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 잔치는 끝났다(1)

한때는 “가즈아~”…폐허로 남은 ‘코인 투자방’ 일대

서울 강남구 역삼동 A 건물에 들어왔던 코인 업체가 떠난 자리. 간판을 뗀 흔적이 남아있다. 백준서 PD.

서울 강남구 역삼동 A 건물에 들어왔던 코인 업체가 떠난 자리. 간판을 뗀 흔적이 남아있다. 백준서 PD.

‘코인 붐’이 일었던 2018년 이후 3~4년간 서울 강남 한복판에 높게 솟은 건물과 빼곡히 들어선 임대 사무실 일대는 불야성을 이뤘다. 신기술, 혁신과 디지털 생태계, 미래의 금융, 경제모델 전환, 일자리 창출, 투명성과 신뢰성 등 가상자산을 수식하는 말의 풍요 속에 자본과 사람이 몰렸다. “정부가 제대로 된 시장을 만들어 왕성한 거래를 지원해야 한다.” “변화의 속도가 빠른 시대에 문제가 없다면 일단 허용하고 문제가 있다면 사후규제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 제도권에서도 ‘코인의 희망’을 부추기는 말이 쏟아졌다.

지난해부터 불어닥친 코인 시장 한파로 분위기는 급냉했다. 코인의 연관어도 규제 사각지대, 유출, 급격한 변동, 투기, 조작, 취약한 보안, 돈세탁, 마약 등 부정적인 것 일색이다. 반환경적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코인의 인기를 상징하며 한때 유행했던 “가즈아~”는 조롱과 자조의 말로 변했다.

지난달 29일 강남에서 벌어진 납치·살인 사건의 배경도 코인이었다.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다단계, MM(마켓 메이킹·시세조작), 자전거래, 감금과 사기, 고소·고발로 얼룩진 코인판에서 한 몫을 챙기려 달려든 이들이었다.

지도상 표시된 업체와 실제 남아있는 업체 위치를 나타낸 지도 그래픽. 양다영·백준서 PD

지도상 표시된 업체와 실제 남아있는 업체 위치를 나타낸 지도 그래픽. 양다영·백준서 PD

서울 강남구 ‘빌딩 숲’ 속 곳곳에 입주했던 코인 투자 업체들은 하나둘 종적을 감췄다. 경향신문은 지난 12일부터 일주일간 네이버 지도·카카오맵 등 민간 지도 플랫폼에서 ‘코인 투자’ ‘암호화폐’ 등 키워드로 검색되는 강남구 일대 코인 투자 업체 37곳을 직접 찾았다. 이 중 25곳은 폐업하거나 행적이 불분명한 상태였다. 5곳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고, 여전히 강남에서 영업 중인 곳은 7곳에 그쳤다.

이들 37곳 업체는 코인을 직접 개발하는 곳, 코인 투자 컨설팅을 하는 곳, 코인 거래소 상장을 돕는 곳 등으로 다양했다. 등록해둔 업종도 ‘솔루션 개발’ ‘정보통신’ ‘광고대행’ ‘소프트웨어 개발’ ‘자산관리’ 등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약속한 것은 동일했다. “코인으로 돈 벌게 해드립니다.”

“3년 뒤 세 배”···건물주·관리인 가리지 않고 보이는대로 투자 권유

지난 17일, 청담동 14차선 영동대로 도로변의 11층짜리 건물. 지도 플랫폼에 두 개의 코인업체가 등록된 곳이다. 그러나 현장에선 두 곳 모두 찾을 수 없었다. 지하 1층 주차장에서 만난 주차관리인 A씨에게 ‘OO업체를 아냐’고 묻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긴 좀……. 2년 전쯤 이사 갔어요. 그 뒤에 사람들이 여기를 계속 찾아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연락이 안 되니까 여기로 와서 물어보고. 그런데 우리라고 아나.”

A씨는 이 업체가 떠난 자리에 곧바로 다른 코인 투자방이 들어왔다가 1년여 뒤 나갔다고 했다. “삼삼오오 강의 들으러 와. 친구도 데려오고, 부모까지 데려오고. 그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자기가 다 사장이래요. 저한테도 투자하라 했는데 내용이 너무 황당했어. 베트남에 있는 카지노와 관련된 코인이고, 1만불 투자하면 3년 뒤에는 무조건 수익이 세 배라면서.” A씨가 투자를 권유받은 코인을 포털사이트에 검색하자 사기 피해를 호소하는 게시글이 수십 건 나왔다.

알려지지 않은 코인임에도 돈을 벌 수 있는 건 ‘다단계’에서 나오는 수수료 때문이다. 사람을 데려와 투자를 유치하면 성과금 형태의 수수료를 지급하는 사업 모델이다. 코인 다단계에 빠진 이들은 가족, 친구, 이웃은 물론 투자방이 입주한 건물주나 건물 관리인에게까지 “어마어마한 이익을 봤다”며 꼬드겼다. 주로 돈과 시간의 여유가 있고, 설득이 쉬운 노인들이 사무실에 많이 오갔다고 한다.

지난 12일 만난 건물주 박순기씨도 입주 회사 직원으로부터 “사놓으면 돈 될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자체 개발한 코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씨는 투자하지 않았다. 2년 전 ‘음원 스트리밍 사업’을 하겠다며 들어왔는데 갑자기 업종을 코인 개발로 바꾼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 회사는 월세를 몇 달 치 밀려 보증금 1억원 중 5000만원만 받고 지난해 12월 사무실을 뺐다. “간판도 안 떼어갔거든. 뒤에 들어온 회사에 권리금 300만원도 덜 받았는데 소식도 없고.” 박씨가 말했다.

역삼동 건물 경비사무소에서 만난 직원 B씨는 코인 다단계 ‘레퍼토리’를 훤히 꿰고 있었다. “사기꾼들이 얼마 준다는 둥, 몇 건 더 하면 얼마를 더 벌 수 있다는 둥 떠들더만. 우리한테도 하라 하고. 한 달에서 석 달이면 사기 치고 빨리 도망쳐요. 아니 그렇게 많이 벌면 지들이 다 해 X먹겠지, 안 그래요?”

본지가 찾아간 사무실들은 대부분 비어있거나 다른 업체가 들어온 상태였다. 층별 안내판에 업체명이 사라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아직 남아 과거의 흔적을 유지하고 있는 곳들도 있었다.

‘혁신’도 이들이 사업을 홍보할 때 쓰는 공통의 키워드였다. 몇몇 업체들은 홈페이지에서 ‘IT(정보통신기술)’ ‘인공지능’ ‘블록체인’ 등의 키워드로 사업을 포장했다. 생소한 영어 단어가 잔뜩 나열된 문구도 빈번하게 보인다. ‘○○○○스테이션 브랜드를 통해 바이낸스, ○○○○체인 등에서 검증인, 애플리케이션 서비스를 제공 중’ ‘블록체인으로 결합된 분산된 Hash 테이블을 사용해 새로운 수익원을 제공’ 등이 대표적이다.

왜 ‘강남’이었나

가상화폐 투자회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강남 테헤란로의 20일 모습. 권도현 기자

가상화폐 투자회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강남 테헤란로의 20일 모습. 권도현 기자

코인 투자방은 왜 강남에 난립했을까. 지난 14일 역삼동의 한 부동산에서 만난 중개업자 C씨는 “교통수단과 사람, 돈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국의 고속버스가 오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지하철 2호선과 분당선이 지나는 강남역 등이 있을 뿐더러 대형 상업시설과 사무실도 즐비해 사람이 모이기 쉽다는 것이다.

인근에 유명 IT 대기업이나 금융기업이 있는 점도 코인업체가 몰려든 배경으로 꼽힌다. 건물에 온 투자자들은 1층 안내판에서 대기업과 나란히 붙은 업체명을 보고 번듯한 기업이라고 생각해 쉽게 투자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폐업한 코인 투자 컨설팅 업체가 있던 대치동 30층 건물에는 카카오 계열사와 하나은행, 신한벤처투자 등 금융대기업이 입주해 있었다. 코인 투자방 두 곳이 사라진 청담동 건물 역시 ‘국내 5대 가상자산 거래소’ 중 한 곳이 있던 곳이다. 초기 자본이 적은 영세 코인 사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호(소규모 사무공간)·공유 사무실이 강남에 많은 점도 배경으로 거론된다.

중개업자 D씨는 역삼동을 “다단계의 성지”라고 했다. 선릉역 인근에는 입주 업체 약 60%가 ‘다단계’인 건물도 있다고 했다. D씨는 통신·사모펀드 분야에 빈번했던 다단계가 코인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업체들이 컴퓨터 좀 하는 개발자를 내세워 코인 개발을 시작했어요. 누구는 무슨 어디 게임업체랑 협업했네, 뭐 누구랑 했네. 잔뜩 만들기만 하면 뭐해요. 팔아야 할 거 아니에요. 판매처가 없으니까 결국에는 다단계 형식에 눈을 돌리게 되는 거죠.”

D씨는 3~4개월 단위로 연장하는 단기계약 매물이 많다는 점도 코인 다단계 업체가 몰린 요인으로 꼽았다. D씨가 근무하는 부동산에도 ‘78.1㎡(약 26평), 실면적 39.4㎡(약 13평), 예치금 100만원, 임대료 220만원’의 단기임대 매물 안내장이 붙어 있었다. D씨는 “단기로 계약한 사무실에서 투자자를 모은 다음에 그걸로 보증금을 마련해 큰 사무실로 옮겨가는 경우가 있다”며 “투자자가 안 모이면 계약 기간 3~4개월 안에 접는 것”이라고 했다.

“사무실 어디 갔어요?”···잠적 뒤, 건물에 남은 건

코인 투자방 잠적 후 강남 일대 건물에는 사기 피해자들의 다급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를 생생히 목격한 이들이 경비원, 청소원 등 건물 관리인들이다. “이 사무실 어디 갔어요?”라고 따져묻는 이들, 울며불며 ‘돈 찾아달라’ 사정하는 이들, 납빛을 띤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수차례 엘리베이터만 오르내리는 이들을 지켜보자니 건물 관리인들도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다고 했다.

지난 14일 신사동의 한 건물에서 만난 방모씨(62)도 이런 경우에 해당했다. “어르신들이 줄줄이 와서 울기도 하고, 한탄하기도 하고. 자포자기인 분도 계시고.” 4년 전쯤, 한 코인 투자 업체가 나간 후 몇 달간 피해자들이 건물로 몰려들어 이 업체를 찾았다. 피해자들은 건물주 수행비서이자 건물을 관리하는 방씨에게 “무슨 이런 회사가 있냐”며 하소연했다고 한다. 어떤 피해자는 건물 주차장에서 텅 빈 사무실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다른 건물 관리인 E씨는 “사기당했다며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은 뜸한데 예전에 수시로 왔다”며 “경찰이 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A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 ‘다단계 업종 입주 제한’ 문구가 붙어있다. 양다영 PD.

서울 강남구 역삼동 A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 ‘다단계 업종 입주 제한’ 문구가 붙어있다. 양다영 PD.

사기 피해자들이 몰려들어 건물 관리에 지장이 생기자 건물주들은 입주 회사를 가려서 받기 시작했다. 방씨는 “심하게 당하고 나니까 (건물주가) 입주하는 분들을 조심스럽게 받더라”며 “임차하려는 회사 정보를 꼼꼼하게 알아본다”고 했다. 대치동 소재 15층 건물 관리인도 “주인이 코인 관련 회사는 받지 않는다. 임대 줄 때 사업자등록증 떼어달라고 해서 검사한다”고 했다.

코인 개발 업체가 있던 역삼동의 한 건물에는 층 벽마다 ‘다단계 업종, 유사 판매 업종, 다수인 출입 업종 등 3대 업종 입주 제한 및 통제’ ‘당 건물은 다단계 유형&깔세 입주를 원하지 않습니다’라는 경고 문구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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