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하다, 그러나 아름답다...애니메이션 '태일이'

백승찬 기자

밀폐된 작업장의 먼지가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현실은 비참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눈동자는 맑고 빛난다

내달 1일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태일이>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전태일은 버스비를 아껴 배곯는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준다.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전태일은 버스비를 아껴 배곯는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준다.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 포스터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 포스터 | 명필름 제공

1995년 개봉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감독 박광수)에는 경찰에 수배 중인 지식인 김영수(문성근)가 등장했다. 영화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를 모델로 한 이 인물을 통해 전태일(홍경인)의 삶에 접근했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 못지않게 김영수의 고뇌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

다음달 1일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태일이>(감독 홍준표)에는 ‘지식인의 중재’가 없다. 전태일이 살아낸 삶의 주요한 굴곡들을 직접적이면서 성실하게 담아낸다.

<태일이>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전태일의 유년기에서 시작한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가난이 극심해지자 가족은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이주해 일하기 시작한다. 평화시장의 재단사 보조로 취직한 태일이는 성실성을 인정받아 곧 재단사가 된다. 월급도 꽤 올랐기에 부모님과 어린 동생을 편하게 먹고살게 해줄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러나 태일이의 눈에는 불쌍한 어린 여공들이 자꾸만 들어온다. 태일이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이란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어머니와 전태일은 각별한 사이로 나온다.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어머니와 전태일은 각별한 사이로 나온다.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전태일이 병으로 쓰러진 여공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고 있다.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전태일이 병으로 쓰러진 여공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고 있다. | 명필름 제공

영화 속 전태일의 모습은 성자(聖者)와 다르지 않다. 전태일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연민을 타고난 사람처럼 보인다. 전태일 역시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그는 자기보다 어린 미성년 여공들이 배 곯는 모습을 참지 못한다. 자신의 도시락을 나누고, 집에 갈 버스비를 아껴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준 뒤 걸어가다가 통금에 걸려 유치장 신세를 진다. 사장에게 인정받아 정식 재단사가 된 뒤에도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주변의 고통에 눈감지 않는다. 사장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병에 걸려 쓰러진 동료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고,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평화시장 사람들에게 병원비를 모금하자고 제안하는 이도 전태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오지랖 넓은 일로 보이겠지만, 때로는 오지랖 넓은 이가 세상을 바꾼다.

전태일이 오늘날까지 ‘세상을 바꾼 불꽃’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모금운동 때문이 아니다. 연민이 행동을 낳았고, 행동이 구조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꼼꼼하고 치밀했다. 전태일은 못다 이룬 학업을 위해 간직했던 교과서를 팔아 근로기준법 법전을 산다. 어려운 한자를 한 글자씩 찾아가며 법이 규정하는 노동시간, 임금, 노동환경 등을 알아낸다. 사장에게 이 조건을 지켜달라고 요구하고, 노동관청에 진정을 넣고, 언론사에 제보한다. 진정과 제보를 위해서 전태일은 동료 노동자들과 설문지를 만들어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면밀히 조사했다. 사장은 일언지하 거부하고, 노동관청은 핀잔을 준다. 언론사 중에서는 경향신문이 1970년 10월7일자에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제목의 사회면 톱기사를 게재했다. 전태일은 기뻐 날뛴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알리는 신문사가 있다는 데 감격한다. 동료 한 명이 손목시계를 전당포에 맡긴 돈으로 신문을 사서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나눠준다. 이 기사와 한 달여 뒤 전태일의 분신 기사는 경향신문을 대표하는 기사 중 하나로 서울 정동 본사 로비에 걸려있다. 한국기자협회 경향신문 지회와 경향신문 노조 등은 당시 기사를 기리기 위해 매년 인권·노동 분야의 우수한 기사에 ‘전태일보도상’을 시상한다.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전태일과 동료들이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전태일과 동료들이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전태일을 중심으로 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차근차근 힘을 모은다.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전태일을 중심으로 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차근차근 힘을 모은다. | 명필름 제공

<태일이>의 악인은 복합적인 성격을 보인다. 가난에 찌든 술주정뱅이처럼 보이는 아버지는 전태일의 속마음을 이해한다. 전태일을 인정하고 호의를 보이던 사장은 전태일이 노동운동을 시작하자 곧바로 해고한다. 이기적이던 재단사 신씨는 해고된 뒤 동료 노동자들과 연대한다. 통금을 어겨 유치장에 갇힌 전태일을 불쌍히 여겨 무슨 일이든 도와주겠다고 말하던 오형사는 노사 분쟁을 중재하는 척하며 노동자들의 힘을 뺀다.

현실은 참혹했지만 <태일이>의 작화는 아름답다. 인물들의 눈동자는 맑고 그들에게 떨어지는 빛은 부드럽다. 1960~1970년대 도시 변두리의 모습을 남루하지만 정감 있게 묘사했다. 작업장 내부 모습은 고증을 거쳐 사실에 최대한 가깝게 그렸다. 창문도 환기구도 없는 밀폐된 공간이라 각종 먼지와 섬유 조각이 날린다. 노동자들에게 유해한 이 조각들은 침침한 실내 조명을 거쳐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비참을 직시하면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는다.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1960~70년대 서울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재현됐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빛으로 아련한 분위기를 냈다.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1960~70년대 서울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재현됐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빛으로 아련한 분위기를 냈다.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 명필름 제공

장동윤(전태일), 염혜란(어머니 이소선 여사), 진선규(아버지), 권해효(사장), 박철민(재단사 신씨) 등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 2011년 개봉해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 흥행 기록(220만 관객)을 세운 <마당을 나온 암탉>의 명필름이 두번째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 <태일이> 포스터 |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 포스터 | 명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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