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누군가의 일상에 도사린 위협, 폭염

김한솔 기자·영상·사진 최유진 PD

폭염

경향신문·녹색연합 공동기획

<b>가스검침원</b> 온종일 그늘이 없는 언덕을 오르내리며 일을 하는 가스검침원 박현정씨(가명).

가스검침원 온종일 그늘이 없는 언덕을 오르내리며 일을 하는 가스검침원 박현정씨(가명).

야외 노동자들 “땡볕 아래서 일하다 보면
현기증 나고, 메스껍기까지…”

소화전, 우편물 반송함, 골목 담벼락 사이의 작은 틈. 가스검침원 박현정씨(58·가명)는 곧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되면 이곳에 하얗게 얼린 500㎖ 생수 한 병을 수건에 싸 숨겨놓을 것이다. 다른 한 병은 겨드랑이에 끼울 것이다. 그렇게 검침을 다니다, 겨드랑이에 끼워둔 얼음물이 녹을 때마다 한 모금씩 아껴 마실 것이다. 그러다 물이 다 떨어지면, 처음에 숨겨놓은 물병을 찾아와 다시 겨드랑이에 끼운 채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는 지난 12년간, 매 여름을 이렇게 버텨왔다.

경향신문은 ‘기후변화의 증인들’ 마지막 회에서 폭염 속 야외 노동자들과 돈의동 쪽방 주민들을 만났다. 가스검침원, 배달기사, 건설노동자, 쪽방 주민들은 앞서 만난 해녀, 산지기, 농부, 산불 진화 인력보다 우리 일상에 조금 더 가까이, 더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이들이다. 2018년 폭염은 압도적이었다. 2019년은 2018년보다는 덜 더웠다. 2020년은 어떨까. 전 세계 기상기구들은 올해가 ‘역대 가장 더운 해’가 될 것이라는 경고를 연초부터 꾸준히 내놓고 있다. 기상청은 장마가 끝난 뒤 여름철 기온은 평년보다 0.5~1.5도 높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오늘은 인터뷰 복장 갖추려고 이 조끼를 입고 나왔는데, 이것도 더워요, 솔직히. 한여름에는 못 입어요. 이거 입고 조금만 돌면 한증막이에요.”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만난 박씨는 오른쪽 가슴에 ‘도시가스’ 마크가 찍힌 남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등 부분이 메시 소재이긴 했지만, 여름 기능성 조끼라고 할 만큼 시원해 보이진 않았다.

가스 검침·배달 같은 이동 업무
아무리 더워도 쉴 여건 안 돼
그늘 없는 골목·도로는 ‘찜통’
“얼린 생수 끼고 다니며 버텨”

가스검침원 박현정씨(가명)가 검침을 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다. 박씨는 이 계단을 ‘죽음의 계단’이라고 부른다. 최유진 PD

가스검침원 박현정씨(가명)가 검침을 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다. 박씨는 이 계단을 ‘죽음의 계단’이라고 부른다. 최유진 PD

그는 야외 노동자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집집마다 돌며 검침을 한다. 온종일 걷는 일을 하는데, 짐이 많았다. 조끼의 오른쪽 주머니부터 불룩했다. 주머니에서 작은 망원경이 나왔다. 자신의 키보다 높은 곳에 있는 계량기, 사람 없는 집의 담 밖이나 대문 틈새로 계량기 숫자를 확인할 때 필요하다고 했다. 등에 멘 초록색 배낭에는 수건, 휴지, 검침서류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 얼린 생수 두 병이 이 가방에 추가될 것이다. 그는 다른 지역에서 검침을 할 때 이 방법을 터득했다. “물이 꽝꽝 얼면 잘 안 녹잖아요? 어느날 여기다(겨드랑이) 끼웠어요. 그러니까 시원하고, 빨리 녹는 거예요. 지금은 첫 스타트부터 끼고 다녀요.” 새 옷도 한 벌 가지고 다닌다. “여기 올라갔다 내려오면 (더워서) 옷이 다 젖어요. 그래서 집에 갈 때 입을 옷을 하나 싸 갖고 와요.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나한테 냄새가 나잖아요. 다른 사람들한테 너무 미안하니까….” 일을 시작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 말을 하는 선캡 밑 그의 얼굴이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그는 스스로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박씨와 같은 작업 환경에서라면 누구라도 더울 수밖에 없다. 박씨의 검침 구역은 서대문구 홍은동 일대다. 이곳은 온통 언덕이다. 박씨는 길고 완만한 언덕을 타고 올라가 몇 집을 검침하고 내려오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또 몇 집을 검침하고 내려오는 작업을 하루 종일 반복한다.

그렇게 3일간 1670곳을 검침한다. 이 동네에는 그늘이 거의 없다. 바로 옆 산의 녹음은 짙은데, 박씨가 검침을 다니는 주택 주변에는 이상할 정도로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들다. 산이 만든 그늘은 그 바로 밑에 위치한 주택들에만 드리워졌을 뿐, 박씨가 온종일 걷는 길에는 햇빛이 아무런 방해 없이 그대로 내리꽂힌다.

<b>배달 라이더</b> 뙤약볕을 받으며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는 라이더 이병선씨.

배달 라이더 뙤약볕을 받으며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는 라이더 이병선씨.

<b>위탁배달원</b> 하루종일 짐을 들고 뛰어다니며 배달을 하는 우체국 위탁배달원 맹창영씨.

위탁배달원 하루종일 짐을 들고 뛰어다니며 배달을 하는 우체국 위탁배달원 맹창영씨.

그늘 한 점 없는 홍은동 골목에서 박씨가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서울 중구의 도로 한복판에서는 오토바이에 탄 배달의민족 라이더 이병선씨(37)가 아스팔트 열기로 숨 막혀하고 있다. “해는 내리쬐고, 아스팔트 열기는 올라오고…. 한 오후 3시쯤 되면 중간에서 햄버거가 돼요.” 그는 중학교 때부터 배달 일을 했고, 지금도 생업으로 일을 하고 있다. 보통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 배달을 한다. 도로 위에서 일을 하는 그는 여름이 특히 힘들다. 도로는 인도보다 더 덥다. “엄청 더워요. 막 햇빛 내리쬐고, 밑(아스팔트)에선 열기 올라오고, 막 정신줄이 끊어질랑 말랑하는 걸 겨우 붙잡고 다녀요. 그런 때 대형차, 버스 같은 데 뒤에 있으면 열기 때문에 머리가 휘청휘청하죠. 찜질방 안에서 땀을 막 흘리는 것하고 똑같아요. 도로 전체가 찜질방이 되니까…. 오토바이는 (자동차처럼) 실내도 아니고 밖에 있잖아요. 자동차들이 내뿜는 열기 안에 서 있는 거니까….”

두 사람은 모두 2018년 폭염을 기억하고 있다. 이씨는 “2018년에는 폭염이 워낙 심해서 휴대폰도 열이 많이 올라 충전도 안 됐다”면서 “저는 그때 그냥… 일을 많이 못했던 것 같다. 너무 더워서”라고 했다. 박씨도 2018년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 진짜 그때는, 얼음팩 있죠? 얼음팩을 등허리에 대고, 목에다 대고, 작은 팩은 목에 손수건으로 묶고 다녔어요.” 하루 최고기온(당시 기준) 33도 이상인 날이 31.4일, 온열질환(열사병, 열탈진 등)으로 48명이 사망하고, 4526명이 병원을 찾았던 해다.

이씨가 현기증을 느끼며 최대한 빠르게 배달을 마치려고 애쓰는 동안,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빌라 골목에서는 송파우체국 소속 위탁배달원 맹창영씨(55)가 자신의 배달차에서 점프하듯 뛰어내려 택배 물품을 꺼냈다. 상자당 8㎏짜리 메론 4상자를 한꺼번에 둘러멘 그가 빌라 계단을 올라갔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우산을 쓰기는커녕 우비도 입지 않고 있었다. “우비가 있긴 한데 이런 데 뛰어올라다니다 보면 비보다 땀에 더 젖어요. 땀이 나가지고 우비는 못 입어요, 차라리 비에 젖는 게 낫죠. 물건 젖을까봐 어떨 때 우산 같은 거는 써도, 우비는 안 입어요.”

택배기사 맹창영씨가 배달할 물건을 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 맹씨가 일을 시작하는 이른 아침 시간엔 아직 건물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고 있을 때도 많다. 최유진 PD

택배기사 맹창영씨가 배달할 물건을 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 맹씨가 일을 시작하는 이른 아침 시간엔 아직 건물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고 있을 때도 많다. 최유진 PD

맹씨는 15년차 우체국 택배 기사다. 우체국 물류지원단과 2년마다 위탁 계약을 맺고, 건당 수수료를 받는다. 그는 오전 5시에 출근해 자신이 맡은 그날치 택배 물량을 모두 배달할 때까지 일을 한다. 이날 차에 실린 택배는 212개였다. 노하우가 쌓일 만큼 쌓인 택배 기사인데도, 전날 오후 8시가 넘어 퇴근했다고 했다.

그는 정말 비 같은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지도를 펴서 최단 이동경로를 짜고, 차에서 내려 배달을 하기 위해 시동을 껐다 켤 때 내비게이션이 로딩되는 3~4초를 아끼기 위해 시동을 켜는 동시에 작동하는 후방 카메라를 한 대 더 달았다. 그만큼 바빴다. 그는 1건 배달에 3분 이상 쓰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배달 구역의 지리에 밝은 그가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복잡하고 좁은 골목에 차를 대고, 차에서 뛰어내려 새벽에 미리 배달 순서에 맞게 정리해 둔 물건을 집어들고, 경보를 하거나 거의 뛰어서 배달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맹씨가 초 단위로 시간을 아껴 쓰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동안, 서울 강서구 마곡동의 한 건설 현장에서는 건설노동자 이성원씨(56)의 안전모 밑으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그는 남들보다 일할 때 갖춰야 할 복장이 더 많다. 등산화보다 더 무거운 안전화, 두꺼운 등산양말, 안전모, 안전조끼, 안전벨트, 긴 팔에 긴 바지, 목을 감싸는 버프. 입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더울 복장이지만, 그는 이렇게 갖춘 채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무언가를 들고, 옮기고, 붙이며 끊임없이 몸을 움직인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이 복장에 마스크도 추가됐다. “올여름은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쓰면서 일을 해야 돼서 더 힘들어요. 마스크를 하면 더워서 땀이 나고….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야죠.”

철골구조물 햇빛 반사로 열기
건설현장도 점점 더 더워져
“모호한 폭염 대응 매뉴얼에
언제 어떻게 쉬어야 할지 애매”

<b>건설노동자</b> 폭염에 종종 현기증을 느끼곤 하는 건설노동자 이성원씨.

건설노동자 폭염에 종종 현기증을 느끼곤 하는 건설노동자 이성원씨.

건설노동자 이성원씨가 지난해 여름 휴대폰에 기록했던 작업 현장의 온도. 최유진 PD

건설노동자 이성원씨가 지난해 여름 휴대폰에 기록했던 작업 현장의 온도. 최유진 PD

건설 현장은 점점 더워지고 있다. “재래식 공법을 쓸 때는 조금 덜 더웠는데, 이제는 사람 손이 덜 가게 하려고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 나오는 철골구조물을 쓰거든요. 그게 햇볕에 반사돼서 열을 내뿜는 바람에 가면 갈수록 더 더워지고 있습니다. 무척 덥습니다.”

건물을 지어올려야 하는 현장에 따로 그늘이 있을 리 없다. 그는 밥을 먹고 30분 정도만 에어컨이 있는 현장 컨테이너에서 쉰다.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가면 다른 노동자가 옆에 있는 게 싫어요. 땀냄새 나니까. 자주 빨아입으면 냄새가 덜 나는데, 덜 빨아입는 사람은 냄새가 많이 나요. 그런데 덜 빤 사람이나 자주 빤 사람이나 땀에 옷이 절어가지고 하얀 소금기가 남아있는 건 똑같아요.”

건설노동자 이성원씨가 안전모에 마스크까지 착용한 모습. 그는 “마스크를  하면 더 덥다”고 말했다. 최유진 PD

건설노동자 이성원씨가 안전모에 마스크까지 착용한 모습. 그는 “마스크를 하면 더 덥다”고 말했다. 최유진 PD

이들의 건강은 괜찮은 것일까. 폭염으로 발생할 수 있는 건강 장해는 열사병, 열탈진, 열경련 등이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더위 속에서 일을 할 때면 숨이 차고, 현기증이 나고, 메스껍고, 식욕이 떨어진다고 했다. 검침원 박씨는 여름이면 안과를 자주 찾는다. 다래끼 때문이다. “안과에서 이물질이 많이 들어가서 그렇대요. 생각해보니까 땀이 많이 나서 계속 닦다보면 수건이 더러워지잖아요. 수건을 2개 갖고 다니면서, 젖으면 새것 꺼내서 닦았는데….”

우체국 배달원 맹씨는 없던 햇빛 알레르기가 갑자기 생겼다. “몇년 전부터 팔뚝에 오돌토돌 빨갛게 좁쌀 같은 것이 생기고, 간지럽고 그러더라고요. 하루 종일 이렇게 일하면요, 반나절만 돼도 벌써 간질간질하고, 무슨 두드러기 나는 것처럼 그래요.”

맹씨는 배달을 위해 5~10분에 한 번씩 차를 멈추고 내리고 타기를 반복했는데, 차 안과 바깥의 온도차가 매우 컸다. 차 안은 에어컨을 세게 틀어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는데, 바깥에서 짐을 들고 뛸 때면 땀이 비오듯 흘렀다. 고혈압이 있는 건설노동자 이씨는 지난해 쪼그려 앉은 자세로 한참 작업을 하고 일어서는데, 머리가 휘청였다. 혈압은 뚝 떨어지고, 맥박은 지나치게 빨리 뛰었다. “그때 의사가 죽을 수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휴대폰에 최고·최저 혈압, 맥박 수를 기록하는 앱을 깔아놓고, 조금이라도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보건실로 가 혈압과 맥박을 검사받고 있다.

이보라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 센터장. 이 센터장은 “고온의 환경에서 땀을 많이 흘리면서 장시간 쉬지 못하고 6~7일 연속 일을 하면, 만성피로가 쌓일 수 있다”며 “몸이 안 좋을 때 하루 이틀씩 작업을 중지했다 복귀가 가능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참으면서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본인도 모르게 탈수나 전해질 장해가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유진 PD

이보라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 센터장. 이 센터장은 “고온의 환경에서 땀을 많이 흘리면서 장시간 쉬지 못하고 6~7일 연속 일을 하면, 만성피로가 쌓일 수 있다”며 “몸이 안 좋을 때 하루 이틀씩 작업을 중지했다 복귀가 가능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참으면서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본인도 모르게 탈수나 전해질 장해가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유진 PD

“야외노동자는 폭염에 아주 취약하죠. 대피소나 그늘막 없이 야외에서 어쩔 수 없이 근무하셔야 하는 분들은 기저질환이 없고 나이가 젊더라도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보라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장이 말했다. “고온의 환경에서 땀을 많이 흘리면서 장시간 쉬지 못하고 6~7일 연속 일을 하면, 만성피로가 쌓일 수 있어요. 본인 몸이 안 좋을 때 하루이틀씩 작업을 중지했다 복귀가 가능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참으면서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탈수나 전해질 장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 센터장은 특히 택배 기사인 맹씨처럼 차 안과 밖의 온도 차이가 큰 경우에 대해 “온도차가 많이 나는 환경에 노출되는 것 자체가 면역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물, 그늘, 휴식.

고용노동부가 ‘열사병 예방 3대 수칙’으로 안내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걸 야외 노동자들에게 제공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사업주에게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제5조 ‘사업주 등의 의무’ 2항에 “근로자의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줄일 수 있는 쾌적한 작업환경의 조성 및 근로조건 개선”을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현장에서 매우 허술하게 작동한다. 검침원 박씨는 2018년 폭염 때 “너무 더우니 편의점에서 물이라도 사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회사에 요구했다. “그랬더니 회사에서 음료값으로 1년에 2만원을 주더라고요.”

물은 충분히 마실 수 있을까. 박씨가 일하는 곳엔 공용 화장실이 거의 없다. “저 윗동네엔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 저기 검침하는 데 4시간이 걸리는데, 그때는 진짜 물도 안 마셔요.” 그늘은 있을까. 라이더 이씨는 “가능하면 그늘로 다니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도로에 그늘이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 “사실 거의 없죠. 햇볕이 너무 뜨거우니까 반팔을 입어도 팔 토시를 하고 물 머금는 스카프 같은 거 하고 그래요.” 이씨가 멋쩍게 웃었다.

충분히 쉬고는 있을까. 검침원 박씨는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집의 검침을 마치면 떡이나 빵을 점심으로 먹으며 ‘5분’ 동안 쉰다. 아파트 검침을 할 때는 그나마 상황이 나아서 ‘10분’을 쉰다고 했다. 택배 기사 맹씨는 “점심시간에 혼자 식당 테이블 차지하고 밥 먹는 게 미안해서” 남들 점심시간이 다 끝날 무렵 잠깐 들어 가서 후딱 먹고 나와 일을 계속한다.

네 사람 중 ‘위치가 고정된 사업장’에서 일하는 이는 건설노동자인 이씨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모두 이동 노동자다. 산안법 5조의 ‘근로자’에는 검침원, 라이더, 택배 기사 같은 특수고용형태 노동자들도 포함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세부지침은 없다. 결국 물 마시는 것도, 그늘에서 쉬는 것도, 몸이 힘들 때 일을 멈추는 것도 모두 ‘알아서’ 해야 한다. 알아서는 하되, 그날치 검침은 끝내놔야 하고, 택배 물품도 모두 배달해야 하고,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배달도 해야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업주의 의무’로 규정됐던 조항은 무색해진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류현철 소장은 “결국은 적정한 강도로 일을 했을 때에도 생활임금이 유지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건설노동자 이씨의 일터에는 폭염 특보 시 대응 요령이 안내돼 있다. 하지만 안내를 봐도 헷갈리긴 마찬가지다. “예컨대 35도 이상일 땐 60세 이상은 일을 하지 말라고 써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아침에 집에서 나오는데 35도라고 폭염 경보가 발령되면 일을 하지 말라는 얘기인지, 아니면 일하다 쉬어도 일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현재 고용노동부의 안내는 ‘노동자가 작업중지를 요청할 경우’ 사업주가 즉시 조치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폭염 특보가 내려졌을 때 자동적으로 작업이 중지되는 게 아니라, 개별 노동자가 이를 요청하면 조치하라는 ‘권고’다. 이 안내에는 불가피한 경우엔 작업을 해도 되며, 이 경우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야 한다고도 돼 있다.

이씨와 같은 노동자들이 일을 하다 폭염 특보가 내려졌음을 확인한 뒤, 사업주에게 ‘지금 폭염 특보가 내려졌으니 작업을 중지할게요’라고 말하는 건 가능한 일일까. “100% 불가능하죠. 현장에서 개별 노동자는 폭염뿐 아니라 ‘사고 위험’이 있어도 작업중지나 대피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한 사업장에서 혼자 작업 안 하고 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 현장 작업 자체가 중지해야 쉴 수 있는 것이지, 개별 노동자가 폭염이라 작업 안 하겠다고 하면 옥외작업을 주로 하는 건설 일용노동자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잘리는 결과로 이어지는 거예요.”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이 말했다.

올해부터 폭염 특보의 기준은 ‘일 최고기온’에서 ‘일 최고체감온도’로 바뀌었다. 과거보다 나아진 것이긴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의 체감온도는 공식 특보가 발효되기 전 이미 33도를 훌쩍 뛰어넘는다. 류 소장은 “미국의 경우는 (노동자들이 입는) 작업복에 따라서 (체감온도를) 가산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우린 그렇게 디테일하게 기준이 설정돼 있지 않다. 그런 디테일까지 안 가더라도, 당장 체감온도가 높아졌을 경우 적당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 실장은 “건설노동자들이 예전엔 ‘동절기 실업’에 대한 문제제기를 많이 했다. 지금 현장에선 ‘동절기 실업 같은 건 10년 전 이야기이고, 지금은 폭염이 가장 문제’라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지난해 기후변화가 야외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기후변화에 따른 옥외작업자 건강보호 종합대책 마련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옥외작업자는 외부 기상에 장시간 직접 노출된다는 점에서 기후변화에 영향을 크게 받는 집단”이라며 “2011~2018년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감시체계 분석 결과 폭염일수가 온열질환 및 사망 증가와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2015년 인구센서스를 기준으로 국내 야외 노동자 수를 추정했는데, 전체 경제활동인구 2359만570명 중 10.1%, 운송을 포함할 경우 14.1%가 야외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보고서는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는 예측 불가능성이 커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근로자의 건강영향 위험도 커지고 있으므로, 옥외작업자의 건강보호를 위한 다각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창문 없는 쪽방촌 사람들,
외출 자제하란 ‘폭염 문자’ 뜨면 밖으로…

방문만 있는 집에서 산다는 건
여름을 더 공포스럽게 만들어
“1평도 안 되는 공간들 다닥다닥
코로나로 쉼터도 닫고 한숨만”

<b>쪽방 주민들</b> 다닥다닥 붙어 공기가 통할 곳 없는 쪽방.

쪽방 주민들 다닥다닥 붙어 공기가 통할 곳 없는 쪽방.

검침원 박씨, 라이더 이씨, 택배 기사 맹씨, 건설노동자 이씨가 ‘일터’에서 지쳐가고 있다면, 서울 종로구 돈의동에 사는 길상근씨(69)의 상황은 더 복잡하다. 그는 살고 있는 집이 덥다. 길씨는 3.3㎡(1평)짜리 쪽방에서 살고 있다. 그가 20만원씩 월세를 내는 방의 문을 열었다. 1평짜리 방의 네 모서리에 살림살이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까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의 방과 외부를 경계짓는 것은 그리 튼튼해 보이지 않는 방문 한 개뿐이었다. 창문도 없었다. “창문이 있어서 (공기가) 통해야 하는데, 여기는 통하는 데가 없어요.” 물건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선풍기는 한 대 있다고 했다. “얼마 안 있으면 고장날 것 같아요. 지금도 덜덜덜거려요.” 폭염에 ‘외출 자제’ 권고가 내려올 때, 그는 밖으로 나간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지는 못해요. 나갔다 들어와야 해요. 공원이나 뭐 그런 데 가죠.” 창문 없는 방에 있는 것보다는 밖이 낫기 때문이다.

최봉명 돈의동 주민협동회 간사. 최 간사는 “에너지는 유한하다. 능력있는 사람들이 에너지를 구매해 선점한다면, 취약한 사람들은 에너지 소비에서 더 소외될 것”이라며 “주거 취약계층을 위한 에너지는 저렴하게, 상황에 따라선 무상에 가깝게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재’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최유진 PD

최봉명 돈의동 주민협동회 간사. 최 간사는 “에너지는 유한하다. 능력있는 사람들이 에너지를 구매해 선점한다면, 취약한 사람들은 에너지 소비에서 더 소외될 것”이라며 “주거 취약계층을 위한 에너지는 저렴하게, 상황에 따라선 무상에 가깝게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재’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최유진 PD

돈의동 쪽방 주민들의 생활을 돕고 있는 최봉명 돈의동 주민협동회 간사는 “여긴 골목 자체가 통풍이 안 된다”며 “공기가 고여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여긴 도심 한복판에 있어요. 다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1평도 안 되는 공간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요. 개인별 냉풍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사람의 체온이 붙어 있을수록 더 뜨겁죠.” 그는 올여름이 걱정이다. “2018년, 그해에 앰뷸런스가 (동네에) 유독 많이 왔어요. 그런데 올여름은 더 두려워요. 그때는 종로구청에서 열대야에도 잠을 잘 수 있게 근처 공용공간에 무더위 쉼터라도 운영했었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대책이 없으니까요.”

그가 보기에 쪽방 주민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써야 하는’ 사람들이다. “단열재, 환기시설이 잘돼 있으면 에너지를 많이 안 써도 되잖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주거취약 계층은 노후주택에 살고 있는 데다 일반인보다 건강 상태도 좋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신체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선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요.” 하지만 이들은 선풍기도 겨우 가동하는 것이 현실이다. 과다한 에너지 소비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에너지를 가장 적게 쓰는 이들이 가장 크게 입고 있다. “에너지는 유한하잖아요. 능력 있는 사람들이 에너지를 구매해 선점한다면, 취약한 사람들은 에너지 소비에서 더 소외될 거예요. 주거 취약계층을 위한 에너지는 저렴하게, 상황에 따라선 무상에 가깝게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재’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이보라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장은 지난해 8월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거주하는 폭염 취약계층 건강실태를 조사했다. 주민센터의 추천을 받아 조사 대상자를 추렸는데, 대부분 60~80대 1인 가구였다. 조사에 응한 32가구 중 반지하가 20가구였다. 쪽방뿐 아니라 반지하, 옥탑방도 모두 폭염에 취약한 주거형태다. 32가구의 평균 실내 온도는 29.6도. 14가구의 실내 온도는 30도를 넘었다. 14가구가 에어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제 사용한다’고 답한 집은 단 1가구뿐이었다. “전기세가 걱정되고, 혼자 있기 때문에” 가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돈의동 쪽방, 면목동 취약계층의 현실은 황인창 서울연구원 부연구위원이 쓴 ‘서울시 저소득가구 에너지소비 실태와 에너지 빈곤 현황’ 보고서의 내용과 일치한다. 보고서는 “외부요인이 동일하더라도 이로 인한 에너지 비용 지출과 건강영향 등 부정적인 영향은 저소득 가구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며 “저소득 가구는 상대적으로 단열이 부족한 노후화된 주택에 거주하면서, 오래된 저효율 가전기기와 냉난방 기기를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조사결과 서울시 저소득 가구의 에어컨 보급률은 가구당 0.18대로 전체 가구 평균인 0.89대에 비해 현저히 낮았으며, 3가구 중 1가구는 온열질환 등 건강질환을 경험한 바 있었다. 보고서는 “기후변화와 기후변동성의 증가, 이로 인한 냉난방 요구량의 증가는 저소득 가구의 에너지 비용 부담을 더욱 높인다”고 지적했다.

기후변화로 뜨거워진 지구는
일상에 ‘구체적인 위협’이 돼
더위로부터 안전할 권리
보장하는 제도 고민해야 할 때

앞으로 폭염은 더 강한 강도로, 더 자주 닥칠 것이다. 28일 발간된 국내 기후변화의 최근 상황과 전망을 담은 ‘한국 기후변화 평가보고서 2020’은 한국의 폭염 일수가 현재 연간 10.1일에서 21세기 후반에는 35.5일로 3배 이상 늘어날 것이라며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게 되면 검침원 박씨는 더 뜨거워진 직사광선을 받으며 누군가의 집 가스를 검침해야 할 것이다. 라이더 이씨는 누군가가 주문한 음식을 싣고 더 뜨거워진 도로를 달리게 될 것이다. 택배 기사 맹씨는 누군가가 기다릴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더 숨막히는 골목을 뛰어다니게 될 것이고, 건설노동자 이씨는 달궈진 안전모 아래 더 자주 현기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돈의동 주민들은 더 오래, 더 자주 집 밖에 나와 앉아있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는 누군가의 일상에 이렇게 ‘구체적인 위협’이다.

이 센터장은 인터뷰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더우면 다 더운 거잖아요. 내가 나가기 싫으면 다른 사람도 나가기 싫은 거고요. 내가 나가기 싫어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으면, 누군가는 그 땡볕에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을 들고 와야 되는 거잖아요. 그럼 그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노동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죠. 다른 사람의 편의를 위해 일하는 분들에겐 적당한 휴식, 건강을 유지하며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독거노인, 쪽방에 계신 분들에겐 더 자주 찾아가서 실제 환경을 체크하고, 가능하다면 정부 차원에서 좀 더 적당한 주거시설로 이전하는 대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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