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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바오에 대한 명랑하고 심오한 탐구

입력 2024.03.03 22:17

푸바오의 앞 발가락이 여섯 개라
숲의 구도자 같은 생존방식을 보며
인류가 갈 진화 방향이라 생각했다

물론 일장춘몽으로 끝날 것이지만
그래도, 고맙다~ 푸바오!

다시 봄이다. 하나 마음은 영 심란하기만 하다. 도처가 전쟁에 기후재앙이고, 영끌과 우울증, 몰락과 퇴행의 언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정녕 몰랐다. 포스트 코로나가 이럴 줄은. 그 정도의 전 지구적 재난을 겪었으면 문명의 방향이 바뀔 줄 알았다. 욕망에서 교감으로! 소유에서 자유로! 완전 망상이었다. 그렇다고 새삼 허무에 빠지자니 자존심이 영 허락하질 않는다. 하여,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이럴 때일수록 ‘명랑하게’ 잘 살아보기로. 그것이 대단한 저항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나와 나의 벗들의 울적함을 덜어주는 효과는 있으리라.

한데, 이 전략은 즉시 난관에 봉착했다. 명랑하기 위해선 몹시 심오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하긴 ‘깊은 통찰’이 없고서야 어찌 ‘일상의 기쁨’이 가능할 것인가. 하여, 결심했다. 이참에 ‘명랑함’과 ‘심오함’의 오묘한 이치를 탐구해보기로. 이 칼럼의 명칭이 ‘명심탐구’가 된 건 이런 맥락이다.

첫번째 테마는 ‘푸바오’다. 오랫동안 반달곰에 심취해온 내가 푸바오를 난세의 피난처로 삼게 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푸바오가 내게 준 감동은 힐링 그 이상이었다. 하여, 그 귀여움의 원천에 대한 깊은 탐구에 돌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은 거의 보이지 않고, 머리는 상당히 크다. 목은 너무 굵고(아니 없고!), 치명적인 ‘숏다리’를 가졌다. 한마디로 몸 전체가 둥글고 유연하다. 눈빛이며 몸짓에 각이 진 데가 없다. 현대인의 미적 기준과는 정확히 대칭꼴이다. 우리 시대가 설정한 미모의 기준은 어떤가. 머리는 작고, 눈은 얼굴의 반을 덮어야 하고, 몸매는 8등신, 아니 9등신에 가까워야 한다. 눈빛과 몸매가 강렬하다 못해 타자들을 압도해야 한다. 해서, 예뻐질수록 좀 무섭다. 그렇다. 귀여움과 예쁨은 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울림과 끌림을 일으키지만, 후자는 질투와 피로를 야기한다.

하루의 루틴은 더 충격적이다. 12시간 이상 먹고, 시도 때도 없이 잔다. 밤에는 밤이라서 또 잔다. 나무 틈에 끼여서 자고, 씨름하다 자고, 젖먹이다 자고. 불면증을 앓는 현대인들에겐 경이로운 ‘수면능력’이다. 나머지 시간엔? 논다. 나무타기, 앞구르기, 산책하기. 더 중요한 건 속도. 모든 행동이 슬로비디오 수준이다. 우리는 어떤가? 12시간 이상 일하고, 게임과 쇼핑, 각종 중독으로 잠잘 시간이 없다. 일할 때는 물론이고 놀 때도 초고속이다. 당연히 늘 지친다. 더 놀라운 건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걱정과 불안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 점에서 푸바오의 일상은 거의 장자의 경지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지금 여기’를 누린다는 점에서.

가장 놀라운 건 앞발. 발가락이 다섯, 아니 여섯 개다. 하나는 엄지. 이 엄지 덕분에 느긋하게 앉아서 대나무를 먹고, 새끼를 품에 꼬옥 안을 수 있다. 새끼가 보채면 등을 토닥이고, 말썽을 부리면 등짝 스매싱을 날리기도 한다. 그뿐인가. 곰살맞게 사육사와 팔짱을 끼거나 정답게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한다. 오, 저것은 발이 아니라 손이다! 전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포인트도 바로 저 지점이다. 자이언트 판다를 통해 사람들은 사무치게 느끼는 것이다. ‘생명은 교감’이라는 이치를, 그리고 우리는 그 교감을 잊은 지 오래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판다는 대체 어떻게 저런 엄지를 갖게 되었을까?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그것은 엄지가 아니라 ‘요골종자골’, 즉 앞발의 뼈를 별도로 발달시킨 것이다. 이 엄지로 인해 오직 대나무만 먹고, 짝짓기를 1년에 3일 정도로 줄이고, 생의 대부분을 홀로 지내는, 마치 숲의 구도자 같은 생존방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하여, 야생동물임에도 달리고 찌르고 빼앗고, 사냥이 끝난 다음엔 고개를 처박고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육식동물의 궤도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그래서 또 알게 되었다. 먹고 자고 놀기만 하는데, 이 야만적인 국가주의 시대에 외교의 상징이 된 이유를. 존재 자체가 평화요, 교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인류의 진화도 결국 저런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훨씬 더 유연하고 창조적인 엄지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노동과 육식에서 해방되고, 숲과 나무와 교감하고, 존재 자체로 세상과 세상을 연결하는! 물론 이 또한 일장춘몽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그래도 괜찮다. 이젠 이 난세의 흐름 따위는 가볍게 ‘생깔’ 수 있는 배짱이 생겼으니까. 고맙다~ 푸바오!

고미숙 고전평론가

고미숙 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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