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슈퍼그리드·남북 전력 협력으로 ‘그린 데탕트’ 열릴까

주영재 기자

북한 리스크 제거가 최우선… 미·중 세력 경쟁도 걸림돌

미국과 유럽연합이 외국의 탄소집약적 상품에 탄소조정세를 부과하려는 움직임을 구체화하면서 재생에너지 확보가 지상과제가 됐다. 글로벌 기업은 기업 활동에 재생에너지만 사용하는 ‘재생에너지 100(RE 100)’을 앞다퉈 선언하고, 공급업체에도 재생에너지 사용을 압박하고 있다. 탄소중립으로의 체질 개선에 한발 앞선 국가·기업들이 헤게모니를 유지하려고 무역과 공급망 구축에서 재생에너지를 강하게 밀고 있다.

‘깨끗한 전기’를 얻기 위한 총력전이 눈앞에 온 상황에서 한국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재생에너지 100%를 지향해야 하지만 한국 내에서만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 부족한 재생에너지를 외국에서 일부 조달하는 전력망(그리드) 연계가 불가피하다. 재생에너지를 확대할 경우 기상조건이나 밤낮에 따라 출력이 달라지는 간헐성 문제도 커진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도 전력망의 지리적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 제 8·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동북아 슈퍼그리드’를 한 대안으로 제시한 까닭이다.

동북아 슈퍼그리드는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골 사이에 송전망을 구축해 극동 시베리아 및 몽골 고비사막의 청정에너지(풍력·태양광·천연가스)를 동북아 국가가 공동 사용하는 것이다. 동북아 슈퍼그리드로 주변국과 예비 전력을 공유하면 한국은 ‘에너지 섬’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재생에너지 수급 우려를 해소할 수 있다. 전력 공유를 위한 협력 과정에서 동북아 역내 긴장 완화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장점 때문에 2011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비슷한 개념의 ‘아시아 슈퍼그리드’를 제안하기도 했다.

중국 전력회사 노동자들이 2018년 5월 29일 중국 광둥성 둥관시에서 송전탑을 잇는 송전선로를 점검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중국 전력회사 노동자들이 2018년 5월 29일 중국 광둥성 둥관시에서 송전탑을 잇는 송전선로를 점검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재생에너지발 전기는 미래의 ‘석유’
탄소중립을 위해선 산업 분야와 이동 수단에서 화석연료 대신 전기를 쓰는 ‘전기화(electrification)’가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 전기는 깨끗한 에너지원에서 얻어야 한다. 미래에는 깨끗한 전기를 확보하는 일이 과거 석유 확보와 같은 중요성을 갖게 된다.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가 최근 ‘전기는 새로운 석유’라는 제목의 기사를 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로 전기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이 중요해지면서 과거 수년간 제자리걸음을 했던 동북아 슈퍼그리드나 남북 전력 협력 논의가 새롭게 탄력을 받고 있다.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는 “그간 동북아 슈퍼그리드 논의가 경제성이 확보되고 협력이 될 경우 하자는 분위기였다면, 이제는 탄소중립을 하려면 선택이 아닌 필수로 받아들여지면서 다시 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유럽의 경우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를 그리드로 대응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 안에서는 간헐성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지만, 유럽 정도의 크기라면 한군데에서 문제가 있어도 다른 데서 송출하거나, 전력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으면 구매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동북아 슈퍼그리드가 재생에너지 간헐성 문제에서 일종의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진수 교수는 “한·중 전력 연결은 미국을 신경쓸 수밖에 없고,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이라 에너지 측면만 놓고 볼 때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정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탄소중립 2050을 목표로 한다면 준비는 지금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분석에 따르면 2025년 시점에서 원자력의 균등화 발전단가(중간값 기준 ㎿h당 69달러·설치비, 연료비, 운영·폐쇄 비용 등 발전 전과정에 걸친 비용을 발전량으로 나눠 계산)는 수명 연장을 통한 장기 운영을 제외하면 태양광(56달러)·육상 풍력(50달러)과 비슷하거나 높은 것으로 나온다. 각국에서 재생에너지가 가장 저렴한 에너지원이 되고 있는데, 한국과 일본에선 여전히 재생에너지 가격이 높다. 동북아 슈퍼그리드가 있다면 재생에너지 가격도 크게 낮출 수 있다. 김 교수는 “몽골의 재생에너지 발전가격은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의 반도 안 되는 수준이다”면서 “고비사막은 일조량과 풍량이 좋아 대규모 단지를 만들 수 있어 우리나라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재생에너지 발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력망 구축과 스마트 그리드 기술이 앞선 한국이 투자할 만하다.

변수는 지정학적 요인이다. 동북아에는 러시아와 몽골이라는 거대한 에너지 생산국과 한·중·일이라는 3대 에너지 수입국이 있어 전력망을 연계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다. 하지만 그간 역내 정치적 갈등과 자원 민족주의 탓에 그리드 연결은 타당성 검토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북한 리스크’ 역시 상존하면서 북한을 통과해야 하는 러시아의 천연가스(PNG) 파이프라인이나 중국과의 전력망 연계 사업의 성사가 어려웠다. 이런 난점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여의치 않을 경우 동북아 그리드 연결은 북한을 거치지 않아도 가능하다. 한중 간에 해저 전력 케이블을 연결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중 간의 세력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중국과의 전력망 연결도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2015년 ‘글로벌 에너지 연계’라는 전력판 일대일로 사업을 발표했다. 2050년까지 50조달러를 투입해 북극의 바람과 적도의 태양자원을 통합 연계하는 사업이다. 중국은 이를 위해 세계 각지에 해저 전력 케이블을 깔고 있다. 미국 입장에선 전력 인프라로 개도국을 중국 영향력에 넣으려는 것도 문제이지만 해저 케이블은 잠수함 탐지 기능을 동시에 하기 때문에 더 껄끄럽다. 김연규 한양대 국제학부 교수는 “전체 전력의 일부분, 약 5% 정도를 연계해 수도권의 전력 과밀을 해소하면 전력망의 유연성을 확대하는 의미가 있지만 중국의 일대일로가 연상되면서 현 단계에서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전력망이 디지털화하면서 트럼프 행정부 이후 미국은 전력망이 가스관보다 훨씬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면서 “한중 사이에 전력을 해저 케이블로 연결하는 사업을 미국이 민감하게 보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의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일본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동북아 슈퍼그리드 현실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동북아 슈퍼그리드·남북 전력 협력으로 ‘그린 데탕트’ 열릴까

동북아 슈퍼그리드·남북 전력 협력으로 ‘그린 데탕트’ 열릴까

재생에너지로 남북 ‘그린 데탕트’ 가능성
동북아 슈퍼그리드는 탄소중립위원회가 지난 6월 23일부터 심의에 들어간 ‘2050 탄소 중립 시나리오’에도 포함됐다. 9차 전력기본계획에 나온 대로 중국(2.4GW)과 러시아(3GW)에서 전기를 끌어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체 발전 설비 용량(119.1GW)의 4.5% 수준이다. 최근에는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북한과 전력 협력에 나서야 한다는 논의도 나온다. 풍력과 태양광 자원이 남한보다 풍부한 북한과의 협력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다. 하지만 이는 유엔의 대북제재 해제를 전제로 한다. 신정수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대북제재 해제의 핵심적인 결정을 하는 미국의 의지가 중요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도 변수가 될 수 있어 복잡하고 갈 길이 멀다”면서 “물꼬가 확 트일 것이라는 기대보다 중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긴 호흡으로 대북 문제, 한·미·일 공조 전략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장기적으로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남북 전력 협력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다. 남북 간에 재생에너지 협력을 토대로 ‘그린 데탕트’가 열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김광길 통일부 교류협력정책관은 “기후변화는 인류가 맞닥뜨린 가장 큰 위기라 앞으로 남북 협력이 진행된다면 이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이 한 방향성이 될 수 있다”면서 “구체적인 아이템은 없지만 과거부터 해온 남북 간 산림협력을 넘어 그 이상의 협력을 할 가능성도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정책관은 “모든 협력 사업은 남북·북미 대화의 진전을 전제로 하지만 인류가 당면한 기후변화나 환경파괴에 대응한다는 당위적 측면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데 국제사회가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연규 교수는 “최근 성김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방한했을 때 금강산 관광을 포함해 에너지 협력 사업을 북한과 할 수 있도록 미국의 의사를 물어봤을 수 있다”면서 물밑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을 제기했다.

‘북한 리스크’ 제거 선행해야

신 연구위원은 남북 에너지 협력이 장기 지속하려면 민간의 참여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북한 리스크’ 제거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연구위원은 “북한은 유효한 구매력이 없어 북한에 발전시설을 투자할 경우 희토류 등 자원을 받는 식으로 투자금을 회수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런 방식으로 경제성을 확보하면 민간 참여를 어느 정도 유입할 수 있지만 지속가능하려면 사업 안정성에 영향을 주는 북한 리스크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신 연구위원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라인이 북을 거쳐갈 때 북한에 사용료를 가스로 지급하거나, 북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사업에 참여시키면 북한이 함부로 행동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고 봤다.

북한은 대북제재로 전략물자 반입이 금지돼 철강을 수입할 수 없다. 보일러도 못 들어가는 상황이다. 태양광 셀이나 전선도 마찬가지다. 김윤성 녹색에너지전략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그래서 우선 대규모 협력보다 인도적 협력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김 연구원은 “북한은 전력 보급이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 국가보다 열악한 상황”이라면서 “모성 보건과 어린이 교육 등 인도적 협력 차원에서 마을이나 병원, 학교에 소규모 재생에너지 시설을 설치할 경우 군사 전용 우려가 없고, 서로 간의 신뢰를 쌓아 더 큰 규모의 협력을 이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파리기후변화협약에 재가입했고, 기후변화와 탄소중립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겠다고 한 만큼 에너지 빈국 문제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기후변화 대응에 모든 국가가 동참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전향적 변화를 기대할 만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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