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권력 양날개···실로키비와 올리가르히 흥망사

임지선 기자

크렘린 장악한 KGB의 ‘실로비키’

정권 비호 속 급성장한 신흥 재벌

러시아를 움직이는 정경유착 세력

2000년 5월 거행된 대통령 취임식에서 연회장을 걸어들어가는 푸틴. 열린책들 제공

2000년 5월 거행된 대통령 취임식에서 연회장을 걸어들어가는 푸틴. 열린책들 제공

푸틴의 사람들

캐서린 벨턴 지음·박중서 옮김 | 열린책들 | 880쪽 | 4만8000원

‘국제적 지탄받는 전쟁 수행’, 그럼에도 ‘80%에 가까운 지지율’ ‘24년째 장기 집권’ ‘종신 집권 가능’. 이 모든 수식어는 단 한 사람을 향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옛 소련 첩보기관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 21세기에 정치제도로 뒷받침받고 국민적 지지도 얻는 푸틴의 권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캐서린 벨턴 로이터통신 기자가 쓴 <푸틴의 사람들>(원제: Putin’s People)은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말까지 촘촘히 들여다본 책이다. 저자는 과거 파이낸셜 타임스의 모스크바 특파원 등으로 16년간 러시아에 체류하면서 얻은 인터뷰 기록을 엮어 푸틴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소설처럼’ 그려나간다. ‘포섭의 달인’이었다는 KGB 시절 활약, 크렘린 해외자산부 책임자에서 행정 부시장, KGB의 후신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수장 등으로 푸틴의 이력이 수직 상승한 이야기, 검은돈 네트워크와 의문으로 점철된 사건들을 파헤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의 연결 지점도 짚는다.

1999년의 마지막날, 옐친(오른쪽)은 대통령 직위를 푸틴에게 넘겨줬다. 열린책들 제공.

1999년의 마지막날, 옐친(오른쪽)은 대통령 직위를 푸틴에게 넘겨줬다. 열린책들 제공.

책은 런던으로 도피한 러시아 은행가 세르게이 푸가체프가 푸틴의 두 딸과 당시 아내와 찍은 낡은 사진첩을 들춰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메즈프롬방크의 공동 설립자였던 그는 옐친가 사람들과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며 막후 실세 자리를 유지해온 인물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푸틴을 옐친에게 천거한 사람이기도 하다. 푸틴 집권 첫해 그의 가족을 위해 식기를 사는 등 5000만달러를 지출하고 ‘푸틴의 금고지기’로 불린 그는 ‘크렘린’의 눈 밖에 나면서 푸틴의 ‘희생자’가 됐다. 운영하던 은행은 파산했고, 그의 조선소는 사실상 국가에 몰수됐다. 푸가체프는 저자와 인터뷰하기 전날 영국에 신변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푸틴의 이너 서클 중에서도 최초로 몰락한 ‘실로키비’이자 ‘올리가르히’이다.

저자는 푸틴과 그의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실로키비’와 ‘올리가르히’ 두 집단을 따라간다. ‘실로키비’는 푸틴의 이너 서클로 주로 크렘린 행정실의 고위직을 맡고 있다. 핵심 세력은 KGB와 같은 정보기관과 경찰 출신들이다. ‘올리가르히’는 소련이 붕괴되고 자본주의로 가는 시점에 국영 자산을 헐값에 사들이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재벌이다. 소수의 올리가르히는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러시아 경제를 좌지우지한다. 이 과정에서 조금만 푸틴 정부와 다른 말을 하는 순간, 망명할 처지에 놓이고 탄압을 겪는다. 일부는 의문사를 당한다. 언론 재벌도 쉽게 제거된다.

푸틴은 집권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KGB 출신들과 함께했다. 일각에선 이를 친서방적인 옐친에게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지만 KGB 사람들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나머지 모두를 압도했다고 기억한다. “이들의 세계관이 냉전 논리로 기울어져 있고, 점차 그런 세계관이 푸틴을 규정하고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체첸공화국에서 벌인 전쟁으로 푸틴은 대통령에 올랐고, 이로써 FSB 수장이었던 파트루셰프(오른쪽)이 주도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실로비키’, 즉 무력보유자들의 대두가 보장됐다고 말한다. 열린책들 제공

저자는 체첸공화국에서 벌인 전쟁으로 푸틴은 대통령에 올랐고, 이로써 FSB 수장이었던 파트루셰프(오른쪽)이 주도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실로비키’, 즉 무력보유자들의 대두가 보장됐다고 말한다. 열린책들 제공

저자는 푸틴과 그의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실로키비’와 ‘올리가르히’ 두 집단을 따라간다. ‘실로키비’는 푸틴의 이너 서클로 주로 크렘린 행정실의 고위직을 맡고 있다. 핵심 세력은 KGB와 같은 정보기관과 경찰 출신들이다. ‘올리가르히’는 소련이 붕괴되고 자본주의로 가는 시점에 국영 자산을 헐값에 사들이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재벌이다. 소수의 올리가르히는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러시아 경제를 좌지우지한다. 이 과정에서 조금만 푸틴 정부와 다른 말을 하는 순간, 망명할 처지에 놓이고 탄압을 겪는다. 일부는 의문사를 당한다. 언론 재벌도 쉽게 제거된다.

푸틴은 집권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KGB 출신들과 함께했다. 일각에선 이를 친서방적인 옐친에게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지만 KGB 사람들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나머지 모두를 압도했다고 기억한다. “이들의 세계관이 냉전 논리로 기울어져 있고, 점차 그런 세계관이 푸틴을 규정하고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푸틴이 본격적으로 정치 행보를 시작하던 시절 잇달아 발생한 수상쩍은 사건도 거론한다. 1999년 9월 모스크바 아파트 등에서 잇단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해 300여명이 사망했다. 크렘린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던 체첸인들이 배후로 지목됐다. 옐친을 대신해 대통령 업무를 대행하던 푸틴 총리는 체첸에 공습을 가한 행동파 영웅으로 급부상했고, 이듬해 대통령이 됐다. 이 사건은 푸틴을 대통령 자리에 올리려는 푸틴 사람들이 벌인 자작극이라는 의혹이 일었다. 당시 이 사건을 용감하게 수사해 범인 몽타주가 FSB 요원과 닮았다고 말한 전직 대령은 체포됐고, 몽타주는 체첸인의 것으로 교체됐다고 저자는 전한다.

푸틴 집권 후 석유 가격이 급등해 석유 산업에서 추가 세금을 걷을 방법을 발표하자 의회가 이를 저지했던 일이 있다. 크렘린은 석유 재벌 미하일 호도르콥스키가 배후에 있다고 봤다. 호도르콥스키는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2004년 여름 진행된 가스프롬 산하의 작은 보험회사 소가스 지분 매각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지분 매입자는 방크 로시야와 연계된 무명의 회사들. 방크 로시야는 과거 공산당의 자금처였고, KGB와 연관되는 은행이다. 통상적인 국가자산 매각 시 수반되는 정부 관료들의 의논은 전혀 없었다. 예고도 없이 조용히 증권거래소에서 지분 교환이 일어난 것. 전직 에너지 차관은 “우리로선 그런 일을 논의한 적이 결코 없다”고도 했다.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푸틴의 전략적 (그리고 개인적) 필요에 따른 대규모 ‘옵스차크’, 즉 돈주머니 형성의 시작”이라고 표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푸틴의 사람들인 KGB 관련자들은 하나씩 더 넓은 경제 구역을 담당하게 됐다. ‘크렘린 주식회사’의 시작이었다.

한때 러시아에서 가장 부자였던 호도르콥스키(왼쪽)와 그의 가장 가까운 부하 레베데프가 2005년 사기와 세금 포탈 혐의로 재판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열린책들 제공

한때 러시아에서 가장 부자였던 호도르콥스키(왼쪽)와 그의 가장 가까운 부하 레베데프가 2005년 사기와 세금 포탈 혐의로 재판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열린책들 제공

책을 읽다보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하나로 힘을 합쳐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거기서 한 치라도 벗어나면 추락시키는 흐름은 박정희·전두환이라는 권위주의 정권의 행태와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푸틴의 ‘돈주머니’ 이야기 대목에선 최근 ‘할아버지의 비자금’을 폭로한 전우원씨 발언도 떠오른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KGB를 제외하면) 일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푸가체프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의 비극’을 말한다. “러시아의 지배 엘리트 내에는 여전히 KGB가 곳곳에 있었다.”

전쟁 중인 푸틴과 그의 주변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지금 당장 국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푸틴의 건강 이상설은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 종신 집권이 가능해진 상태지만 세월이 흘러 어느 순간 그도 물러날 때가 오게 마련이다. 푸틴이 물러나면 러시아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이 물음의 답은 푸틴이 어떻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지, 그를 만든 러시아의 세력들은 누군지 짚다보면 찾을 수 있다. 두꺼운 ‘벽돌책’에 주목하는 이유다. 당사자들의 증언과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내용은 880쪽이라는 두께가 주는 압박감에 비해 쉽게 읽힌다.

책은 더 타임스,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 타임스 등이 선정한 ‘2020년 올해의 책’으로 뽑힐 정도로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현존하는 인물과 기업의 실명이 거론되면서 명예훼손 소송이 잇따라 제기되기도 했다.

푸틴의 사람들. 열린책들 제공

푸틴의 사람들. 열린책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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