이 없고, 학과 팻말과 학벌·젠더 차별 없이 열린 연구실과 세미나실에서 자유로운 토론과 아이디어가 빚어져야 한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사이 벽은 물론 문·이과 분리도 없어야 한다. 이는 재식민화되고 있다는 한국 사회과학과 영락의 길에서 허덕이는 인문학을 살려 시민들에게 복무하기 위한 길이며, 교육과 앎으로써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 방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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