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연, 하나의 이야기···붉은 드레스 걸린 십자가 너머 무지개는 뜰까

김창길 기자
<캠룹스 기숙학교(Kamloops Residential School)>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주 고속도로를 따라 세워진 십자가들 너머로 무지개가 떴다. 붉은 빛 드레스가 걸린 십자가는 캠룹스 기숙학교 원주민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2021년 6월19일. / 앰버 브래컨(World Press Photo via AP)

<캠룹스 기숙학교(Kamloops Residential School)>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주 고속도로를 따라 세워진 십자가들 너머로 무지개가 떴다. 붉은 빛 드레스가 걸린 십자가는 캠룹스 기숙학교 원주민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2021년 6월19일. / 앰버 브래컨(World Press Photo via AP)

백인 학생들의 야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등교하는 흑인 소녀 도로시 카운츠(1957년 미국, 더글러스 마틴의 사진), 독재정권의 종교 탄압에 항거하며 분신하는 탁광득 스님(1963년 베트남, 말콤 브라운), 호찌민 대로에서 베트콩을 즉결 처형하는 로안 장군(1969년, 에디 애덤스), 네이팜탄 폭격으로 뛰쳐나와 거리에서 울부짖는 어린이들(1973년 베트남, 닉 우트), 톈안먼 광장에서 홀몸으로 탱크 행렬을 막아선 시민(1990년 중국, 찰리 콜), 남편의 학대로 코와 귀가 잘려나간 아프가니스탄 여성 비비 아이샤(2008년, 조디 비에버)….

1955년부터 시작된 세계보도사진전(World Press Photo·월드프레스포토)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모니터에 노출된 섬네일처럼 굵직한 현대사의 견본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간다. 당시의 사건을 거론할 때마다 반복해서 첨부됐던 사진들은 포착된 인물에 대한 사연이 이미지의 생명력을 확장시켰다. ‘사이공식 즉결 처형’이라고 불리는 에디 애덤스의 사진은 리볼버 권총 방아쇠를 당긴 로안 장군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제기했고, 닉 우트가 찍은 ‘네이팜탄 소녀’는 그녀의 성장기를 언론이 추적하게 했다. 찰리 콜이 찍은 ‘탱크맨’ 사진도 마찬가지. 작가 루시 커크우드는 탱크맨의 소재를 찾는 이야기로 연극 <차이메리카>의 극본을 썼다.

매년 봄이 찾아오면 발표되는 세계보도사진전의 수상작을 기다리는 이유는 사진의 높은 완성도에 따른 감동은 물론 사진 그 자체가 만들어 나가는 작은 서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지난해 가장 굵직했던 세계적 이슈들을 뒤늦게 되새김질할 수도 있다.

2021년 세계보도사진전 수상작은 예상대로 코로나19 팬데믹의 애틋한 순간을 기록한 사진이었다. 제목은 ‘첫 번째 포옹’. 브라질의 한 요양원에서 5개월 동안 격리됐던 환자가 ‘허그 커튼’이라 불리는 비닐 차단막을 사이에 두고 간호사와 포옹하는 장면이다. 2015년 러시아 게이 커플 사진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보도사진상을 받은 덴마크 기자 매즈 니센이 포착했다.

“우리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며칠 전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참상을 기록했던 사진기자 예브게니 말로레카로부터 e메일 답장이 왔다. 지난 ‘사진공책’ 기사를 통해 우크라이나를 응원한다는 메일을 이달 초에 보낸 터였다. 내년 세계보도사진전의 수상작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록한 사진일 가능성이 크다. 어린이, 임산부 등 민간인들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예브게니 말로레카는 분명히 유력한 수상 후보자다. 하지만 올해의 세계보도사진상은 쉽게 예측하기 힘들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과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사이에는 어떤 사진이 보도사진 역사에 자리매김하게 될까?

World Press Photo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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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발표된 2022년 세계보도사진전 심사 결과는 다소 의아했다. 글로벌 수상작이 너무나 고요한 풍경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고 있다. 붉은 드레스가 걸린 십자가 너머로 한 줄기 무지개가 떠 있을 뿐이다. 캐나다 프리랜서 사진가 앰버 브래컨이 원주민 기숙학교 캠룹스를 취재하면서 찍은 장면이다. 4000명이 넘는 캐나다 원주민 학생들이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는데, 세계적인 이목을 끌 만한 사건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사진 뉴스로서는 현장성이 떨어지는 사안이기도 했다. 월드프레스포토 네덜란드 본부는 앰버 브래컨의 사진이 67년의 세계보도사진전 역사에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최초의 사진이라고 밝혔다. 캠룹스 기숙학교 사진 이외에 선정된 글로벌 수상작이 고작 3개라는 점도 의아했다. 사연이 궁금해 월드프레스포토 홈페이지를 통해 내용을 파악했다.

미국 언론만을 대상으로 하는 퓰리처상과 달리 월드프레스포토는 전 세계 보도사진가들이 기록한 사진의 가치를 따진다. 뉴스, 환경, 인물 등 8개 분야로 나누어 경쟁했다. 하지만 올해부터 심사과정이 바뀌었다.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 6개 대륙별 1차 지역심사를 거친 수상작들을 대상으로 글로벌 수상작을 선정했다. 지역에 기반해 기존보다 더 다양한 보도사진의 플랫폼을 총체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여성 혹은 논바이너리(성소수자) 출품자를 위한 세부적인 장치도 마련됐는데, 한마디로 다양성을 위해 개편된 심사방식이었다. 글로벌 수상작은 올해의 세계보도사진상, 스토리, 장기 취재, 그리고 오픈 포맷 등 총 4개 분야에서 선정됐다. 130개국 4000명 이상의 보도사진가가 찍은 6만여 점의 사진이었다.

앰버 브래컨의 ‘캠룹스 기숙학교(Kamloops Residential School)’ 이외의 수상작들은 다음과 같다. 대형 산불을 예방하는 호주 원주민 나워드데켄족의 전통 방식을 사진에 담은 매튜 애봇의 ‘불로 숲을 구하다(Saving Forests with Fire)’가 스토리 부문을 수상했고, 장기 취재 부문에서는 브라질 아마존의 환경 파괴와 원주민들의 삶을 10년이 넘도록 사진에 담은 랄로 데 알메이다의 ‘아마조니안 디스토피아(Amazonian Dystopia)’가 선정됐다. 올해 처음 마련된 오픈 포맷 부문에서는 남미 식민 지배에서 비롯된 단작 농업의 확산으로 품종 다양성을 상실해가는 현상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은 ‘피는 씨앗이다(Blood is a Seed)’를 제작한 이사도라 로메로가 수상했다. 레나 어펜디 글로벌 심사위원장의 전체 심사평은 다음과 같다.

“글로벌 수상작들의 사진과 이야기는 서로 연결돼 있다. 네 개의 수상작들은 발전에 대한 인류의 맹신으로 우리 지구가 겪고 있는 재앙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풀어냈다. 수상작들은 기후위기의 절박함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결할 방법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불로 숲을 구하다> 오스트리아 서부 아넘랜드의 나와데켄족 원주민이 산불을 예방하기 위해 덤불에 불을 붙이고 있다. 2021년 5월3일. / 매튜 애보트(World Press Photo via  AP)

<불로 숲을 구하다> 오스트리아 서부 아넘랜드의 나와데켄족 원주민이 산불을 예방하기 위해 덤불에 불을 붙이고 있다. 2021년 5월3일. / 매튜 애보트(World Press Photo via AP)

나는 이제 어펜디의 심사평이 적절한지 살펴볼 것이다. ‘캠룹스 기숙학교’는 북미 대륙에서 벌어진 19세기 원주민 동화정책의 부끄러운 민낯에 대한 참회의 기록이고, ‘아마조니안 디스토피아’는 남미에서 현재 진행 중인 열대우림 파괴와 인디언의 삶을 추적한 사진들이다. ‘불로 숲을 구하다’와 ‘피는 씨앗이다’는 환경 및 자연생태의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토착민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12년 동안 슬픈 열대의 모습을 기록한 랄로 데 알메이다의 이야기를 좀 더 찾아봤다. ‘세계의 허파’라는 고리타분한 말처럼 그렇게 진부하게만 알고 있었던 아마존의 현재 모습 말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시도는 시작하자마자 좌절됐다. 열대우림 아마존의 정확한 모습은, 어느 누구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존 최후의 부족>을 쓴 몬테 릴은 아마존이 브라질, 페루 등 9개 국가에 걸쳐 있고, 그것의 경계는 말하는 주체마다 상이하다고 말한다. 가령 아마존의 면적은 마크 런던과 브라이언 켈리의 책 <숲 그리고 희망>에는 650만㎢, 열대우림 정보 사이트(www.rainforests.mongabay.com)에는 824만㎢, 앤드루 레브킨의 저서 <불타는 계절>에는 936만㎢로 적혀 있다.

정확한 규모조차 모르는 마당에 아마존에 얼마나 많은 원주민이 살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아마존을 조사했던 20세기 초, 그곳의 원주민들은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를 찾아 나선 개척자들은 토착민의 땅을 파헤쳤고 금맥이 바닥나자 숲을 밀어버리고 사탕수수와 커피를 재배했다.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브라질의 아마존은 정권을 누가 거머쥐었냐에 따라 숲과 강의 파괴 속도가 달라졌다. 알메이다가 기록한 ‘아마조니안 디스토피아’ 중 한 장면은 아마존 횡단 고속도로인 트랜스 아마존 하이웨이에 세워진 빌보드 광고판에 등장하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사진을 보여준다. 아마존 개발을 지지하는 농부와 목축업자들이 세운 광고판이다.

<아마조니안 디스토피아(Amazonian Dystopia)> 트랜스 아마존 하이웨이에 아마존 개발을 추진하는 브라질 대통령을 지지하는 농업 및 목축업자들이 세운 광고판. 2020. 7. 20. / 랄로 데 알메이다(World Press Photo via AP)

<아마조니안 디스토피아(Amazonian Dystopia)> 트랜스 아마존 하이웨이에 아마존 개발을 추진하는 브라질 대통령을 지지하는 농업 및 목축업자들이 세운 광고판. 2020. 7. 20. / 랄로 데 알메이다(World Press Photo via AP)

아마존을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타고 이주한 이방인들과 서구 문명은 숲과 강에 의존하는 원주민들의 삶과 충돌했다. 싸움에서 진 쪽은 죽거나 보호구역으로 내쫓겼다. 2013년 알메이다는 어디론가 떠나는 인디언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바퀴 달린 대형 여행용 가방, 돌돌 말린 매트리스가 실린 손수레, 청바지와 반바지, 운동화와 슬리퍼, 노출된 상반신에 새겨진 문신, 어깨에 화살을 둘러멘 인디언들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도대체 이들의 복장은 왜 이런 모양새일까? 인디언들을 몰아낸 카우보이의 청바지를 입은 원주민들이라니…. 사진가의 캡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벨로 몬트 댐 건설을 반대하는 문드르크족 인디언들이 수도 브라질리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다.’

<아마조니안 디스토피아(Amazoina Dystopia)> 아마존강 지류인 브라질 알타미라 싱구강에 건설 중인 벨로 몬트 수력댐. 2013년 9월3일. / 라울 데 알메이다(World Press Photo via AP)

<아마조니안 디스토피아(Amazoina Dystopia)> 아마존강 지류인 브라질 알타미라 싱구강에 건설 중인 벨로 몬트 수력댐. 2013년 9월3일. / 라울 데 알메이다(World Press Photo via AP)

벨로 몬트 댐은 2019년 아마존강 남동 지류인 싱구강에 준공된 초대형 수력 발전시설이다. 사진가 알메이다는 댐 건설에 반대하며 싱구강 유역에 홀로 사는 베네디토 발라오라는 한 노인을 만났다. 4년 동안 투쟁을 이어가던 발라오는 2013년 보상금을 받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1년 후 발라오는 싱구강으로 돌아왔다. 향수병에 걸린 발라오는 싱구강 유역에서 야영을 하며 고통을 달래고 있었다. 우울증을 앓던 발라오는 결국 사망했다. 12년 동안 아마존 개발을 지켜본 사진가 알메이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환경과 사회 문제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삼림 파괴율이 높은 마을일수록 빈곤율도 높다. 둘은 완벽하게 연결된 현상이다. 가난, 폭력, 환경 오염, 그리고 삼림 파괴라는 문제 말이다.”

<아마조니안 디스토피아(Amazonian Dystopia)> 브라질 아마조나스주 후마이타의 피라하 부족민들이 과자와 음료수를 구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2016년 9월 21일. / 라울 데 알메이다(World Press Photo via AP)

<아마조니안 디스토피아(Amazonian Dystopia)> 브라질 아마조나스주 후마이타의 피라하 부족민들이 과자와 음료수를 구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2016년 9월 21일. / 라울 데 알메이다(World Press Photo via AP)

아마조니안 디스토피아 Amazonian Dystopia, 2013년 6월14일. / 라울 데 알메이다(World Press Photo via  AP)

아마조니안 디스토피아 Amazonian Dystopia, 2013년 6월14일. / 라울 데 알메이다(World Press Photo via AP)

아마조니아(Amazonia)는 아마존강 유역을 말하며, ‘아마조나스(Amazonas)’라고도 한다. 나는 지금 알메이다가 2016년에 찍은 아마조나스의 파라하족 인디언 소녀들의 사진을 보고 있다. 캡션에는 ‘과자와 음료수를 얻기 위해 고속도로를 지나는 운전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라고 적혀 있다. 유독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일까? 사진 가운데의 소녀는 두 손을 포개며 시선을 떨구고 있다. 사진을 보는 나의 시선은 소녀의 낡은 드레스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래, 저 드레스였구나! 캐나다 원주민 기숙학교 캠룹스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던 붉은 드레스 말이다.

2022년 세계보도사진전 글로벌 심사위원장 레나 어펜디의 총평은 매우 적절했다. 네 개 분야의 수상작들은 모두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다. 낡은 드레스를 입은 남미 아마조니아의 인디언 소녀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북미 원주민 어린이들을 추모하는 붉은 드레스. 캠룹스 기숙학교 너머에 뜬 무지개를 아마조니아의 하늘에서도 기대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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