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가난·소외 속에 써내려간 즐거운 이야기···슬픈 어른들을 위한 마법

이종산 소설가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전쟁·가난·소외 속에 써내려간 즐거운 이야기···슬픈 어른들을 위한 마법

우산을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
파멜라 린든 트래버스 지음·메리 쉐퍼드 그림·우순교 옮김 | 시공주니어 | 234쪽 | 1만2000원

최근에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를 다시 읽었다. 예전에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 제인과 마이클 남매의 시선으로 이 이야기를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30대가 되어서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젊은 여성 보모인 메리 포핀스에게 이입하게 된다. 벚나무 길 17번지에 사는 뱅크스씨네는 나이든 보모가 갑자기 일을 그만둔 뒤 새로운 보모를 구하려고 신문에 광고를 낸다. 그런데 이 광고의 문구가 참 치사하다. 돈은 되도록 적게 받고 일은 아주 잘하는 유모여야 한다니.

이 광고를 보고 찾아온 사람이 바로 메리 포핀스다. 메리 포핀스의 가방은 속이 빈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그 안에 손을 집어넣으면 물건들이 끝없이 나온다. 계단 난간에 앉아 위로 올라가는 재주도 있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전쟁·가난·소외 속에 써내려간 즐거운 이야기···슬픈 어른들을 위한 마법

다. 어린 남매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계단 난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건 봤어도, 올라가다니. 맙소사! 제인과 마이클 남매는 새로운 유모에게 단숨에 매료된다.

보통 아동문학에서 짓궂은 장난을 치는 쪽은 주로 어린이다. 그러나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의 제인과 마이클 남매는 착하고 귀엽고, 심술궂은 것은 보모 메리 포핀스다. 작가는 메리 포핀스를 악당으로 다루지 않는다. 괴팍한 어른이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며 따뜻한 어른으로 변하는 이야기 역시 절대 아니다.

메리 포핀스에 이입해서 읽으면 이 이야기가 여러모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특히 그녀가 친구 버트를 만나 시간을 보내는 대목이 그렇다. 메리 포핀스는 뱅크스 부인에게 목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자유시간을 달라며, 다른 집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덧붙인다. 유행에 민감한 뱅크스 부인은 트렌드에 뒤떨어져 보이기 싫은 마음에 당장 그렇게 하라고 허락한다.

이렇게 얻은 첫 자유시간에 메리 포핀스는 버트를 만나러 간다. 버트는 맑은 날에는 바닥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성냥을 팔며 사는 인물이다. 버트는 동전이 몇 개 없는 모자를 보여주며 오늘은 번 돈이 없어서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빵을 사줄 수 없다고 말하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메리 포핀스는 그런 그에게 자신은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뻔한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슬픈 대목에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두 사람을 마법의 세계로 데려간다.

메리 포핀스가 버트가 바닥에 그린 시골 풍경을 보며 칭찬하자, 버트는 그럼 오늘은 여기에 가자며 그녀의 손을 끌어당긴다. 그렇게 훌쩍 두 사람은 그림 속의 아름다운 숲으로 들어간다. 그 세계 속에서는 웨이터가 따뜻한 차를 따라주고, 식탁 위에는 빵이 잔뜩 쌓여있다. 그림 속에서 두 사람은 굶주리지 않고 실컷 먹으며 멋진 점심식사를 한다.

아동문학은 많은 경우에 어린이를 위한 마법을 부린다. 그러나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에는 어른을 위한 마법이 있다. 사회의 시각에서 보자면, 메리 포핀스와 버트는 런던의 하층민이다. 작가 파멜라 린든 트래버스가 이 멋진 이야기를 처음 발표한 것은 1934년, 당시 작가의 나이는 35세였다. 1899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작가는 아일랜드인의 후손으로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1924년에 영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5년 만에 런던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1929년 영국의 실업자 수는 250만명에 달했다. 시기적으로는 런던 대공황의 한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대에 나온 것이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였다.

이 이야기의 곳곳에는 고용인과 보모 사이의 긴장과 갈등, 빈부격차 문제,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위트있게 녹아들어 있다. 전쟁과 경제적 공황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노동과 가난의 문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 책이 발표된 지 9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뜨겁도록 생생한 현실이다.

서양의 근현대사에 보모가 있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식모가 있었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며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던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생각하면 메리 포핀스 이야기가 한층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작가 파멜라 린든 트래버스는 런던으로 와서도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기 위해 재봉사, 무용수, 배우 등의 일을 하며 빠듯한 생계를 꾸렸다. 그런 현실 속에서 작가는 슬픔이나 절망에 지지 않고 이토록 즐겁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한 편씩 써나갔고, 그렇게 묶여 나온 책은 출간되자마자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현실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마법이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이 책을 보면 아동문학과 장르문학의 매력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슬픈 사람들을 위한 즐거운 마법. 그것은 독자만이 아니라 작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문학이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힘을 부여하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것 또한 느낀다. 메리 포핀스를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고만 기억한다면, 어른이 된 지금 원작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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