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일진도 범생이도 드래곤볼로 하나 되었죠”

이효상 기자

도리야마 아키라 작가 사망 이후 국내서도 추억·추모 이어져

만화잡지 ‘아이큐 점프’는 1989년 12월 14일 만화 <드래곤볼>의 정식 연재를 시작했다. 일본 만화가 정식 수입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첫 연재 호에는 “이제부터 여러분은 세계 수준의 독자입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아이큐 점프’ 편집장을 지냈던 황경태 고은문화사 대표는 “수입하면서 매국노 소리도 듣고, 가정의 달인 5월만 되면 불량만화 싣는다고 고발도 당했다. 그래도 <드래곤볼>을 들여온 건 잘했다고 생각한다. 국내 만화계에도 경쟁을 촉발했고 분위기를 바꾼 작품이다”라고 했다. 첫 연재본을 보유하고 있는 <드래곤볼> 수집가 ‘테일러’가  사진을 제공했다.

만화잡지 ‘아이큐 점프’는 1989년 12월 14일 만화 <드래곤볼>의 정식 연재를 시작했다. 일본 만화가 정식 수입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첫 연재 호에는 “이제부터 여러분은 세계 수준의 독자입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아이큐 점프’ 편집장을 지냈던 황경태 고은문화사 대표는 “수입하면서 매국노 소리도 듣고, 가정의 달인 5월만 되면 불량만화 싣는다고 고발도 당했다. 그래도 <드래곤볼>을 들여온 건 잘했다고 생각한다. 국내 만화계에도 경쟁을 촉발했고 분위기를 바꾼 작품이다”라고 했다. 첫 연재본을 보유하고 있는 <드래곤볼> 수집가 ‘테일러’가 사진을 제공했다.

[주간 경향] “제가 <드래곤볼> 최신호를 가져가면 공책에 순번을 적었어요. ‘이번 시간은 너, 다음 시간은 너.’ 담배 피우는 무서운 친구들도, 공부만 하던 친구들도 드래곤볼 하나로 즐겁게 지냈어요.”(<드래곤볼> 관련 수집가 ‘테일러’)

만화 <드래곤볼>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1990년대 한국의 소년들은 쉬는 시간마다 교실 한쪽에 삼삼오오 모여 만화잡지 ‘아이큐 점프’에 별책부록으로 실리는 <드래곤볼>을 돌려봤다.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빌려보던 대본소 만화 시대의 문을 닫았고, 만화책을 사서 보는 단행본 만화 시대를 열었다. 만화책에 이은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비디오 대여점을 거쳐 지상파 방송으로도 송출됐다. 힘을 모으는 데 시간이 걸려서 동료가 시간을 벌어줄 때만 쓸 수 있는 궁극의 기술 ‘원기옥’은 ‘목표를 위해 인내한다’는 밈(모방·변조되며 널리 쓰이는 인터넷 유행어)으로 지금까지도 쓰인다. 바깥세상의 하루를 1년처럼 쓸 수 있는 ‘정신과 시간의 방’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시간이 안 간다’는 의미로 활용되는 밈이다.

만화 <드래곤볼>·<닥터 슬럼프>의 아버지 도리야마 아키라 작가가 지난 3월 1일 세상을 떠났다. 만화 <나루토>의 작가 키시모토 마사시는 “만약 정말로 드래곤볼의 소원이 하나 이루어진다면…”이라며 만화에서처럼 그가 부활하기를 바랐다. 만화인들뿐만이 아니다. 중국 정부, 프랑스 대통령, 세계의 명문 프로 스포츠팀들이 추모글을 올렸다.

국내에서도 <드래곤볼>의 추억을 공유했던 드래곤볼 키드들의 추모가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SNS에서는 “내 소년기는 당신이 없었다면 완성될 수 없었을 겁니다”, “왠지 머리에 링(<드래곤볼>에서는 소원을 빌어 부활할 수 있었기에 사람이 죽어도 등장했다. 그들 머리에는 하얀 링이 그려졌다) 달고 나타나실 듯”, “아이들과 제가 모두 좋아했던 <드래곤볼>. 부자가 함께 낄낄거리고 나눠 읽고 보던 작품을 만들어줘 너무 고맙습니다”는 내용의 글이 이어졌다. <드래곤볼>과 인연이 각별했던 이들의 추억을 들어봤다.

특이점 그 자체, <드래곤볼>

황경태 고은문화사 대표는 <드래곤볼>이 한국에 수입돼 연재되던 초창기에 ‘아이큐 점프’의 편집장을 지냈다. 좀처럼 공개석상에 나서지 않는 도리야마 작가와는 별 인연이 없었지만, 일본 만화잡지 ‘소년점프’의 드래곤볼 담당 편집자였던 도리시마 아키히코와는 왕래를 했다. 그에게 직접 들은 숨은 얘기들도 있다. 황 대표는 “<드래곤볼>의 성공에는 편집자의 힘도 컸죠. 당시 우리나라는 편집자가 작가 원고만 받으면 끝이었는데, 일본은 편집자가 작가와 계속 소통을 해요. 사실 드래곤볼은 연재 초반부에 끝나야 하는 작품이었어요. 인기가 별로 없었거든요. 편집자가 기회를 더 달라고 해서 시간을 벌고 아이디어를 낸 게 ‘천하제일무술대회’예요. 그걸로 올라가기 시작했죠. 그래도 <북두의 권>에 밀렸던가, 1등은 못했을 거예요. 애니메이션 기획자하고 편집자하고 작가하고 얘기하면서 나온 게 아주 잔인하고 강한 악당을 만들자는 거였대요. 그게 피콜로였는데, 그러고는 완전히 1위로 올라가죠”라고 했다.

만화의 초반부는 7개를 모으면 소원을 들어주는 돌, 드래곤볼을 찾아 떠나는 손오공의 코믹한 모험 이야기다. 그러나 인기가 신통치 않자 장르가 바뀐다. 강자들끼리 겨루는 천하제일무술대회를 통해 이야기는 손오공의 싸움에 집중하는 액션물이 된다. 손오공은 더 강한 악당, 그보다 더 강력한 악당, 끝도 없이 강해지는 악당과 싸운다. 그 과정에 등장한 캐릭터가 피콜로다. 초반부의 최종 빌런(악당) 역을 맡지만, 이후에는 손오공의 라이벌(물론 기간은 굉장히 짧았고 베지터에게 자리를 넘겨준다)이자, 동료가 된다. 도리야마 작가는 피부가 녹색인 외계인 피콜로를 두고 “녹색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며 손오공을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로 꼽았다고 한다.

<드래곤볼>은 이전까지의 만화와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일단 선이 굵은 기존의 일본 만화들과 달리 둥글둥글하고 세련된 작화를 선보였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속도감도 남달랐다. <드래곤볼>은 요즘 만화의 ‘맥 커터’(맥 끊기)로 꼽히는 회상 장면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만화책으로 봐도 애니메이션처럼 동선이 뚜렷이 그려지는 액션 장면도 탁월했다. 더구나 <드래곤볼> 이전 만화들에서 주인공은 대체로 처음부터 완성된 캐릭터였다. 연재 초반의 겉모습, 능력이 마지막까지 유지된다. 반면 손오공은 12세로 등장해 45세로 퇴장한다. 호랑이를 사냥하던 어린 손오공은 성인이 돼서는 행성 하나쯤은 날려버릴 수 있는 괴력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독자와 함께 성장하고 나이를 먹는 주인공의 탄생이다. 손오공을 성장시키겠다는 도리야마 작가의 구상에 도리시마 편집자는 처음엔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서서히 인기를 끌고 있는 주인공의 외형을 교체할 경우 반발이 우려됐다. 그러나 성장 없이는 연재를 계속할 수 없다는 도리야마 작가의 배수진에 청년으로 성장한 손오공이 만화에 등장했다. 결과는 우려와 달리 대호평이었다.

손오공의 변신, 파워업(능력 향상)은 <드래곤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애니메이션 <드래곤볼>에서 성인 손오공을 연기했던 김환진 성우(71)에게도 변신 장면은 특별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초사이어인으로 처음 변신할 때는 평범한 소리로는 안 되고 좀더 웅장한 소리로 표현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저 밑바닥부터 분노를 끌어와 소리를 질렀어요. 사실 드래곤볼은 소리를 지르는 일이 너무 많아 힘든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기를 모으고, 에네르기파를 쏘고. 입 모양을 맞춰야 하니까 30초 넘게 하마처럼 입 벌리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어요. 목이 갈 때는 갈망정 최선을 다했어요. 출시되고 그걸 본 어린 친구들이 너무 좋아하니까, 목소리 듣고는 영웅처럼 봐주니까 정말 감사하고 흐뭇했죠. 손오공은 내 몸의 일부 같은 캐릭터예요”라고 했다.

오공, 당신이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국내 최대 팬카페인 ‘포에버 드래곤볼’과 ‘지속 가능 취미 연구소’ 주최로 오는 4월 5일 서울 혜화역 인근 좋은 공연 안내센터에서 토리야마 작가를 추억하는 행사가 열린다. 국내 팬들이 그린 일러스트와 팬들이 모았던 수집품들을 전시하며 추억을 나눌 예정이다.  드레스코드는 추모의 의미로 검은색과 손오공의 도복 색인 주황색으로 정했다. 포에버 드래곤볼 제공

국내 최대 팬카페인 ‘포에버 드래곤볼’과 ‘지속 가능 취미 연구소’ 주최로 오는 4월 5일 서울 혜화역 인근 좋은 공연 안내센터에서 토리야마 작가를 추억하는 행사가 열린다. 국내 팬들이 그린 일러스트와 팬들이 모았던 수집품들을 전시하며 추억을 나눌 예정이다. 드레스코드는 추모의 의미로 검은색과 손오공의 도복 색인 주황색으로 정했다. 포에버 드래곤볼 제공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의 힘은 많은 사람이 그 기억을 공유한다는 데 있다. <드래곤볼>은 그 자체로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가 됐다. 국내 최대 팬카페 ‘포에버 드래곤볼’의 운영진 서병훈씨(42)에게 <드래곤볼>은 “내성적이었던 나도 친구를 쉽게 사귀게 해준 이야깃거리”였다. 서씨는 “우리 세대는 <드래곤볼>을 교실에서 다 같이 봤어요. 누가 쉬는 시간에 ‘‘아이큐 점프’ 최신호 나왔어’ 하면 우르르 몰렸는데, 읽는 속도가 다 다르잖아요. ‘나 아직 안 읽었어’, ‘빨리 읽어’ 그러고. 드래곤볼 얘기하면서 친구가 되고, 지금도 드래곤볼 얘기하면 친구들이랑 그때로 돌아갈 수 있어요”라고 했다.

2005년부터 <드래곤볼> 관련 블로그를 운영해온 블로거 테일러(한경수)의 학창 시절도 드래곤볼을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매주 화요일에 나오는 ‘아이큐 점프’를 사서 <드래곤볼> 나온 부분만 학교에 가져갔어요. 다음 주 내용이 너무 궁금할 때는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가서 암암리에 들어온 일본 ‘소년점프’의 한발 앞선 연재를 보기도 했어요. 그걸 보고 오면 애들한테 얘기해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 거예요”라고 했다.

김환진 성우는 몇 년 전 아들에게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교 때 괴롭힘 아닌 괴롭힘이 있었던 모양이더라고요. 괴롭히던 애가 ‘아빠 뭐하시냐’고 물어봤대요. ‘성우인데 <드래곤볼> 손오공 역을 했다’라고. 그 뒤로 건들지 않았다는 거예요. 다 큰 아들이 ‘아빠가 영원한 히어로’라고 얘기하는데, 진짜 말할 수 없이 뿌듯했어요.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드래곤볼>을 좋아하고 손오공과 함께 성장했던 이들이 도리야마 작가와 드래곤볼을 추억하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포에버 드래곤볼’과 ‘지속 가능 취미 연구소’가 주최하는 행사는 도리야마 작가의 생일인 4월 5일 서울 혜화역 인근 좋은 공연 안내센터에서 열린다. 권장 사항일 뿐이지만 드레스코드(복장 규정)도 있다. 추모의 의미인 검은색과 손오공의 도복 색깔이자 드래곤볼의 색깔인 주황색 옷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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