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혀버린 봄 ‘가자 지구’…앗긴 삶은 다시 피지 않았다

노정연 기자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 16년

2010년 3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 경계선에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겠다고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팔레스타인 여성이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2010년 3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 경계선에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겠다고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팔레스타인 여성이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2007년부터 시작된 봉쇄와 반복되는 전쟁…물도 전기도 일자리도 사라져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다음 전쟁을 겪어야 한다는 것일 뿐…“죽게 된다면, 죽겠다”
‘지상 최대 감옥’ 만든 이스라엘, 전쟁 뒤엔 재점령 뜻…끝 모를 비극 예고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야에 살고 있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바질 아부 사다(35)는 폭격으로 초토화된 도시를 떠나지 않고 있다. 2023년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공격과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시작된 전쟁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며 모든 것을 파괴했지만 사다 가족은 살기 위해 떠난다는 것에 의미를 찾지 못한다.

사다의 증조부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한 ‘나크바’(팔레스타인인 강제이주 조치) 당시 고향 땅을 뺏기고 자발리야로 쫓겨왔다. 자발리야는 가자지구 내에서 가장 큰 난민촌이 위치한 곳이다.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며 힘겹게 삶을 꾸려온 그의 가족에게 이번 전쟁은 ‘제2의 나크바’와도 같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북부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며 남쪽으로 떠나라고 대피령을 내렸다. 대피하지 않는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겠다는 경고도 함께였다.

그러나 봉쇄된 가자지구 내 어디에도 피란처는 없다는 걸 사다와 가족들은 알고 있다. 이미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그는 친척 10명을 잃었다. 사다는 “이제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다”며 “죽게 된다면, 죽겠다”고 지난달 24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말했다.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언제나 죽음은 삶보다 가까웠다. 2007년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봉쇄는 가자지구로부터 물도, 전기도, 일자리도 뺏어갔다. 전쟁은 4차례나 반복됐고, 이번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다음 전쟁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안전밸브 없는 가자지구는 결국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이스라엘이 16년간 지속해온 가자지구 봉쇄 정책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음을 보여준다. 장기간 이어온 압박과 봉쇄는 가자지구 내 민간인들을 빈곤과 고립으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하마스의 공격을 막지 못했으며, 이스라엘의 안보도 지켜내지 못했다.

고압전류 장벽으로 막힌 ‘지상 최대 감옥’

가자지구는 길이 25마일(약 40㎞), 너비 6마일(약 10㎞)의 좁은 땅이다. 세종시보다 작은 약 365㎢ 면적에 230만명가량이 살고 있다.

가자지구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높이 8m의 장벽으로 이스라엘과 분리돼 있다. 남쪽 이집트와의 국경선도 철제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바닷길 역시 이스라엘 해군이 봉쇄했다.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는 북쪽의 에레즈 검문소와 이집트 국경 라파 검문소뿐이지만 이곳을 지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다.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체포된 전력이 있을 경우 통행증이 발급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지상에서 가장 큰 야외 감옥’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처음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한 바로 다음해부터였다. 이 사실이 보여주듯 오슬로 협정은 그저 선언에 그쳤을 뿐이다. 팔레스타인 자치 지위를 최종 결정하기 위한 중동평화회담은 2000년 결국 결렬됐고, 그해 이스라엘 극우 정치인 아리엘 샤론이 무슬림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을 도발적으로 방문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2차 인티파다(봉기)가 시작됐다.

이후 가자지구의 삶은 또 한번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스라엘은 2001년 가자지구 경계선에 세워진 장벽 일대를 ‘접근금지구역’으로 지정하면서 장벽에서 300m 이내 농장을 전부 갈아엎어버렸다. 2014년 팔레스타인인권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이스라엘이 파괴한 농장은 가자지구 전체 농토의 20%에 달했다. 접근금지구역에 가까이 가면 무자비한 총격이 가해졌다. 이스라엘군 몰래 올리브나무에 물을 주러 가던 농부들이 희생됐다.

이스라엘은 2005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에 따라 가자지구에 주둔하던 이스라엘군과 정착촌의 유대인들을 철수시켰지만,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무장 저항을 주장하는 하마스가 승리하자 이듬해 가자지구를 전면 봉쇄했다. 그리고 가자지구 주민 1436명의 목숨을 앗아간 첫번째 가자전쟁 이후에는 장벽에서 1.5㎞ 떨어진 곳까지 접근금지구역을 확대했다.

가자 어민들이 해안가로부터 조업이 가능한 제한거리도 2006년 18㎞에서 2009년 6㎞로 줄였다. 이스라엘 해군이 제한선에 접근한 어선에 총을 쏘거나 어민을 납치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물도 전기도 없다…한계 다다른 가자

농지도 뺏기고 바다도 뺏겼다. 영공과 해안선을 포함해 국경을 오고가는 모든 길이 막혔다. 팔레스타인 알메잔 인권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가자지구 노동자들이 에레즈 검문소에 출입 신청을 한 건수는 모두 7만9602건이었다. 가자지구 내에는 일자리가 없으니 이들이 먹고살려면 요르단강 서안지구나 이스라엘 내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신청 건수 가운데 65.8%는 불허됐다.

심지어 이스라엘 당국은 의료 인프라가 붕괴한 가자지구 내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의 이동까지 가로막았다. 2020년 가자지구에 사는 조마 알나자르는 간질을 앓고 있는 2개월 된 딸 주드를 이스라엘의 병원에서 치료받게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끝내 검문소 통과는 불허됐고, 주드는 결국 가자지구의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이렇게 출입허가를 받지 못해 숨진 환자들은 2022년에도 어린이 3명을 포함해 최소 8명에 달한다.

가자지구의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유로메드인권모니터가 올해 1월 펴낸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가자지구의 실업률은 2005년 약 23.6%에서 2022년 약 47%로 증가하며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인구의 60%가 빈곤층으로 전락했으며 약 64%는 식량 위기에 직면해 있다.

만성적인 물 부족과 전력난은 더욱 심화됐다. 2021년 기준 가자지구의 1인당 하루 평균 물 사용량은 88ℓ로 세계 최저치인 100ℓ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알메잔 인권센터는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폭격과 봉쇄가 가자지구의 물 부족 현상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수도관을 다시 지으려면 기계류와 콘크리트, 상하수도관 등이 필요하지만, 하마스가 군사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같은 물품의 반입을 이스라엘군이 모두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가자지구에서 한 달 동안 필요한 전력량은 640㎿이지만 조달 가능한 양은 195㎿에 불과하다. 지역에 하나뿐인 발전소가 연료 부족으로 멈춰 서면 가자지구는 암흑에 휩싸인다. 가자지역 주민들은 하루 6~8시간 정도 전기를 공급받고 있었지만 이번 전쟁으로 지난달 11일 이 발전소마저 가동을 멈췄다.

이스라엘의 가자 봉쇄는 ‘실패’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와 인권단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가자지구에 대한 강력한 봉쇄만이 양측 국민을 보호하고 하마스를 궤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2007년부터 16년째 이어져온 봉쇄 전략이 실패로 끝났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주민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인프라 자재의 반입까지 금지했지만, 하마스가 수천발의 로켓을 비축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마스의 땅굴은 지난 16년 동안 더욱 길고 정교해졌다.

이스라엘 매체 하레츠는 “봉쇄 정책은 사실상 가자지구의 생존을 압박함으로써 주민들의 봉기를 통해 하마스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전략이었다”면서 “하지만 이 같은 전략은 위험한 역설을 불렀다”고 분석했다. 극한의 압박은 가자의 분노를 기반으로 하마스의 힘만 키웠을 뿐 이스라엘의 안보 위협을 막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이번 하마스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의 일명 ‘잔디깎이’ 전략도 실패로 돌아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잔디깎이는 한동안 하마스의 작은 도발을 지켜보다가 일정 수위를 넘는다 싶을 때 압도적인 공세를 퍼부은 뒤 당분간 평화를 유지한다는 전략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그동안 웃자란 ‘하마스 잔디’를 성공적으로 깎아냈다고 자찬해왔지만 잔디는 매번 더욱 억세게 자라났고 잔디 깎는 비용과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문제는 전쟁 이후다. 가자지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네타냐후 총리의 말처럼 결코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미 실패로 끝난 봉쇄 정책을 되풀이할 수도 없다.

‘하마스 궤멸’을 외치며 가자 봉쇄와 공습을 진두지휘한 네타냐후 총리는 “이번 전쟁이 끝난 뒤 가자지구의 안보는 이스라엘이 책임질 것”이라며 필요할 때까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재점령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한 전체적인 안보책임을 지지 않았기에 이번 전쟁과 같은 ‘테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혹한 봉쇄 정책으로 가자지구 주민들을 고사시키려 했던 이스라엘이 책임지는 안보가 과연 이곳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미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라파엘 코헨은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고, 부패한 하마스와 무능력한 팔레스타인 정부 외에 정치적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것은 잔디가 다시 자라는 것을 보기 위해 잔디를 깎는 반복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미국은 가자지구에 미군을 포함한 다국적군을 배치하는 방안,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모델로 한 평화유지군을 설립하는 방안, 유엔이 임시로 가자지구를 감독하는 방안 등 여러 가지 전후 대책을 거론하고 있지만, 가자 주민들의 정치적 선택권이 배제된 상태에서 불안의 씨앗은 언제든지 싹틀 수 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이스라엘이 이번 전쟁을 명분 삼아 아예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가자지구 밖으로 밀어내려 한다는 정황도 나타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5일 이스라엘 고위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주민 수십만명을 이집트 시나이반도로 강제이주시키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라고 보도했다.

쏟아지는 폭격 아래 자발리야를 지키고 있는 사다는 과연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고향을 떠나 자발리야로 쫓겨났던 증조부처럼 대를 이어 ‘제2의 나크바’를 겪게 될까. 죽거나 혹은 영원히 고향을 떠나거나.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당하고 있는 사다에게 희망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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