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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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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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서 ‘만포농산’까지…황윤미씨가 사는 법

추석을 앞둔 지난 21일 황윤미·정병우씨 모자가 경북 영주 ‘만포농산’에서 고추장·된장·간장이 익어가는 1000여개의 항아리 사이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재료부터 깐깐하게 고른 후 자연발효와 항아리 숙성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모자는 “맛과 건강에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성일 선임기자 centing@kyunghyang.com

추석을 앞둔 지난 21일 황윤미·정병우씨 모자가 경북 영주 ‘만포농산’에서 고추장·된장·간장이 익어가는 1000여개의 항아리 사이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재료부터 깐깐하게 고른 후 자연발효와 항아리 숙성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모자는 “맛과 건강에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성일 선임기자 centing@kyunghyang.com

통금 해제 후 첫 뉴스보도 CBS에 연결…NYT 기자가 듣고 세계 타전
한겨레서 일간지 최초 여성 광고부장, 광고주에 주눅 들지 않고 꽤 성과
언론 후배, 옳다고 판단되면 그 길로 가라…최소한 그들 옆에 서 있으라

귀농 후 문화적 차이로 적응에 어려움…‘제발 입 다물게 해주세요’ 기도
20년 이상 ‘장’ 빚어…명절 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바빠
아들 정병우씨와 자연발효와 항아리 숙성 고집…맛 균일화 위해 노력

우리 선조들은 ‘음식 맛은 장맛’이라고 했다. 그만큼 장(醬)을 정성껏 담그고 관리했다. 각종 인스턴트 장들이 식탁에 오르는 요즘, 무첨가 자연발효로 항아리 숙성을 고집하는 업체가 있다. 경북 영주의 ‘만포농산’이다. 숲속에 자리한 이곳 1000여개의 항아리 속에서 우리 전통의 방식으로 빚은 간장, 된장, 고추장이 익어가고 있다. 먹는 이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상품명을 무량수(無量壽·영원한 생명)로 지었다. 일반 가정은 물론, 국내 유일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모수’를 비롯해 2스타 ‘주옥’ 등 유명 식당 셰프들이 식재료로 사용한다.

만포농산의 1대 안주인은 황윤미씨(72)다. 1997~1998년 무렵, 풍년으로 가격이 폭락해 고추를 땅에 묻어버리기까지 하는 상황에서 친정어머니가 해주던 전통의 방식으로 고추장을 만들었다. 남편 정대수씨는 그것을 작은 옹기에 담고 새끼줄로 묶어 지인 100명에게 보냈다. 대박이 났다. 입소문 덕분에 부부는 겨울부터 된장을 추가하고 2001년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2019년 8월 오랜 지병으로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들 병우씨(46)가 가업을 잇고 있다. 병우씨는 제일기획 자회사로 디지털 마케팅회사인 제일펑타이 광저우 법인장을 지내다 한국 전통 장류도 세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아버지 뒤를 이었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자연에 묻혀 장을 빚어왔지만, 황씨의 전력은 특별하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소속으로 박정희 군부독재의 언론탄압에 맞서다 1975년 강제해직됐다. 앞서 그해 3월17일 당국과 동아일보 사측의 동아투위 강제진압 당시 전화선이 모두 끊긴 상태에서 기지를 발휘해 이 사실을 외부에 처음으로 알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제1회 이용마 기자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추석을 앞둔 지난 21일, ‘장 익는’ 만포농산에서 황윤미·정병우씨 모자를 만났다.

경북 영주에서 아들 정병우 대표와 함께 전통식품 제조업체 ‘만포농산’을 운영하고 있는 황윤미씨가 지난 21일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경북 영주에서 아들 정병우 대표와 함께 전통식품 제조업체 ‘만포농산’을 운영하고 있는 황윤미씨가 지난 21일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 명절이 목전에 뒀으니, 지금이 가장 바쁜 시기겠어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바쁘죠(웃음). 그런데 예년에 비해 주문량은 많이 줄었어요. 1인 가구 증가나 외식문화 확대 등으로 가정에서 밥을 안 해먹기 때문이에요. 예전에는 한 번에 고추장 600g~1㎏씩 구매하던 분들이 지금은 300g이나 그 이하를 주문하세요. 선물 문화도 많이 사라졌고요. 그래서 손은 더 많이 가고 매출은 줄고 있어요(웃음).”(황윤미)

- 요즘에는 항아리 대신 스테인리스 스틸 발효조를 사용하거나, 심지어 화학조미료로 감칠맛만 내는 상품도 많다고 해요. 그런데 왜 만포농산은 무첨가 자연발효와 항아리 숙성을 고집하나요.

“균을 넣거나 화학조미료를 넣으면 맛을 내기는 쉽지만, 그러면 공장에서 만드는 제품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맛과 향이 다른 다양성이 전통장의 매력 중 하나거든요. 항아리 숙성을 고집하는 이유는 장에 사용되는 균류가 호기성(산소를 좋아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에요. 아무래도 공기가 잘 통하는 항아리가 숙성에 가장 적합하다고 믿거든요.”(정병우)

- 자연발효로 만들면 농산물 품질이나 기후의 영향으로 해마다 장맛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심지어 항아리 크기와 위치에 따라서도 맛에 차이가 있어요. 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들 생각은 달랐어요. 무량수라는 이름을 달고 나가는 된장, 고추장이라면 맛과 품질이 균일해야 한다는 거죠.”(황윤미)

“고객들이 ‘올해는 왜 노란 된장이에요?’ 또 어떤 해에는 ‘왜 까만 된장이 왔어요?’ 하시는 거예요. 고민 끝에 우선은 해외 샴페인 회사들이 쓰는 방식을 차용했습니다. 최대한 일정한 맛과 색깔, 농도를 유지하기 위해 2~7년 전 장을 새 장에 섞어주는 거죠. 아울러 보다 과학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메주 발효 시 온도와 습도, 숙성 시 장독 위치별 온도와 습도, 그리고 장독대 표면의 온도 등을 확인한 후 제품상태도 일일히 조사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완성된 장류의 염도와 당도 등 기본적인 맛들도 전부 수치화해 기록 중이고요.”(정병우)

경북 영주에서 전통식품 제조업체 ‘만포농산’을 운영하는 정병우 대표(왼쪽)와 어머니 황윤미씨가 지난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활짝 웃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경북 영주에서 전통식품 제조업체 ‘만포농산’을 운영하는 정병우 대표(왼쪽)와 어머니 황윤미씨가 지난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활짝 웃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무엇보다 황씨의 지난 삶이 궁금했다. 50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이후 문답은 모두 황씨와 주고받은 것이다).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게 1973년인가요.

“그해 가을이었어요. 당시 동아일보사에는 동아일보와 동아방송(DBS), 신동아, 여성동아가 있었어요. 저는 동아방송 아나운서로 입사했죠.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공포됐으니 참으로 엄혹한 시절이었어요. 언론사마다 기관원(중앙정보부 요원)이 상주했고 보도지침이 시달됐어요. 이 기사는 1단으로 내라거나 빼라는 등 시시콜콜 간섭했죠. 말 한마디 잘못하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거나 행방불명될 수 있는 시대였어요.”

-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편집국·출판국·동아방송의 기자와 피디, 아나운서 180명이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 집회를 열고 선언문을 발표했어요. 그게 기폭제가 되어 이틀 만에 서울과 지방의 31개 신문·방송·통신사가 지지 선언문을 채택하고, 유신 반대 성명·집회·시위를 보도한 것으로 알아요.

“바로 전날, 서울대 농대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를 기사화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가 송건호 편집국장, 한우석 지방부장, 박중길 방송뉴스쇼 담당부장을 연행해갔어요. 선배들은 더 이상 묵과하지 않았어요. 편집국에 자유언론실천이라고 세로로 쓴 플래카드를 내걸고 선언문(핵심 내용은 ①외부 간섭 배제 ②기관원 출입 거부 ③언론인의 불법 연행 거부)을 발표한 후 만세삼창을 했어요. 저 역시 선배들의 뜻이 옳다고 생각해 동참했고요.”

정부는 본보기로 광고주들을 압박해 12월16일부터 동아일보에 대한 초유의 광고탄압을 시작했다. 광고가 무더기로 해약되면서 12월26일을 시작으로 무려 212일간 광고란이 백지로 나왔다. 사정은 동아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전국 각지에서 독자들의 유료 격려 광고가 쏟아졌다. 그러나 경영진은 유신권력에 무릎을 꿇었다. 언론탄압에 맞서 제작을 거부하며 동아일보 사옥에서 닷새째 농성 중이던 200명 가까운 기자, 피디, 아나운서 등을 3월17일 새벽 수백명의 깡패를 동원해 강제해산시킨 다음 130여명을 해고했다.

- 당시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3층 편집국에선 기자들이, 4층 방송국에선 피디와 아나운서들이 농성 중이었어요. 2층 공무국에서도 23명의 기자들이 신문제작에 꼭 필요한 활자판을 지키며 단식 농성 중이었고요. 낮에는 재야인사들과 지지자들이 사옥 밖에서 우리를 지켜줬어요.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 한승헌 변호사, 강원용 목사님도 통행금지 시간에만 인근 여관에서 잠시 눈을 붙이시다가 다시 나와 매일 지켰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윤전국의 도르래에 바구니를 달아 쪽지에 적어 내리면 구해서 올려주셨고요. 하지만 밤에는 통금 때문에 건물 셔터를 내리고 버터야 했어요. 그런데 3월17일 새벽 2~3시쯤 되니까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 어떤 소리였나요.

“나중에 알았지만 산소용접기로 셔터문을 뜯어내는 소리였어요. 깡패들이 해머와 각목을 든 채 2층 공무국부터 시작해 기자들을 막 두들겨 패면서 4층까지 들이닥쳤어요. 어떤 여자 선배들은 머리채가 잡힌 채 끌려갔어요. 깡패들이 전화선부터 끊고 쳐들어와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는데, 순간 관상대(현 기상청) 핫라인이 생각났어요.”

- 관상대와 바로 연결되는 선인가요.

“다이얼 없이 측면 손잡이를 몇 번 돌린 후 수화기를 들면 관상대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기기가 4층 방송국에 있었거든요. 관상대에선 각 방송사 이름이 적힌 이 기기가 울리면 ‘오늘 날씨는 어떻습니다. 지금 현재 기온은 몇도입니다’ 하고 알려줬어요. 뉴스할 때마다 필요하니까요. 냅다 그쪽으로 달려갔죠.”

- 어떻게 했습니까.

“수화기에 대고 말했어요. 지금 우리가 깡패들에게 습격당하고 있으니 빨리 CBS를 연결해달라고요. 당시 통금이 끝나는 새벽 4시에 가장 먼저 뉴스를 보도한 곳이 CBS였거든요. 놀란 관상대 직원이 CBS와 어떻게 연결하냐고 묻길래, ‘송수화기를 거꾸로 맞대 달라’고 했어요. 그러면 감은 좀 멀어도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니까요. 그런 후 CBS에 ‘지금 동아일보사에 깡패들이 들이닥쳐 농성 중인 기자들을 구타하고 여자들도 끌려가고 있다’고 전했죠.”

- 그게 보도된 거군요.

“CBS 첫 뉴스로 나갔어요. 이걸 뉴욕타임스 기자가 들으면서 전 세계에 타전됐고요. 그래서 저희는 당일 밖으로 끌려나왔지만 날이 밝자마자 외신 기자들이 동아일보사 앞에 포진했어요. 천주교의 도움으로 로마 교황청에서도 저희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고요. 그런데도 국내 다른 언론사에서는 동아일보 사태를 일절 보도하지 않았어요. 취재 자체를 안 했어요.”

경북 영주에서 아들 정병우 대표와 함께 전통식품 제조업체 ‘만포농산’을 운영하고 있는 황윤미씨가 지난 21일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박정희 군부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싸운 동아투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경북 영주에서 아들 정병우 대표와 함께 전통식품 제조업체 ‘만포농산’을 운영하고 있는 황윤미씨가 지난 21일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박정희 군부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싸운 동아투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 그날 어디로 연행됐나요.

“저희가 깡패들에 의해 끌려나온 시간이 오전 6시 정도였는데 일찍 출근하는 분들이 광화문 사거리를 오갔어요. 우리는 생사를 넘나드는데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아무 일도 없는 양 웃으면서 걷는지, 그 장면에 순간 공포가 밀려왔어요. 당신네들 동아일보사 사태 알아요? 우리가 방금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아세요? 그렇게 진짜 묻고 싶을 정도였어요. 당국은 우리를 호송차에 태운 후 수유리부터 하나둘씩 흩어 떨어뜨렸어요.”

- 이후 어떻게 했습니까.

“바로 다시 회사 앞에 모인 후 신문회관(현 한국프레스센터 자리)으로 옮겨 동아투위를 결성하고 싸움을 이어갔어요. 투위 소식지를 만들어 각 언론사를 찾아가고 경찰서 기자실에도 뿌렸어요. 저는 MBC 아나운서실장을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여길 오면 어떻게 하냐, 어쩌라는 거냐’ 하더군요. 회사 안으로 들어가진 못해도 우리는 6개월간 출근해 침묵시위도 벌였어요. 정문 입구에 우리가 일렬로 쭉 서 있으면 우리를 통과해 출근해야 하는 동료들은 고개도 못 들었어요.”

- 회사의 복직 회유에도 흔들림 없이 끝까지 싸운 분들이 113명이죠. 생활은 어떻게 했나요.

“시민들이 보내주시는 성금으로 겨우겨우 버텼던 것 같아요. 우리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곳에 취직할 수도 없었어요. 누가 취직했다 하면 정보부 사람이 쫓아가 해고되도록 만들었어요. 우연히 알게 됐지만 제가 결혼하고 한참 후까지도 동사무소의 제 인적사항에 동아투위라 적혀 있었어요. 그래서 번역 일을 하거나 1976년 한길사를 설립한 김언호 회장처럼 사회과학 출판사를 차리거나 옷장사 또는 부동산중개업을 한 분들도 계셨어요.”

경북 영주에서 전통식품 제조업체 ‘만포농산’을 운영하는 정병우 대표(왼쪽)와 어머니 황윤미씨가 지난 21일 간장·된장·고추장이 담긴 1000여 개의 항아리 사이를 나란히 걷다가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경북 영주에서 전통식품 제조업체 ‘만포농산’을 운영하는 정병우 대표(왼쪽)와 어머니 황윤미씨가 지난 21일 간장·된장·고추장이 담긴 1000여 개의 항아리 사이를 나란히 걷다가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그 시절 남편 정대수씨를 만났다. 부산에서 근무하는 사람과 선을 보라는 말에, 그는 맞선 상대에게 유인물을 부산지역에 뿌려 달라는 부탁을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실제로 그 남자는 황씨가 덥석 안긴 한 아름의 유인물을 기분 좋게 받아갔다. 두 사람은 1976년 화촉을 밝혔다. 이듬해 아들 병우씨가 태어났다. 이후 황씨는 KBS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잠시 일했고, 한겨레 창간준비위원회에 들어갔다. 동아일보·조선일보의 해직기자들이 주축이 돼 ‘국민주 신문’으로 1988년 5월 한겨레가 창간됐다.

- 일간지 최초의 여성 광고부장이었죠.

“저는 처음에 한겨레 초대 대표이사로 모셔온 송건호 선생님의 비서실장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송 선생님이 ‘어떻게 황윤미씨를 내 비서로 부릴 수 있냐’며 펄쩍 뛰셨어요. 그분은 저를 아랫사람이 아니라 민주화를 위해 같이 싸워온 동지로만 생각하신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모두 기자나 피디 출신이다보니 영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광고를 하겠다고 나섰죠. 꽤 성과를 올렸어요(웃음).”

- 여성 광고영업인은 지금도 흔치 않아요. 성과 비결이 뭐였습니까.

“커다란 귀고리를 하고 옷도 굉장히 화려하게 입었어요. 당시 한겨레에서 왔다고 하면 기업 광고담당자들이 피하고 안 만나줬거든요. 그런데 제가 가면 호기심에 들어와 앉으라고 해요. 그렇게 일단 면담을 성공시켰죠. 그분들은 ‘한겨레에 이런 분이 계시냐’고 물어요. 초창기 한겨레에 대한 이미지는 화장실에서 귀신이 ‘빨간 손 줄까, 하얀 손 줄까’ 할 때, ‘한겨레 신문 줘’ 하면 귀신도 도망갔다고 하잖아요(웃음). 거친 투사의 이미지와 너무 다르니까 그분들도 놀라워한 거죠.”

- 당시 영업은 술자리에서 많이 이뤄지던 때인데, 어떻게 버텼나요.

“저는 단 한 번도 술자리에 불려간 적이 없어요. 광고주들도 제가 한겨레 사람이어서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이구택 전 포철 회장, 장병주 전 대우 사장 등 당시 대기업에서 경영진으로 계셨던 남편 친구들의 도움도 영업에 보탬이 됐어요.”

그는 동아투위 출신 그리고 한겨레 소속이라는 자긍심 덕분에 광고주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돌연 아들 병우씨와 함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남편 고향인 영주로 귀농한 것은 1994년이다. 사업이 어려워진 남편이 1990년에 먼저 낙향해 부모님의 사과 과수원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만포농산에서 생산하는 ‘무량수’ 된장과 고추장. 만포농산 제공

만포농산에서 생산하는 ‘무량수’ 된장과 고추장. 만포농산 제공

- 귀농생활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습니까.

“남편이 외로워했고,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들도 강하게 원해 다 정리하고 내려왔어요. 농사일도, 시부모님 봉양도, 매우 보수적이어서 문화적 괴리가 컸던 이곳 분들과 어울리는 일도 쉽지 않았죠. 오죽하면 매일 저의 기도제목이 ‘입 다물게 해주세요’였겠어요. 서울말로 또박또박 제가 의견을 말하는 순간, 나한테도, 상대방에게도 상처가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에요.”

- 사과농사 짓다 우연히 시작한 장 만들기가 본업이 됐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고추장 생산량을 늘리면서 내용물을 옹기 대신 돌려서 닫는 포장용기에 담게 됐어요. 그랬더니 뚜껑이 하늘로 솟구쳐 집 천장 등에 고추장이 범벅이 됐다며 반품요청이 많았어요. 망했구나 했죠(웃음). 속상해하는 제게 마을 어르신이 지나가는 말로 ‘볶으면 되지’ 하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소고기볶음고추장을 생산했는데 인기가 좋았어요. 일반 고추장도 냉동창고에 넣었다가 보내니까, 받고 바로 냉장보관하시면 문제가 없어요.”

남편을 10년간 간병하다 2019년 떠나보낸 후 황씨는 동네에서도 종종 길을 잃곤 했다.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요즘도 언론환경이 좋지 않은데, 언론계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냐고. 돌아온 답은 간명했다. 황씨는 “옳다고 판단되면 그 길로 가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며 “최소한 그 길로 가는 사람의 옆에라도 서 있어달라고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너른 마당 위, 간장·고추장·된장이 담긴 1000여개의 항아리 위로 노랑나비 한 쌍이 팔랑팔랑 춤을 추고 있었다.

박주연 논설위원

박주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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