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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배신한 자, 누구인가

입력 2024.03.27 22:15

수정 2024.03.27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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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토스테론이 2016년을 접수했다.” “여성혐오가 이겼다.” “세상 천지에 백인 남자들의 승리가 울려 퍼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선출된 직후 미국 언론이 쏟아낸 말들이다. 2016년 대선은 미국에서 전례 없는 성별 전쟁을 불러왔고, 언론은 앞다퉈 트럼프 당선을 미국 백인 남성의 폭거이자 승리로 기록했다. 극우 포퓰리스트 관종 대통령의 탄생에 깜짝 놀란 언론인들과 정치 전문가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세운 국민, 특히 백인 노동자 계급 남성에 대한 성토를 이어갔다.

그런데 이 난리법석을 지켜보며 “이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닌데? 20년 전에 내가 <스티프트: 배신당한 남자들>(1999)에서 자세히 소개했잖아”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였다.

그는 2019년에 출간된 <스티프트> 2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2016년 대선 결과는 성별 대결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백인 남성은 언제나 민주당보다 공화당을 선호했고, 노동자 계급 백인 여성들 역시 트럼프를 지지했다. 무엇보다 2016년 선거 기간 중 벌어진 많은 일들이 이미 1990년대 클린턴 행정부 중반에 등장한 것들이었다. 예컨대 당시는 대통령 부인이었고 이번에는 대통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여성혐오적인 공격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이런 흐름의 한가운데에는 “성난 백인 남자들”이 있었다. 1990년대에 팔루디는 6년에 걸쳐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들을 인터뷰한다. 1980년대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우경화와 페미니즘에 대한 역공을 취재, 분석한 <백래시>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직후였다. 그는 페미니스트와 여성에 대한 백래시의 동력이 백인 남자들의 분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남자들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여자들을 싫어하는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는 수백명의 남자를 만났다. 그중에는 격렬한 미식축구 팬들, 기독교 남성 운동의 참여자들, 주목을 끌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청년들, 베트남 참전 용사들에 음모론자들뿐 아니라 <람보>의 히어로인 실베스터 스탤론도 있었다. <스티프트>는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낸 역작이다.

그는 결국 남자들의 분노를 이해하게 된다. 이미지 경제의 도래와 함께 미국 남성은 너무 처절히 배신당한 것이다. 놀랍게도 그 배신의 주인공은 미국 여성이 아니었다. 그들을 배신한 건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란 시스템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소수의 세력가들, 자본가들, 셀럽들이었다. 트럼프 역시 “평범한 남자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했지만, 각종 사업을 파산시키면서 본인은 떼돈을 버는 와중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어먹은 자본가-셀럽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언론과 정치인들은 성별 전쟁이라는 환상을 띄워 본질을 흐리며 쉽게 돈과 표를 벌고, 대중은 그 선명한 설명에 안주한다.

다음주면 <스티프트>의 한국어판이 출간된다. 120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빼곡하게 담겼다. 2024년 대한민국 총선 판을 보니, 이 책이 우리에게도 필요했구나 싶다. 윤석열이라는 전례 없는 대통령의 탄생을 페미니스트 탓으로 돌리는 건 얼마나 쉽고 간편한지, 그러나 그것은 또 얼마나 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지, 우리 역시 제대로 살펴야 한다.

CBS 뉴스는 이렇게 말했다. “<스티프트>는 우리의 꼬락서니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좋아해주는 여성이 쓴 훌륭한 책이다.” 하지만 정작 팔루디는 “성난 남자들”의 모습을 “꼬락서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팔루디는 페미니스트로서 남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손을 내민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에서 미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읽어낸다. 덕분에 나는 남자와 여자가 페미니즘 안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이유를 배웠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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