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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쓰고 귀농⑥

아내의 고향인 강원 철원에 갔더니, 할아버님께서 햅쌀과 묵은쌀 몇 포대를 가져가라 하셨다. 장조부님은 평생 해온 벼농사를 그만두고, 인근 마을 사는 사촌에게 그 논을 빌려주셨다. 추수 때마다 임대료로 받은 쌀 포대들이 집 지하실에 가득 쌓인다. 장인, 장모와 처삼촌 등 자식 세대들은 아무도 농사를 짓지 않는다. “농사지어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잘 아니까….” 아내가 말했다. ‘기자 그만두고 그 땅을 좀 부쳐볼까’ 찔러봤더니 “그 논은 눈독도 들이지 마, 농사 아무나 짓나” 하는 핀잔만 돌아왔다.

귀농하자고 몇 년 전부터 설득하고 있지만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귀농해서 농사를 짓는 건 어떨까요?” 농촌 취재를 하며 만난 농부님들조차 고개를 젓는다. “농사짓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책임지고 선뜻 오라고 말은 못하겠다.” 수확철인데도 요즘 농촌 분위기가 녹록하지 않단다. 기후변화로 병충해는 극성이고, 코로나19로 외국인 노동자 구하는 일도 난망하다. ‘뉴노멀 시대’ 농촌에 던져진 새로운 고민거리다. 추수가 한창이었던 지난달 21일 전북 익산에서 벼농사를 짓는 농부를 만났다.


전북 익산에서 벼농사를 짓는 김영재 농부가 지난달 21일 자신의 논에서 벼 포기를 손에 쥐고 상태를 살피고 있다. 전북지역 들녘에는 벼 이삭이 잿빛으로 변하는 이삭도열병이 번졌다. 8월 중순 이후 계속된 비가 원인이다. | 채용민 PD

전북 익산에서 벼농사를 짓는 김영재 농부가 지난달 21일 자신의 논에서 벼 포기를 손에 쥐고 상태를 살피고 있다. 전북지역 들녘에는 벼 이삭이 잿빛으로 변하는 이삭도열병이 번졌다. 8월 중순 이후 계속된 비가 원인이다. | 채용민 PD

익산 삼기면은 전국 최대의 곡창지대 호남평야가 펼쳐진 곳이다. 김영재 농부는 아버지를 이어 1989년부터 벼농사를 지었다. 빌리고, 구입하면서 늘린 논이 어느새 10만평이다. 2005년부터는 논에 우렁이를 뿌려 풀을 잡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친환경 농사를 시작했고, 일부 들녘에서만 관행농을 한다고 했다. 가을걷이 막바지 절기인 상강(10월23일)이 코앞인데 아직 베지 못한 벼들이 많았다.

“비가 계속 와서 아직까지 추수를 못했어요. 비가 오면 콤바인에 벼가 걸리거든.”

가을비가 지루하게 계속되다 오랜만에 볕이 난 이날 곳곳에서 ‘덜덜덜’ 소리가 들렸다. “날이 화창해서 들판마다 트랙터와 콤바인들이 정신없이 다니는 거예요. 지금 벼를 수확해야 그 자리에 보리나 밀을 심을 수 있거든….”

보리와 밀은 벼와 달리 마른 땅에 심어야 한단다. 벼를 수확한 후 논을 다시 갈고 보리와 밀 씨앗을 심는다. “아무리 늦어도 10월 말, 11월 초까지는 파종을 마쳐야 해요.”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기 전에 보리와 밀의 싹이 자라고 대여섯 개 정도 잎이 나야 얼어 죽지 않고 겨울을 난다. 오래간만에 화창했던 가을날, 호남평야의 논은 정신없이 바빴다.

이재덕 기자가 1200평 논 일부 구간을 콤바인으로 베고 있다. | 채용민 PD

이재덕 기자가 1200평 논 일부 구간을 콤바인으로 베고 있다. | 채용민 PD

■쭉정이만 남은 벼

김영재 농부를 따라 논으로 나갔다. 잿빛으로 변한 벼 이삭들을 뽑았다. 이삭을 만져보니 속이 빈 쭉정이다. 벼의 잎과 이삭에 많이 발생하는 곰팡이의 일종인 ‘도열병’이다. 벼 피해가 가장 큰 병충해다. 이웃의 논은 아예 전체 면적의 3분의 2가 잿빛이었다. 벼 잎에 검은 반점이 생기는 깨씨무늬병이 든 벼들도 있었다. “조상님들이 ‘처서 때 비 오면 곳간이 빈다’고 했거든요. 올해 처서(8월23일)에 비가 왔어요. 근데 그날만 온 게 아니거든. 벼 이삭이 나오는 기간인 8월 출수기 동안 계속 비가 내렸어요. 온도도 적당하고 습도도 높다 보니 벼 이삭에 도열병이 온 거죠.” 특히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관행농들의 피해가 컸다. 질소 비료를 많이 투입하면 생산량을 늘릴 수는 있지만 도열병 등 병충해엔 취약해진다. 농약을 뿌려 병을 막을 수 있지만, 올해는 잦은 비 때문에 농약이 씻겨 내려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김영재 농부와 이재덕 기자가 도열병이 든 벼 이삭을 살펴보고 있다. 잿빛이 된 왼쪽 벼 이삭이 도열병이 온 이삭이다. | 최유진 PD

김영재 농부와 이재덕 기자가 도열병이 든 벼 이삭을 살펴보고 있다. 잿빛이 된 왼쪽 벼 이삭이 도열병이 온 이삭이다. | 최유진 PD

도열병이 든 벼 이삭 | 최유진 PD

도열병이 든 벼 이삭 | 최유진 PD

벼는 품종마다 모내기 시기나 출수기 등이 조금씩 다르다. 전북에서는 ‘신동진’ 품종을 주로 짓는다.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에서 1999년 남부지역에 맞게 개량한 쌀이다. “ ‘신동진’은 알이 크고 미질, 그러니까 밥맛이 좋아요. 경기도 쌀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우리한텐 고마운 품종이죠. 그런데 다른 벼보다 조금 늦은 6월10일쯤 모내기를 하거든요. 길어진 가을장마가 ‘신동진’의 이삭이 올라오는 시기와 딱 겹치면서 피해가 컸어요.” ‘신동진’ 벼는 전체 전북지역 논의 64%를 차지한다. 한 품종이 50% 이상을 점유한 곳은 전북뿐이다. 시·군 단위 지자체마다 정부가 수매하는 공공비축미 품종을 연간 한두 종씩 선정하는데, 전북은 모든 지역에서 ‘신동진’을 공공비축미로 선정하면서 재배가 늘어났다. 아예 ‘신동진’ 한 품종만 선정한 지역도 있다.

유전적으로 동일 품종만 재배할 경우 병충해 변종이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 1978년 당시 정부가 보급한 통일계 품종 ‘래경’에서 도열병 변종이 발생하면서 전국의 많은 농가가 그해 농사를 포기하는 일도 있었다. 전북도와 전북도농업기술원 등에 따르면, 올해 전체 도내 논 면적의 43%인 4만9303㏊에서 이삭도열병, 깨씨무늬병 등 병충해가 발생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원들은 지난달 8일 호남평야를 ‘재해지역’으로 선포하라며 일부 논벼를 갈아엎었다. 이들은 “(수확하는) 콤바인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갈아엎는) 트랙터가 들어가게 됐다”며 “눈물겨운 농촌의 현실”이라고 외쳤다. 김영재 농부가 도열병에 걸린 이삭들을 매만지며 말했다. “한 해 열심히 지은 농사의 결실이 이렇게 돼버린다고 하면 어떻겠어요? 마음이 정말 타들어가죠.”

이재덕 기자(왼쪽)와 김영재 농부가 도열병이 온 논을 살펴보고 있다. | 최유진 PD

이재덕 기자(왼쪽)와 김영재 농부가 도열병이 온 논을 살펴보고 있다. | 최유진 PD

극단적인 날씨 변화는 매해 반복된다. 역대 가장 길었던 장마 기간이 이어진 2020년은 전국 농촌의 흉작 피해도 컸다. “2020년엔 재해란 재해는 다 왔었잖아요. 봄에는 냉해, 여름엔 50일 넘게 장마에 태풍까지 지나갔지.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농사짓기 시작한 이래 최악의 흉작이었어요. 인간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지난해 전국 쌀 생산량은 평년보다 30여만t 적은 351만t으로 집계됐다. 1968년 이후 52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였다. 통일벼 보급 전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보리 이삭들도 4월 냉해로 쭉정이가 됐다. “농사가 갈수록 힘들어요. 하늘이 반절 농사를 지어준다고 하는데, 이제는 하늘을 전혀 믿을 수 없게 됐으니까.”

김영재 농부가 자신의 논에서 이재덕 기자와 함께 새참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채용민 PD

김영재 농부가 자신의 논에서 이재덕 기자와 함께 새참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채용민 PD

■볏짚을 뿌리고 포기하는 것

삼기면 평야를 찾은 이날, 김영재 농부는 1200평 논벼를 수확했다.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 뒤로 볏짚들이 잘게 잘려 논바닥에 흩뿌려졌다. “볏짚을 논에 뿌려야 땅에 미생물이 살고 땅심이 좋아지거든요. 친환경 유기농 재배의 기본이에요.”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농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농사를 짓지 않는다. 논에는 화학비료를 뿌리고, 논에서 나온 볏짚은 한데 모아 축산 농가에 조사료로 판매한다. 수확을 끝낸 논 위, 마시멜로 모양으로 말려 있는 흰색 둥근 기둥. 축산 농가에 팔기 위한 볏짚 뭉치인 ‘곤포 사일리지(Bale Silage)’다. 사일리지 1개에 5만~6만원이다. 1200평 논에서 10개가 나오니까 볏짚을 모두 땅에 뿌린 김영재 농부는 이날만 50만~60만원의 추가 수입을 포기한 셈이다. “땅을 좋게 만든다는데 그 정도는 전혀 아깝지 않아요. 화학비료 사다 뿌리고, 나중에 병충해 와서 손해 보는 것 생각하면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재덕 기자가 콤바인이 베지 못한 벼들을 낫으로 잘라내고 있다. | 채용민 PD

이재덕 기자가 콤바인이 베지 못한 벼들을 낫으로 잘라내고 있다. | 채용민 PD

일손을 보태려고 콤바인이 베지 못한 가장자리 벼들을 낫으로 잘라냈다. 벼들이 잘리지 않고 뜯어졌다. ‘낫이 잘 안 드네….’ 혼잣말을 하는데 한 바퀴 돌고 온 농부가 콤바인을 세우더니 쓱쓱 낫을 당겨 시범을 보였다. “어렵고 위험한 구간은 내가 콤바인으로 다 베었는데, 남은 구간 직접 몰아보지 않을래요?” 김영재 농부가 콤바인 작동법을 알려줬다. 천천히 레버를 밀어 콤바인을 움직였다. 자동차 운전 6년차가 되도록 여전히 ‘초보운전’ 딱지를 붙이고 다녀서 그런지 콤바인 운전 역시 쉽지 않았다. 한 번에 벼 5줄을 베는 5조식 콤바인으로, 겨우 2~3줄씩 베다보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콤바인 앞 날(디바이더)이 땅에 처박히지만 않도록 하면 돼요. 땅에 박히면 부러져서 갈아야 하거든.” 함께 농사짓는 둘째 아들은 농사일을 시작한 지 1년 뒤에서야 콤바인을 만졌단다.

“이건 얼마나 하죠?” 그가 답했다. “1억2000만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지비도 장난 아니지. 자동차 비용 정도라고 생각하면 어림도 없어요. 차 몇 대 부리는 값을 콤바인 하나에 투자해야 유지가 돼요.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아침에 정비하고 기름칠도 꼭 해서 논에 나오죠.”

이재덕 기자가 콤바인을 몰고 있다. 한 번에 벼 5줄을 베는 5조식 콤바인이다.

이재덕 기자가 콤바인을 몰고 있다. 한 번에 벼 5줄을 베는 5조식 콤바인이다.

트랙터, 이양기, 건조기, 지게차, 포클레인…. 그가 가진 농자재 가격만 십수억원에 이른다. “결정적으로 땅이 있어야지. 여기 1200평 논 한 필지가 평당 10만원대예요. 우리는 여기를 빌려서 농사를 짓는데 80㎏ 백미 10가마를 임차비로 내거든. 여기서 나오는 벼의 40% 정도를 땅주인에게 주는 거죠.” 1990년대 초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고 정부가 농촌의 경쟁력을 키우겠다며 ‘규모화’를 지원하면서 대농들이 늘어났다. 어르신들이 농사를 포기하면, 대농들은 빚을 내어 논을 사거나 빌려서 농사의 규모를 늘려갔다. 덕분에 매출이 ‘억대’에 이르는 농부가 됐지만, 그만큼 빚도 ‘억대’다.

통계청에 따르면 10a(아르)당 논벼 생산비는 2000년 52만5945원에서 2018년 76만8888원으로 46% 늘었지만, 같은 기간 산지 쌀(백미 80㎏ 기준) 연평균 가격은 14만~17만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2010년과 2017년에는 13만원대로 폭락하기도 했다. “농사를 지어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돼야 하는데 농산물 가격이 너무 형편없어요. 그게 제일 힘들죠.” 농사 규모는 크고 소득은 낮으니, 농가들은 질소 비료와 농약, 다수확 단일 품종을 사용해 산출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소득을 높이려 한다. 여기에 ‘이상기후’가 맞물리면서 올해 전북지역의 병충해 피해가 커졌다.

김영재 농부가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자신의 논에 앉아 있다. | 채용민 PD

김영재 농부가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자신의 논에 앉아 있다. | 채용민 PD

■녹색혁명 대신 순환 농업

“예전에는 다들 배고팠으니까 생산량을 늘려서 굶주림을 해결하는 ‘녹색혁명’이 필요했죠. 하지만 이제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해요. 소와 돼지 키우는 축산 농가와 벼·보리 재배하는 경종 농가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각자 규모화하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축산 배설물이 작물을 키우는 비료로 사용되지 못하고 폐기물로 버려져요. 대신 농사에는 질소 비료, 농약, 제초제 등을 과다하게 사용하게 됐죠. 이런 방식이 기후위기를 맞아 새로운 문제들을 낳고 있거든요.”

김영재 농부는 벼농사 규모는 줄이고, 가축으로 기르는 소를 조금씩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올해는 다섯 마리를 들였다. 축분을 퇴비로 만들어 논에 뿌리는 순환 농업을 하려는 것이다. 쌀을 건조하고 보관하는 창고에는 소달구지를 가져다 놓았다. “달구지에 손주들과 동네 아이들을 태워 동네를 한 바퀴 돌면 아이들이 좋아하겠지요? 농사가 진입장벽이 높아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농촌은 사람 냄새 맡으면서 살 수 있는 곳이에요. 경제적으로는 처질랑가 몰라도… 그게 농부들만의 특권 아니겠어요? 굳이 귀농한다면 제가 여건은 한번 만들어볼게요.”

'사표 쓰고 귀농 시즌1 (①~⑤편)' 바로가기


글 이재덕 기자, 사진·영상 최유진·채용민·유명종 PD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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