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시대…과학·인문학 간극 꿰뚫는 ‘인간의 가치’를 묻는다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1) 변하지 않을 인간의 고유한 가치

이미지를 생성하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인 DALL-E에 뉴턴과 셰익스피어의 만남을 표현해달라고 의뢰했더니 나온 이미지다. C P 스노는 1959년에 이미 과학기술 문화와 인문학 문화 사이에 통용되는 언어가 줄어들고 있음을 우려했다.

이미지를 생성하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인 DALL-E에 뉴턴과 셰익스피어의 만남을 표현해달라고 의뢰했더니 나온 이미지다. C P 스노는 1959년에 이미 과학기술 문화와 인문학 문화 사이에 통용되는 언어가 줄어들고 있음을 우려했다.

철학적 성찰 결여한 기술 발전의 문제 갈수록 심각…
교육·노동 등의 영역에서 인공지능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지향점 찾아야

‘발견하다’ ‘수집하다’ ‘읽고 쓰다’ ‘소통하다’라는 동사를 기준으로
시간 흐름 뛰어넘는 인류의 ‘아이겐밸류’ 찾기 여정 시작

인문학자는 종종 시간을 잊고 사는 듯한 인상을 줄 때가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많은 변화들이 넘어오지 못할 만큼 인문대학의 담장이 높은 것은 아닐 텐데, 그렇다고 해서 과학기술 및 산업계에서 매년 발표하는 메가트렌드에 견줄 만한 어떤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문학에도 학문의 흐름이란 것이 있어서, 최근 역사가들 사이에 거대사(Big History)를 쓰는 경향이 늘어난 것과 같이, 다소간의 유행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다만 다수의 인문학자들은 “인문학 최신유행”이라는 말을 상당히 거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들 대부분이 “무언가 유망하다, 뜨는 일자리가 될 것이다, 점점 더 각광받을 것이다” 등 이런 형용이 어울리지 않는 대상들에 대한 탐구를 지향한 탓 때문일 것이다.

서양고전을 연구하는 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2000년도 더 된 오래된 불멸의 작품들을 연구하는 마당에 1~2년의 짧은 호흡을 갖는 변화들에 다소 둔감해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때도 있을 정도였다. 고전은 기원 자체가 시간을 초월한 영원성을 지향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전의 영원성을 붙잡으려 할수록 오늘날 우리가 분투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고전이라면 마땅히 깊은 통찰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당위를 마주하기도 했다. 그래서 시대를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시대마다 고유한 문제들에 탁월한 시선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이중적인 기대를 고전에 투영하고 씨름하곤 했다.

지금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대를 안고 고전을 펼친다. 다소 막연하고 두루뭉술한 이 기대들을 예리하게 분해해서 정확히 무슨 문제를 고전으로부터 풀고 싶은지를 밝혀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 중 아마도 공통적으로 가장 시급하고 긴밀하게 관여해야 할 문제는 인공지능(AI)과 인간의 지능 간 차이가 점점 더 좁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고유한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이 질문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다. 예를 들어 교육의 영역에서는 인공지능 시대에 사람을 교육한다는 것은 어떤 새로운 지향점을 가져야 하는가의 물음이 되기도 하고, 노동의 영역에서는 인공지능 로봇과는 차별된 인간의 고유한 노동의 가치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의 질문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이렇듯 인간은 어떤 고유한 가치를 갖는가에 대한 이 질문이 지금 우리 시대 이곳저곳에서 스멀스멀 떠오르고 있는데 우리는 어떤 답을 준비하고 있을까?

나는 이 지면이 펼쳐지는 곳이 경직되고 엄격한 학술회의장이기보다는 차를 한잔 마시면서 생각을 나누는 잔잔한 정경을 갖춘 곳이리라 예상한다. 이런 유연한 성격에 기대어 감히 주제넘게 오늘의 인문학에 대해 진단을 해보자면, 인문학은 정작 인간에 대한 탐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지가 꽤 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흔히 말하듯이 인문학은 인간이 남긴 무늬를 탐구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인간이 가진 생각과 감정을 데이터로 수집하는 것이 오늘날에도 이토록 어려운데, 하물며 그 옛날에는 인간이 남긴 무늬를 탐구하는 것만이 인간을 이해할 유일한 시작점이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남긴 무늬가 때로 너무 아름답다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어느덧 인문학은 정작 그 무늬를 남긴 인간의 고유한 능력에 대한 탐구를 잊고, 그 아름다운 무늬 자체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가끔 나는 인문학자의 작업이 위대한 문필가, 역사가, 철학자들이 남긴 유산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보존하고 관리하는 박물관에서의 일로 치환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 인간에 대한 탐구는 전적으로 멈추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인문학이 신학의 대립항으로 인간을 연구하던 인간학으로서의 지위를 잃어가는 동안, 인간에 대한 탐구는 인간에 대한 자연과학적 이해 혹은 사회과학적 이해로 번져 나갔다. 인간을 뜻하는 그리스어 안트로포스를 인류학(안트로폴로기)이 선점했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크게 애석한 일이다. 키케로의 말마따나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는, 그래서 자연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인간에게로 향했던 소크라테스가 환생한다면, 그는 정작 자신이 남긴 사상에 심취해 있는 인문대학이 아니라 사회과학대학의 심리학과나 정치학과 혹은 경제학과에서 오늘날의 인간에 대해 새로 연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은 참 묘한 존재다. 우리는 2000년 전 소포클레스 작품 속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감정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20년 전 드라마 속 인물들의 촌스러운 말투에는 기겁을 한다. 그만큼 인간은 한결같으면서도 또 매일매일 변화하는 존재다. 결국 과거를 향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현재와 미래의 인간에 대해 적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가 오늘날 인문학이 고민해야 할 지점일 것이다.

과거를 향한 인문학의 탐구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시선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 하나 있다. 기술발전의 속도와 그 발전하는 기술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속도의 격차를 줄이는 일이다. 편의상 전자를 기술의 속도라 하고 후자를 철학의 속도라 해보자. 지성사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폴리매스(Polymaths·박식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이 두 속도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았다. 과학기술을 만든 사람과 또 그 기술에 대해 성찰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거나 상호 교류가 잦은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의 급격한 진보는 점점 더 두 속도의 엇박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과학기술 분야와 인문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게 된 때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59년 이전이다. 그해에 C P 스노가 그 유명한 ‘두 문화(Two Cultures)’ 강연을 통해 과학기술의 문화와 인문학의 문화 사이에 통용되는 언어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열역학 제2법칙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두 문화의 간극은 지난 80년 동안 더욱 가속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철학적인 성찰을 결여한 기술의 무분별한 발전이 가져올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염려하면서 분주하게 대책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일례로, 사모펀드 회사 블랙스톤을 운용하는 스티븐 슈워츠만 회장이 르네상스 이후 옥스퍼드대에 대한 최대 기부라는 2000억원 기금을 마련하여 옥스퍼드 인문학을 위해 슈워츠만 센터를 짓고자 한 것도 인공지능에 이끌려가지 않고 기술의 진보를 발전적으로 이끌고 나가기 위함이었다.

인문학자가 탐구해야 할 인간은 문학이나 역사 속 박제된 인간뿐 아니라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이기도 하다. 문제는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있던 인간이 HMD(머리 착용 디스플레이)를 쓰고 가상현실을 누비고 있으며 챗GPT를 통해 전문가들도 구별하지 못할 지식을 손쉽게 생산해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간을 탐구한다는 말은 이 기술의 그물망 속에서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문학자가 살펴봐야 할 지점들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는 뜻이다. 인문학자가 이 노력을 게을리하는 순간, 도시에는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나보다 더 나를 잘 안다는 식의 전설이 떠돌아다닌다. 과연 얕은 수준의 알고리즘이 나의 취향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가?

보통은 이 지점 즈음에서 ‘인간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물음은 여러 학문 분야의 협업을 기반으로 한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라는 진단을 내리고 다학제적 융합을 촉구하며 글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용감하게도 20회의 연재를 이 지점에서 시작하고 싶다. 앞으로 여러 학자들이 함께 경주해야 할 노력의 청사진을 그리는 일환으로 한 걸음만 더 내딛고자 한다. 고민 끝에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찾는 이번 기획연재의 제목을 ‘아이겐밸류’라고 이름붙였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용어일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 핵심기술의 수학적 근간을 이루는 선형대수학에서 아이겐밸류는 행렬 변환 후에도 변화 없이 그 자신으로 남는 고유 벡터의 고윳값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공지능의 파고가 모든 이들에게 다양하게 다가오겠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인간의 고유한 것이 무엇이겠는가를 탐색하려는 뜻으로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인간의 고유한 것으로서의 아이겐밸류는 여러 영역에서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역발상이 가장 많이 요구되는 예술창조의 영역일 수도 있고, 따뜻한 정서적 소통이 중요한 관계맺음의 영역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지금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지적능력에 대한 것이다. 더 좁혀서 말하자면 라틴어로 스키엔티아(Scientia)라고 말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앎을 얻는 인간의 고유한 지적능력을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이 선택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일원으로서 대학은 어떻게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것과는 차별화된 지적훈련을 제공할 수 있는가란 실제적인 필요와 맞닿아 있다.

인간의 고유한 지적능력으로서의 아이겐밸류를 찾기 위해, 고전과 지성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나는 거친 구분이긴 하지만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나누어 인간 지식의 획득과 공유의 근간을 이루는 4개의 동사를 재서술하고자 한다. 발견하다, 수집하다, 읽고 쓰다, 소통하다.

이 구분과 접근법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는 앞으로의 연재를 통하여 독자 여러분 각자가 평가해 볼 일이다. 다만 오늘 나는 이 연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이 착수가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밝혀 두고자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입을 잠시 빌리고자 한다. 윌슨은 인간을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한 시대를 완전히 졸업하지 못하고 각 시대의 잔재들을 흡수하여 진화하는 키메라로 그려냈다. 그래서 그가 인간을 여전히 구석기시대적 감정을 가졌으며, 중세의 제도를 이어받은, 신과 같은 뛰어난 기술을 활용할 줄 아는 존재로 묘사했을 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연속된 흐름에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적어도 나는 고대와 현대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인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이 불필요하게 분절되어 있다는 점에서 윌슨의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고, ‘발견하다’ ‘수집하다’ ‘읽고 쓰다’ ‘소통하다’라는 동사를 기준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한 사이클을 반복적으로 순환하여 살펴보려는 이 연재의 접근법의 근거로 삼고 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지적능력을 찾아나서는 이 여정 또한 독자들의 지적 투자가 필요할 텐데, 2주 간격의 연재 특성상 지난 회차의 이야기가 다음 회차를 이야기할 때쯤 어느 정도 독자들의 기억에서부터 잊혀져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 지난 이야기를 잊더라도 개의치 마시라. 소실과 망각은 우리가 지성사의 구석구석을 더듬을 때마다 늘 자연스럽게 겪는 일이다. 필자의 글에서, 기억할 가치가 있는 말만, 혹여 그런 것이 있긴 하다면, 독자들의 머릿속에 남기를 바란다.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인공지능의 시대…과학·인문학 간극 꿰뚫는 ‘인간의 가치’를 묻는다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수학, 서양고전, 과학사를 공부하였다. 카이스트에서 수행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상호 발전에 대한 연구 및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디지털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과학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학 및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발전 및 혁신 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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