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교도소’ 자초한 사법부

고려의 5대 왕 경종은 복수법을 제정했다. 조상의 원한을 갚으려는 호족들의 청을 받아들여서다. 하나, 복수는 복수를 낳았고 복수를 빙자한 살인도 흔해졌다. 급기야 재상 왕선이 복수를 빙자해 태조의 아들이자 경종의 삼촌인 천안부원군을 살해하는 일도 발생했다. 뒤늦게 후회한 경종은 복수법을 폐지했고 이후 역사에서 같은 법이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복수법에서처럼 개인이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적으로 단죄하거나 처벌하는 것을 ‘사적 제재(私的 制裁)’라 한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사적 제재는 엄격히 금지돼 있지만 개인적 복수는 물론이고 공공의 적을 정의의 이름으로 사적 처벌하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1991년과 1992년에 연이어 일어나 1994년 성폭력특별법 제정에 영향을 미친 ‘김부남 사건’과 ‘김보은·김진관 사건’이 개인적 복수에 해당한다면 1996년 발생한 ‘안두희 처단 사건’은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살인행위였다.

이처럼 사적 제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허점이 있기 때문이다. 9세 때 자신을 성폭행한 이웃집 아저씨를 21세가 된 김부남이 살해하고, 김보은이 자신을 오랫동안 성폭행해온 의붓아버지를 남자친구 김진관과 함께 살해한 이유도 그랬다. 공소시효가 지났거나 법으론 처벌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평범한 버스기사 박기서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때려죽인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안두희는 1949년 백범 암살 직후 무기징역형을 받았지만 1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뿐만 아니라 군에 복귀해 빠르게 승진했고 전역 후에도 군납사업으로 부를 누렸다.

하지만 법이 제대로 못 해 일어난 일이라서 그랬는지 이들의 사적 제재도 법으로 큰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나는 짐승을 죽인 것이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던 김부남은 집행유예를 받았고, 김보은과 김진관도 22명에 달하는 변호인단과 여성단체의 무죄 주장 속에 비교적 낮은 형량을 받았다. 박기서도 징역 3년형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1년5개월 만에 출소했다. 또 출소 전후 사회적 후원이 잇따른 가운데 백범기념사업회에서는 그의 아내에게 일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정의의 이름으로’ 감행되는 사적 제재가 한층 진화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바로 디지털화와 집단화다. 또 제재 수단으로는 ‘신상 공개’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양육비를 미지급한 부모의 신상을 공개하는 사이트 ‘배드파더스’가 대표적이고 올 6월에는 ‘디지털교도소’도 만들어졌다. 누리집 개설자는 사촌동생이 n번방 피해자로, 도메인도 n번방에서 따왔으며 악성범죄자의 신상공개를 통해 피해자를 위로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주된 대상은 성범죄자들이라고 했다.

현재 디지털교도소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은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모씨다. 지난주 미국 소환 불허 판결이 나면서 그의 신상이 공개된 페이지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리고 있다. 재판부는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 관련 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철저하고 발본색원적 수사”를 위해 손씨의 신병 확보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서지현 검사가 불허 결정을 내린 판사를 “애국자”라고 비꼬았지만 실제 애국심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지난 10년간 서울고등법원에서 행해진 범죄인 인도심사 30건 중 단 한 건만 불허 결정이 났고, 그 한 건이 바로 2013년 야스쿠니신사 방화범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경찰이 디지털교도소 수사에 착수했다. 1999년 시작된 소라넷이 2015년 대대적인 폐지운동 속에 본격 수사가 시작되고 개설 17년 만인 이듬해 4월에야 폐쇄된 것과 비교하면 매우 발 빠른 조치다. 디지털교도소의 주요 혐의는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죄다. 배드파더스도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지만 운영자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양육비 지급을 촉구한다는 목적으로 ‘공익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재판부가 디지털교도소의 범죄자 신상 공개를 단순한 비방과 비난으로 판단할지, 성범죄자에 대한 경고와 피해자 위로로 공익성을 인정할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디지털교도소에서 가장 ‘핫한’ 장소가 손모씨가 가상수감된 방이고, 이유는 법원이 그를 풀어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리집이 폐쇄되고 운영자가 법대로 처벌된다면 손모씨와 그밖의 범죄자를 풀어준 것이 정당하다는 취지일 테고, 그 반대라면 사적 제재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전자는 다수 여론에 배치되고, 후자는 법치주의에 위반한다. 진퇴양난이겠지만 자초한 결과다. 또한 이것이 한국 사법부의 현 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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