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박주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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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18일 인천 중구 새얼문화재단 집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지 이사장은 1983년 설립한 재단과 ‘새얼아침대화’ ‘계간 황해문화 발행’ 등 재단의 각종 사업이 흔들림 없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의 힘으로 운영한다’는 창립 원칙을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재단을 운영하면서 단 한 번도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서성일 선임기자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18일 인천 중구 새얼문화재단 집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지 이사장은 1983년 설립한 재단과 ‘새얼아침대화’ ‘계간 황해문화 발행’ 등 재단의 각종 사업이 흔들림 없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의 힘으로 운영한다’는 창립 원칙을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재단을 운영하면서 단 한 번도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서성일 선임기자

“국민은 바다처럼 깨어 있어야…한쪽 치우쳐서는 안 돼
정치하는 사람들은 겸손해야…자만은 스스로 죽는 길
정부, 노조 힘으로 누르지 말고 같이 고민하고 타협해야

죽산, 농림장관 때 농지개혁 주도…북한보다 먼저 성공
서훈 구걸하지 말아야…그건 죽산도 원치 않는 일일 것”

준법투쟁 1호·운수 노동자 퇴직금제 등 노동운동에 족적
‘새얼문화재단’ 정부돈 한 푼 안 받고 시민 힘으로 운영
계간 ‘황해문화’ 창간 30년…죽산 조봉암 기리는 사업도

“나한테 들을 이야기가 뭐가 있다고. 하하하….”

지난 18일 인천 중구 새얼문화재단 집무실에서 만난 지용택 이사장(86)은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처음에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지인들까지 동원해 “올해로 창간 30년을 맞은 계간 ‘황해문화’와 죽산 조봉암 선생(1898년 10월29일~1959년 7월31일)의 이야기를 누가 하겠는가”라고 설득한 후에야, 겨우 수락했다. 겸양이 몸에 밴 듯했다.

그는 한국 노동운동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최초의 ‘준법투쟁’을 선보였고, 운수노동자들의 퇴직금 제도를 정착시켰다. 1975년 노동자 자녀를 돕기 위해 ‘새얼장학회’도 만들었다. 1983년 ‘시민의 힘으로 운영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새얼문화재단’으로 확대했다. 인천 토박이인 그가 지역운동·문화운동으로 눈을 돌린 시기다. ‘새얼아침대화’ ‘가곡과 아리아의 밤’ ‘국악의 밤’ ‘새얼백일장’ ‘계간 황해문화 발행’ 등을 수십년째 빠짐없이 이어오고 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을 기리는 사업도 해왔다.

그는 ‘해불양수(海不讓水·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포용해야 함)’와 ‘우공이산(愚公移山·어떤 일이든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루어짐)’이 생활철학이라고 말했다. 그의 지나온 삶과 성취를 드러내는 사자성어가 아닐 수 없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18일 인천시 중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08.18/서성일 선임기자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18일 인천시 중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08.18/서성일 선임기자

- 고교(인천고) 시절 ‘창사회(創思會)’라는 조직을 만들고 학생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압니다.

“나는 1953년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사상계(思想界)’ 세대입니다. 특히 1958년 함석헌 선생이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과 1959년 장준하 선생의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의 백지 권두언에 자극받았지요. 친구들을 규합해 ‘창사회’를 결성한 시기는 고2 때였습니다. 창사회 활동은 대학(경희대 법학과)에 들어간 후에도 이어갔고,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인천 최초로 공회당 앞에서 규탄 전단을 뿌렸지요. 신흥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이권을 서로 나누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청년대회도 열었고요.”

- 그 일로 5·16 직후 혁명 검찰부에 끌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살이를 했다지요.

“그곳에서 <논어> 등 중국 고전을 읽었고, 이승만 정권에서 정치깡패로 이름을 날린 이정재도 만났습니다. 바깥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직접 보니 사내대장부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내가 8사(舍)하(1층)였고, 그가 8사상(2층)이었는데, 이른 아침 교대로 운동하러 나갈 때 수형자들끼리 통방을 하거든요. 3심에서 ‘기각’ 결정을 받은 날, 이정재가 자기 방 수형자들이 마실 물을 항아리에 말없이 떠오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이정재는 1961년 10월1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 4·19 민주화 혁명을 주도한 학생 지식인 중 유일하게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으로 알아요. 왜 노동운동을 선택했습니까.

“학생 때부터 <영국노동운동사>를 탐독했어요. 학교를 중단하고 1963년 자동차노동조합 경기지부를 설립해 노동운동을 시작했지요. 교육선전부장이 내가 처음 맡은 직책이었습니다. 인천에 택시가 스무 대밖에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 정치권의 유혹은 없었나요.

“왜 없었겠어요. 언젠가 이길여 선생(가천길재단 회장)이 ‘정치할 사람이 왜 정치를 안 했느냐’고 묻더군요. ‘실력이 없어서 못했다’고 대답했지요. 무엇보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정당에 들어가면 내 의견이 없잖아요. 그래서 못하겠더라고요.”

- ‘준법투쟁 1호’인 데다, 운수노동자들의 퇴직금 제도를 정착시킨 것으로 유명하더군요.

“도로교통법을 공부하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가령 ‘인천 월미도~서울 용산’ 운행시간을 2시간으로 규정한 것은 경기도입니다. 그런데 학교 앞마다 정차하라거나 낙석 주변에선 시속 30㎞로 서행하라는 규정은 치안본부 소관이었지요. 치안본부가 만든 운행규칙을 일일이 지키면 2시간 만에 용산에 도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천 월미도~서울 용산’ 노선을 운행하던 운수회사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운수노동자들을 탄압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에게 제한속도를 엄격히 지키고 학교 앞마다 정차하는 준법운행을 지시했지요.”

- 허점을 찾아내 공략한 것이군요.

“평소 버스로 2시간 걸리던 거리가 4시간 걸리니까 시민들의 불평이 쏟아졌지요. 운수회사는 운행시간이 두 배로 늘어 수입이 줄었고요. 회사는 노동자들이 태업했다며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벌금 5000원이 부과됐지요. 그래서 정식 재판을 청구했는데, 당시의 판검사는 노조법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내가 법정에서 목소리 높이다가 법정모독죄로 구속됐지요. 정식 재판을 취소해야 석방한다길래 따랐지만, 풀려나서도 준법운행은 계속했습니다. 결국 회사가 백기 들고 임금 인상에 합의했습니다.”

- 퇴직금 제도는 어떻게 정착시켰나요.

“당시엔 교통사고를 내면 보험이 없어서 운전기사를 무조건 구속시켰습니다. 운수회사 사장이 빼냈지요. 그 대신 퇴직금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암묵적인 룰 같은 거였어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찍혀 다른 회사에 취직할 수 없었거든요. 어느 노동자가 회사를 그만두길래 동료 노동자들을 불러모아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퇴직금을 받게 할 테니, 당신들은 그가 재취업할 때까지 돈을 모아 생활비를 지원해달라’고요. 그러고는 사장이 되고 싶어 하는 그 회사의 전무를 찾아갔습니다.”

- 담판을 지은 건가요.

“당시 인천의 운수회사 대다수는 버스 1~3대 정도를 보유한 작은 회사였습니다. 박정희 정권 들어 산업화가 빠르게 이뤄지며 트럭도 나오고 버스와 택시도 증차해야 하는데, 어느 회사에 차를 배정하느냐는 경기도가 결정했습니다. 퇴직금을 주면 전무가 속한 회사가 차를 받을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지요. 사장이 되려면 주주총회에서 표를 많이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성과가 있어야 하니까요. 당시에는 소주주들이 많았는데, 그분들 표를 합치면 사장이 될 수 있었거든요. 설득이 통해 퇴직금 받은 운전기사도 재취업할 수 있게 했지요. 이를 계기로 대다수 운수회사에 퇴직금 제도가 정착됐습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18일 인천시 중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08.18/서성일 선임기자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18일 인천시 중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08.18/서성일 선임기자

- 새얼문화재단의 모태인 ‘새얼장학회’를 1975년 만들었지요. 최초의 재단법인 근로장학회라고요.

“돈이 없어 학교에 못 가는 운수노동자들의 자녀가 많았을 때예요. 노조가 아니라 인천 시민들의 돈으로 꾸린 장학회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 들어갔던가 봅니다. 한국노총 사무총장 자격으로 노조 간부들과 함께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면담할 때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들어서자마자 ‘여기, 재단법인 만든 사람이 누구야?’라고 했어요. 거듭 묻길래 손을 드니 ‘노동자들이 재단 만든 게 정말이야?’라고 세 번을 묻더군요. 그래서 기회다 싶어 말했습니다. ‘각하,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기꺼이 도와주십시오.’”

- 얼마를 주던가요.

“30억원입니다. 지금 돈으로 치면 300억원은 되는 금액이지요. 무역협회 등을 통해 조성한 통치자금에서 주는 것이었습니다. 1977년 9월9일 한국노총 장학재단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당시 신문에는 10억원 규모로 시작한 장학재단으로, 무역협회가 3년에 걸쳐 6억원을 출연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지 이사장은 30억원이 맞다고 말했다).”

- 노동운동하는 후배들에게 “파업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자주 이야기했다죠.

“내가 파업을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당연히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상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상대의 약점과 요구사항을 알아야 원하는 결과나 절충안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파업은 기간이 길어질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 지난해 12월 화물연대 파업을 정부가 압박하자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올라갔습니다. 정부가 나서 노조 또는 노총과 각을 세우는 모습을 자주 보입니다.

“정부가 노조를 힘으로 누르는 것은 잘못하는 겁니다. 같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타협해야지요.”

조찬 포럼의 효시인 ‘새얼아침대화’.  지난 3월15일 쉐라톤그랜드인천호텔 3층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제429회 새얼아침대화에서 지만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미·중 분쟁과 지정학의 시대, 한국 경제의 길”에 대해 강연하기 전 지용택 이사장이 모두연설을 하고 있다. 새얼문화재단 제공

조찬 포럼의 효시인 ‘새얼아침대화’. 지난 3월15일 쉐라톤그랜드인천호텔 3층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제429회 새얼아침대화에서 지만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미·중 분쟁과 지정학의 시대, 한국 경제의 길”에 대해 강연하기 전 지용택 이사장이 모두연설을 하고 있다. 새얼문화재단 제공

그는 1980년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 시행 이후 한국노총 사무총장을 그만두었다. “그해 8월 산별노조 자체가 해산되고 단위노조 체제로 바뀌면서 노조의 힘이 떨어지고 사람을 키우기도 어려운 환경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83년 새얼문화재단을 만들었다. ‘가곡과 아리아의 밤’ ‘국악의 밤’ ‘계간 황해문화 발행’ ‘새얼아침대화’ ‘새얼백일장’ 등 각종 사업을 짧게는 30년, 길게는 48년간 이어왔다. 새얼장학금은 2023년 현재까지 6017명의 학생에게 총 31억1439만1085원을 지급했다.

- 새얼문화재단 창립 당시 ‘시민의 힘으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이유는 뭔가요.

“시민의 재단이 정부나 지자체의 돈을 받으면 주체성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정부로부터는 단 한 푼도 후원받지 않았지요. 인천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뜻을 모아줘서 재단이 지금까지 온 겁니다. 1200명으로 시작한 회원 수가 현재는 1만명 정도 됩니다.”

- 재단에서 월급을 1원도 안 가져간다던데, 어떻게 생활비를 충당합니까.

“어찌어찌 삽니다. 하하하….”

- 지방에서 출간하는 유일한 전국지인 계간 ‘황해문화’가 올해로 창간 30년을 맞았습니다. 종이잡지 시대가 저물었는데, 지방에서 만들면서 지난 30년간 중단 한 번 없이 발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뭔가요.

“내가 시작은 잘 안 하는데, 일단 시작하면 끊지 않습니다. 나는 ‘황해문화’ 창간 7년 전부터 ‘계간 황해문화기금’을 모았습니다. 선후배들을 밤낮으로 찾아다니며 인천이 전국을 커버하는 잡지 하나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지요. 많은 분들이 동참했습니다. 10억원 가까운 돈을 만든 후에야 계간지를 창간했지요. 그렇게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잡지를 제작하면서 창간 취지를 저버리고 의존적이 돼 외부에 휘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을 지켜온 게 장수 비결일 겁니다.”

- 발행인이지만 편집은 전혀 간섭하지 않고, 영업은 홀로 감당한다 들었습니다.

“직원들이 농담으로 나더러 영업부장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기업에 찾아가서 광고 내놓으라고 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웃음). 편집과 관련해 딱 한 번 내가 혼난 적이 있습니다. 2017년 겨울호 제작이 끝난 후 전성원 편집장이 ‘말씀드릴 게 있다’며 ‘이번 호에 최영미 시인의 시를 실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아, 좀 빼지 그랬냐’고 말했지만 어쩌겠습니까. 고은 시인과는 개인적으로 막역해 두고두고 꽤 난처했습니다(당시 실린 최 시인의 시는 고은 시인의 성폭력을 폭로해 파문을 일으킨 ‘괴물’이다).”

‘황해문화’ 발간 30주년 기념 통권 120호(가을호).

‘황해문화’ 발간 30주년 기념 통권 120호(가을호).

- 1986년 시작해 매달 둘째주 수요일 아침 7시에 여는 ‘새얼아침대화’는 조찬 포럼의 효시라더군요. 강사진은 고 리영희·최장집 교수 등 진보논객과 김대중·류근일 보수논객을 넘나들고 재벌 총수와 노총 위원장, 스님과 목사를 아우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동양 고전사상이 대동(大同)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되지요. 단, 정치인은 대선 때를 제외하면 초청하지 않습니다. 대선 후보들은 모두 아침대화 강단에 섰습니다.”

- 하지만 현재 정치권은 이념과 정파에 따라 연일 극한 대립 중이고, 국민들 사이의 분열도 극심합니다.

“정치권의 책임이 큽니다. ‘내 탓이오’ 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정치권에 드뭅니다. 남 탓만 하니까 국민들이 정치권에 대해 자꾸 고개를 돌리는 거지요. 우리는 바다처럼 깨어 있어야 합니다. 비가 아무리 세게 와도 바다를 적실 방법은 없어요. 폭풍이 아무리 거세도 오래 지속하지는 못하지요. 국민들이 어느 한쪽에 치우쳐 흔들리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해불양수(海不讓水)’가 내 생활철학입니다. 또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면 밀어주는 사람이 생기죠. 자만하면 끌어내리려는 사람만 있어요. 스스로 죽어가는 일이지요. 정치하는 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입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18일 인천시 중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08.18/서성일 선임기자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18일 인천시 중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08.18/서성일 선임기자

- 새얼문화재단은 인천 강화 태생인 죽산 조봉암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해왔어요. 추모비와 동상을 만들고 관련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고요. 죽산은 이승만의 정적으로 간첩죄 누명을 쓰고 1959년 7월31일 사법살인을 당했습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이승만기념관 설립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이승만 박사가 6·25 전란을 이겨내는 등 여러 공로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박사의 생각과 공로를 추앙하려면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민간단체가 자발적으로 할 일이지, 정부가 나설 일이 아닙니다. 정부가 하면 각이 생겨요. 이승만 정권의 피해자들도 존재하잖아요. 그러면 반대 목소리가 나오면서 국민통합이 아닌 국민분열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달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이민개혁을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에 빗대면서 농지개혁이 우리 역사를 바꾼 결정적 장면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농림부 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주도한 죽산의 서훈 문제도 해결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감이 있습니다(재심을 통해 2011년 1월20일 대법원은 조봉암에게 간첩 혐의 무죄 판결을 내렸다).

“1948년 초대 내각 인선 때 이승만은 죽산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하면서 그 전제조건으로 죽산의 개혁을 승인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한때 공산당 활동을 했던 죽산에게 지주를 비롯한 기득권층의 반대가 심한 농지개혁을 주도하게 했지요. 죽산은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당시 최대 정치세력인 한민당 김성수의 협력도 결정적 도움이 됐고요. 해방 후 농지개혁에 성공한 것은 먼저 시작한 북한이 아니라 남한입니다. 그러나 서훈에 대한 나의 입장은 서훈을 구걸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건 죽산도 원치 않는 일일 겁니다.”

1937년 항만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인천 사랑’이 유별난 지 이사장은 인천 최초의 자율형사립고인 인천하늘고의 이사장이기도 하다. 인천의 인재들이 고교 진학 시 매년 수백명씩 서울로 빠져나가는 현실을 고민한 끝에 고 이채욱 당시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을 설득해 2011년 이 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정동화 당시 포스코건설 사장에게 부탁해 2015년 역시 자사고인 인천포스코고 설립에도 기여했다. 인천하늘고에 이사장실을 없애고 월급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그는 “지금은 인천에서 서울로 유학 가는 학생들이 없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지금은 비록 남북 간 긴장이 고조돼 있지만, 훗날 통일이 가시화되면 황해와 인천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지중해로서 물적·인적 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주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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