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의 기업본색
※대한민국보다 대한민국 기업이 더 유명한 세상입니다. 어느새 수 십조원을 굴리고 수 만명을 고용하는 거대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밖에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상영의 ‘기업본색’은 기업의 딱딱한 보도자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공시자료의 수많은 숫자 안에 가려진 진실을 추적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전국전력산업연맹 조합원들이 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한전 자구안 관련 지분매각 인력감축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11.08 한수빈 기자

전국전력산업연맹 조합원들이 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한전 자구안 관련 지분매각 인력감축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11.08 한수빈 기자

“이대로 가면 한국전력은 영원히 적자를 면치 못한다.”

약 13년 전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8월. 김쌍수 당시 한전 사장은 퇴임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퇴임식에서 요금 인상을 막은 정부에 불만을 표출하고 떠난 것이다.

김 전 사장은 역대 한전 수장 중 최초 민간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이었다. LG전자 부회장까지 맡았던 김 전 사장은 취임 초 부터 ‘새바람’을 예고했다. 실제 2008년 8월 취임과 함께 혁신을 강조하며 차장급 이상은 보직을 놓고 무한경쟁을 벌이고 조직도 통폐합했다. 3년 임기 동안 약 4조5000억원의 비용을 절감하고, 정부 경영평가에서 줄곧 1위를 달성하는 등의 성과도 냈다.

한전 사장은 독이 든 성배? LG·현대맨도 손들어

그러나 김 전 사장의 경영혁신 활동도 한계에 부딪혔다. 비용 절감에도 불구하고 전기요금을 제대로 인상하지 못해 한전 적자 폭은 여전히 컸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 전 사장은 퇴임을 1주일 앞두고 ‘전기요금 인상에 소극적으로 나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소액주주로부터 2조800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렸다. 그는 임기 만료를 불과 3일 앞두고 스스로 물러나는 방식으로 정부에 불만을 드러냈다.

김 전 사장은 “지난 10년간 등유는 93%, 경유 121%, 가스 가격은 48% 올랐는데 전기요금은 14.5%밖에 안 올랐다”고 작심 비판했다. 그러면서 “지식경제부와 전기요금 현실화를 논의하면서 8~9% 인상은 가능하다고 봤는데 물가 당국 반대로 4.9%로 제한돼 절망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독이 든 성배’로 불릴 정도로 역대 한전 사장들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고강도 자구개혁과 함께 요금 인상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정부의 반대에 막혀 불명예 퇴진하며 ‘한전 사장 잔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김중겸 전 한전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중겸 전 한전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전 잔혹사는 정권 실세도 피하지 못했다. 김 전 사장 후임인 김중겸 전 사장은 임기 2년을 남기고 교체됐다. 김중겸 전 사장은 현대건설에 35년간 몸담아온 대표적인 ‘엠비(MB)맨’으로 손꼽혔지만 물가 안정을 내세우며 요금 인상에 반대한 정부와 힘겨루기 하다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한전은 직전 해인 2011년 연료비 급등으로 3조2929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데 이어, 2012년 상반기에도 2조2779억원의 손실을 냈던 상황이었다. 이에 김중겸 전 사장은 전기요금을 10% 넘게 올리려고 했지만 정부 반대로 4.9% 인상에 머물렀다.

한전 사장 성공 여부는 연료비에 달려있다?

경영위기를 겪던 하이닉스 반도체를 되살렸던 김종갑 전 사장도 한전 적자는 막지 못했다. 하이닉스와 한국지멘스 CEO를 거쳐 한전 사장에 화려하게 복귀했던 관료 출신인 김종갑 전 사장은 연료비 급등으로 임기 첫해인 2018년부터 적자 상황에 직면했다.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각종 전기요금 한시 특례할인 제도도 폐지했지만 2019년 오히려 적자 규모는 불어났다.

저유가로 2013년부터 9년간 올리지 않았던 전기요금을 뒤늦게 인상했지만 소폭에 그쳐 적자 해소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때문에 김종갑 전 사장은 3년 동안 임기 내내 전기요금 인상을 두고 정부와의 갈등과 회사의 이익을 외면했다는 소액주주의 반발에 시달렸다.

잔혹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했던 사장들과 달리, 두 차례나 연임에 성공했던 이도 있다. 2012년 이명박 정부 막바지에 임명된 조환익 전 사장은 길어야 임기가 6개월이라는 예상과 달리, 두 차례나 연임했다. 약 5년간 한전을 이끌었던 조 전 사장은 만성적자 신세였던 한전을 영업이익 10조원의 ‘알짜배기 공기업’처럼 만들었다. 이에 한전은 국제신용평가사 S&P로부터 기존 ‘A+’ 등급에서 1단계 상향된 ‘AA-’ 등급을 부여받아 글로벌 전력회사 중 유일하게 3대 국제신용평가사로부터 ‘AA’ 등급을 받았다. 조 사장 취임 당시 2만8650원이던 주가도 6만원대까지 치솟았다.

조환익 전 한전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환익 전 한전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이런 성과에는 저유가라는 국제 에너지 시장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당시 저유가 상황이 장기간 이어지면서 오히려 산업계를 중심으로 전기료 인하 요구가 나오는 시점이었다. 덕분에 한전은 신산업 등에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첫 정치인 출신인 신임 김동철 한전 사장도 이 같은 잔혹사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8일 김동철 사장은 적자 개선을 위한 자구안을 발표했지만 여론의 반응은 차가웠다.

이번 대책에는 서울 공릉에 있는 인재개발원 터와 한전KDN 지분 20% 매각 카드는 물론, 노조의 반발을 무릅쓰고 인력 감축 방안도 내놨다. 하지만 당장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맹탕 대책’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날 함께 발표한 산업용에 국한한 전기요금 인상 계획도 ‘여론의 눈치를 본 임시방편’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김동철 사장도 취임 초부터 정부에 “전기요금을 인상하지 않으면 결국 한전의 모든 일이 중단되고 전력 생태계도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압박했다. 그러나 내년 봄 총선을 앞둔 정부·여당에 막혀 반쪽짜리 대책에 그치고 말았다.

한전 사장은 왜 CEO의 무덤이 됐을까. 역대 한전 사장들은 공기업이면서 주주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상장기업이라는 모순된 점을 지적한다. 한전은 민간 지분이 49%인 주식회사로, 1989년 국내 증시 상장, 1994년 뉴욕증시 상장했다. 그러나 상법상 주식회사일 뿐 정부가 지분 100% 소유할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정부로부터 통제를 받았다.

실제 정부는 분기마다 한전의 전력 판매가격을 결정한다. 물가 급등을 우려한 정부 때문에 국제 연료비 가격이 급등하면 한전은 원료는 비싸게 사서 전력은 싸게 팔아야 한다. 김종갑 전 사장이 전기요금 인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비유했던 대로 “수입콩(연료) 값이 올라갈 때 그만큼 두부(전기) 값을 올리지 않았더니 이제는 두부가 콩보다 더 싸다”고 한 것과 같다.

한전 적자는 ‘사장 잔혹사’에서 끝나지 않아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이 19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 에서 의원질의에 답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이 19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 에서 의원질의에 답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한전 적자는 ‘사장 잔혹사’에서 멈추지 않는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한전 적자에 지분 32.9%를 보유한 산업은행의 재무 건전성부터 흔들린다.

19일 산업은행의 ‘바젤3 공시’ 보고서를 보면, 올해 2분기 말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총자본비율 기준)은 14.11%이다. BIS 비율은 은행이 보유한 위험자산 대비 자기자본이 차지하는 비율로, 재무건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다. 산은의 자기자본비율은 바젤 3가 정한 마지노선(10.5%)은 웃돌지만, 15~18% 수준인 주요 시중은행보다는 낮다. 한전 적자로 산은의 자기자본비율이 낮아지면 그만큼 정책공급 여력은 낮아진다. 산은은 한전에서 1조원 손실이 나면 정책금융 공급액 여력은 1조8000억원 줄어드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전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에 자금이 몰리면서 민간 대기업의 자금 조달도 어려워지고 있다. 한전은 대규모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공기업 특성상 신용등급 AAA급이어서 시중에 자금을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한전 적자 후폭풍은 커지고 있지만 여당의 개입으로 전기요금을 인상하기 위한 셈법은 더 복잡해졌다.

지금까지 전기요금은 전기사업법에 따라 한전이 조정안을 작성해 산업통상자원부에 신청하면 산하 기관인 ‘전기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산업부가 최종 인가했다. 이 과정에서 물가 안정법에 따라 산업부가 미리 물가 당국인 기획재정부와 협의를 진행했다. 사실상 전기위는 심의만 할 뿐, 최종 결정은 산업부와 기재부에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올해 2분기 전기요금 인상부터 국민의힘이 요금 결정에 개입하면서 분기 요금 인상안은 올해 들어 두 차례나 미뤄졌다.

전기요금 결정 논의에 참여했던 한 전직 관료는 “전기요금 인상은 표와 연결돼 진보·보수 정부를 막론하고 그동안 실무 부처가 결정하도록 했다”며 “최근 여당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전면에 나서면서 전기요금 인상 책임도 떠안게 되자 여론 무마용으로 요구가 늘어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전력정책 전문가들은 한전 사장 잔혹사를 끝내려면 전력산업을 개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안으로는 발전-송전-배전-소매를 일괄운영하는 독점체제에서 발전과 소매부문은 경쟁체제를 도입하고, 송배전망은 독립 법인화하거나 국영기업화 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영국과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주요국도 이 같은 전력 구조 개편을 거쳤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송배전은 중요한 인프라이기 때문에 국영 회사를 따로 설립할 필요성이 있다. 현재 한전 적자로 송배전 확충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점은 매우 우려되는 부분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라도 정부가 관련 투자를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석 박사는 한전 독점인 소매판매도 경쟁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발전부분은 이미 민간 사업자들이 다수 진출했지만 소매판매의 경우 한전 독점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공기업이 소매판매를 독점하면 요금 인상을 막으려는 정치권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소매부분에서도 다양한 사업자와 경쟁하는 형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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