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의 기업본색
※대한민국보다 대한민국 기업이 더 유명한 세상입니다. 어느새 수 십조원을 굴리고 수 만명을 고용하는 거대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밖에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상영의 ‘기업본색’은 기업의 딱딱한 보도자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공시자료의 수많은 숫자 안에 가려진 진실을 추적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연합뉴스.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연합뉴스.

대기업은 어느 관료를 가장 선호할까. 경향신문은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퇴직공직자의 취업 심사 결과를 토대로 올해 대기업들이 어느 부처 관료 출신자를 주로 영입했는지 분석했다. 규모로 보면 여전히 검찰 출신이 가장 많았지만 최근 외교부 출신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경향신문은 2차례에 걸쳐 과거와 달라진 대기업들의 관료 영입 행태와 배경에 대해 짚어볼 예정이다.

국내 한 반도체 전문가는 최근 A 대기업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향후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 추이 등 현안에 대한 폭넓은 의견을 듣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이 전문가는 “외교부 출신 임원이 마련한 자리였는데 이미 기업에서는 미국·중국 갈등으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마련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중 갈등으로 ‘경제 안보’가 부각 되면서 외교부 출신 기업인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그동안 검찰 등 사정기관과 산업통상자원부·기획재정부 등 경제부처 출신을 선호했던 삼성과 SK, 현대차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의 핵심 보직에는 이미 외교관 출신이 다수 포진했다.

4일 경향신문이 정부공직자윤리위의 퇴직공직자 취업 심사 결과를 분석한 결과, 올해 1~10월 자산 5조원 규모 이상 대기업 임원으로 자리를 옮긴 외교관은 5명이다. 재취업한 공직자 중 검찰(10명), 산업통상자원부(7명) 출신이 여전히 더 많았지만, 주요 보직에는 외교관 출신들이 눈에 띄었다.

전면에 나서는 ‘외교관 출신’ 기업인

대표적으로 현대자동차는 올해 8월 김일범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을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외시 33회로 외교부 북미 2과장 등을 거친 김 부사장은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해외정책 대응 맡고 있다. 앞서 현대차는 지난 6월에는 외시 32회 출신인 김동조 전 청와대 외신대변인을 영입했다.

최근 현대차의 잇단 외교관 출신 영입은 IRA 등 미국의 정책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반성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미 정부는 IRA를 통해 자국에서 조립한 전기차에 대해 보조금을 주는데 현대차와 기아는 국내에서 완성된 전기차를 수출·판매하는 형태라 보조금 지급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는 처지였다. 이에 따라 현대차와 기아의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은 3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다.

현대차 이외에도 KT와 삼성SDI, 부영주택이 올해 외교부 고위 공무원 출신을 경영자문역과 고문, 임원으로 영입했다.

예전부터 외교관 출신을 적극 영입한 기업도 있다. 2012년 당시, 김원경 주미대사관 경제참사관을 영입한 삼성전자가 대표적이다. 올해 사장으로 승진한 김 사장은 외시 24회로,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출장길에 자주 동행하면서 ‘이재용의 남자’로 불리기도 했다.

김 사장이 이끄는 삼성전자 글로벌 대외협력팀의 윤영조 상무도 외교부 출신이다. 외시 34회인 윤 상무는 제네바대표부 참사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대표부 참사관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삼성전자는 한국 관료에 그치지 않고 지난해 3월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까지 북미법인 부사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SK에도 핵심 보직에 외교관 출신이 포진했다. 세계 엑스포 태스크포스(TF) 현장지원담당을 맡는 김유석 부사장은 외시 29회로 2009년 SK에 합류한 뒤 최태원 회장의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외시 39회로 역시 북미2과장과 북미유럽경제외교과장 등을 지낸 양서진 부사장은 지난해 말 SK에 합류했다.

포스코도 2019년 당시, 외교부 국제경제국 심의관을 지낸 김경한 무역통상실장을 영입했다.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철강 등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매기는 등의 통상압박에 대응하기 위한 영입이었다.

최근에는 경제단체도 외교관 출신이 자리를 잡았다. 한국경제인협회(옛 전경련)도 신임 상근부회장에 김창범 전 인도네시아 대사를 선임했다. 김 부회장(외시 15회)은 외교부 북미3과장, 대통령실 의전비서관, 주벨기에·유럽연합(EU) 대사 등을 지냈다.

대미 압박 커질수록 외교관 출신 힘 받아

이들 중 상당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참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원경 부사장은 2007년 협정 최종 타결 당시 한미FTA기획단 협상총괄팀장을 맡았다. 양서진 부사장도 FTA협상총괄과에서 관련 업무 담당했다. 김경한 포스코 무역통상실장 역시, 한미FTA 체결위원회 팀장을 지냈다. 김일범 현대차 부사장과 김유석 SK 부사장은 외교부 핵심 보직인 ‘북미 2과장’을 지냈다는 점도 특징이다.

지난 4월 26일(현지시간)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 26일(현지시간)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기업들이 외교관을 찾는 배경에는 최근 IRA와 유럽 탄소국경조정제도 등 국제통상 이슈가 잇따르기 때문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과거에는 통상문제가 국가 대 국가나 기업 대 기업의 관계에서 주로 일어났다면 이제는 국가 대 기업 사이에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며 “특히, 상계관세나 반덤핑이 늘어날수록 직접 외국 정부를 상대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실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지난해 미국 정부의 반도체 관련 정보 제출로 곤욕을 치렀고, 공급망 문제와 관련해서도 미국 정부로부터 해결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관련 경험이 풍부한 외교부 출신을 선호하는 경향이 확대됐다고 분석된다. 다만, 2013년 통상 기능이 현재 산업통상자원부로 옮겨감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산업부 출신들의 대기업행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산업부에서 대표적인 통상 관료로 손꼽혔던 권혁우 전 미주통상과장은 지난해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겼다. 권 전 과장과 같이 일했던 산업부 B서기관도 최근 삼성전자로 이직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11월에는 통상교섭본부 과장과 FTA 상품과장을 거쳤던 전동욱 전 과장이 LG에너지솔루션으로 이직했다. SK도 올해 3월 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에 글로벌 대관 총괄조직인 글로벌공공대응(GPA)팀을 신설하고 김정일 전 산업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을 팀장으로 선임했다.

7년 만에 삼성전자로 이직한 기재부 고위 관료

산업부 관료들은 SK E&S, 한화에너지 등 에너지 기업으로도 자리를 옮겼다. 산업부가 에너지·산업 정책을 담당하는 만큼 관련 기업들은 대관 업무 강화를 위해 산업부 출신을 적극 영입한 것으로 해석된다.

국내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 출신 2명도 올해 대기업으로 갔다. 삼성전자는 최근 이병원 기획재정부 부이사관을 IR(기업 홍보활동)팀 담당 부사장으로 채용했다. 기재부 간부가 삼성전자로 이동한 것은 2016년 김이태 삼성벤처투자 사장 이후 7년 만이다.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정부청사와 고층 아파트 전경.  이석우 기자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정부청사와 고층 아파트 전경. 이석우 기자

이 부사장은 기재부 경제정책국·정책조정국에서 경제정책과 정책 조율 업무를 맡았던 ‘정책통’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실 행정관으로 근무했던 이 부사장은 윤석열 정부에서는 대통령실 선임행정관으로 일했다.

김이태 사장은 지난달 27일 2024년 정기 사장단 인사에서 삼성벤처투자 사장으로 승진했다. 김 사장 역시 기재부에서 외화자금과장, 국제금융과장 등 주요 보직을 지냈다. 삼성벤처투자는 삼성그룹의 벤처캐피털(CVC)로, 경쟁력 있는 벤처기업을 발굴해 투자하는 사업을 담당한다. 이외에도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올해 안도걸 전 기재부 차관을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으로 신규 선임했다.

고위 공무원의 줄줄이 특정 대기업행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대기업의 경우에는 특정 부처와의 관계를 위해 그 출신 공무원이 주로 오는 경우가 있다”며 “기업으로서는 신사업을 추진하는 경우, 규제 권한을 가진 부처와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현행 공직자윤리법이 허점투성이라고 지적한다. ‘관피아’ 문제를 오랫동안 지적해온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국가경쟁력 강화나 공공의 이익 등 추상적 사유를 들어 취업을 승인해주는 공직자윤리법 시행령의 ‘특별한 사유’를 구체화해야 한다”며 “비공개로 심사하는 공직자윤리위원회 회의록과 회의자료, 심사위원 명단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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