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섬뜩한 악마부터 의심의 늪에 빠진 남자까지...여러 얼굴 가진 배우, 박완규

선명수 기자
올해 데뷔 20년을 맞은 배우 박완규는 어떤 역할이든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다.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오는 27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붉은 낙엽>에서 주인공 ‘에릭’을 맡은 그를 지난 22일 만났다. 김영민 기자

올해 데뷔 20년을 맞은 배우 박완규는 어떤 역할이든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다.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오는 27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붉은 낙엽>에서 주인공 ‘에릭’을 맡은 그를 지난 22일 만났다. 김영민 기자

20년 전, 그가 처음으로 무대에 섰던 작품은 알베르 카뮈 원작의 <오해>였다. 극단 백수광부의 워크숍 공연이었던 이 연극에서 “돌아왔군”이란 첫 대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한 마디로 무대에서 그냥 바보였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같은 해 극단의 정기공연 <불티나>에선 거지 역할을 맡았다. 대사는 “하나만~” 딱 하나 뿐.그래서 이름도 ‘나만이’라 불렸다. 입봉작이라 할 수 있는 이 공연에서 단역 거지로 출연한 스물넷 젊은 배우는 그로부터 8년 후, 이성열 연출의 <뉴욕 안티고네>에서 마침내 “주인공 거지”를 맡는다.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두루 받은 이 작품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 연출 역시 그에게 “이제 어디 가서 배우라고 해도 되겠다”며 칭찬했다. 그 때부터 연기에 대한 용기도 생겼다고 한다. 올해로 연기 인생 20년을 맞은 배우 박완규(44) 얘기다.

어떤 역할도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가졌다는 평을 받는 그에게도 긴 단련의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2001년 극단 백수광부에 입단했고, 그의 표현대로라면 “무대에서 제대로 걷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했던” 시간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코러스와 단역부터 시작해 그에게 각종 연극상을 안긴 대표작들까지, 20년간 그가 거친 작품이 100편 남짓 된다. 지난 22일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만난 박완규는 “어느새 꽉 채운 20년이 됐는데, 아직 못 해본 역이 많다”며 웃었다.

올해 초 국립극단의 연극 <파우스트 엔딩>에서 악마 ‘메피스토’ 역할을 맡아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던 박완규는 지난 8일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개막한 기획초청 공연 <붉은 낙엽>으로 다시 국립극단 무대에 서고 있다. 빨간 모호크 스타일의 머리에 얼굴과 손, 다리를 뒤덮은 기괴한 문신, 시선을 사로잡는 검정색 가죽치마까지. <파우스트 엔딩>의 그로테스크한 악마 메피스토를 떠올리고 <붉은 낙엽>을 본다면 이 배우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박완규는 이 작품에서 더 나은 삶과 가정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내면에 싹튼 의심으로 서서히 무너지는 평범한 남자 ‘에릭’을 연기한다.

박완규는 극단 배다의 연극 <붉은 낙엽>에서 내면에 싹튼 의심으로 서서히 무너져가는 주인공 ‘에릭’을 연기한다. 김영민 기자

박완규는 극단 배다의 연극 <붉은 낙엽>에서 내면에 싹튼 의심으로 서서히 무너져가는 주인공 ‘에릭’을 연기한다. 김영민 기자

“낙엽은 단풍으로 봤을 땐 예쁘지만, 땅에 떨어져 방치되고 짓무르고 썩으면 처치곤란한 존재가 되기도 하죠. 극중 제 대사 중에, 낙엽에 박힌 미세한 갈색 점들이 암세포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 암적인 것에 대한 의심이 점점 자라나 삶을 뒤흔들기도 합니다.”

가까운 이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견고할까. 의심은 어디까지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미국 작가 토머스 쿡의 동명 추리소설을 각색한 <붉은 낙엽>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박완규가 연기하는 에릭은 “절대 금이 가지 않는 집, 바위처럼 단단한 집”을 꿈꿨던 남자다. 그런 그의 일상은 이웃집 소녀 실종 사건의 용의자로 아들 지미가 지목되며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아들이 그랬을 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그의 마음 속엔 집 곳곳에 쌓여가는 붉은 낙엽처럼 의심이 자라나고 그 의심과 불안은 어린시절 부모와 형제에 대한 기억으로 확장된다.

오는 27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붉은 낙엽>의 한 장면. 서울연극협회 제공

오는 27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붉은 낙엽>의 한 장면. 서울연극협회 제공

연극 <붉은 낙엽>의 한 장면. 박완규(오른쪽)은 이 작품에서 의심의 늪에 빠진 평범한 남자 에릭을 연기한다. 서울연극협회 제공

연극 <붉은 낙엽>의 한 장면. 박완규(오른쪽)은 이 작품에서 의심의 늪에 빠진 평범한 남자 에릭을 연기한다. 서울연극협회 제공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연극은 사건의 실체보다는 혼란과 불안 속에 서서히 무너져가는 에릭의 내면을 보여주는데 더 집중한다. 그만큼 에릭의 독백이 많고, 배우가 표현하는 세밀한 심리 변화에 시선이 쏠리는 연극이다. 박완규는 “극의 상황 속에 나를 던져놓고 벌어지는 상황을 따라가는데 집중하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계획을 세워서 이 장면은 이렇게, 저 장면은 저렇게 하는 식으로 연기하는 것은 저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접근보다는 있는 상황을 그대로 따라가는 편입니다. 결국 제가 중시하는 것은 ‘듣는 것’인데, 다른 배우의 말들, 분위기와 상황을 듣고 그 안에서 답을 찾아가는 식이죠. 이 작품의 경우 원작을 각색하고 무대화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그 과정에서 토론도 많이 했는데, 이번에 다시 공연하게 되면서 새롭게 찾아지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지난 5월 서울연극제에서 첫 선을 보인 <붉은 낙엽>은 박완규가 받은 연기상을 비롯해 우수상(단체), 신인연기상(장석환) 등 4관왕을 차지했다. 극단 배다의 이준우 연출, 김도영 작가와 호흡을 맞춘 것은 지난해 호평받은 연극 <왕서개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다. 박완규는 “저도 상을 받아 좋지만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고 특히 함께 연기한 장석환 배우(지미)가 신인상을 받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지난 2~3월 공연한 국립극단의 연극 <파우스트 엔딩>에서 악마 ‘메피스토’로 분한 배우 박완규(왼쪽). 국립극단 제공

지난 2~3월 공연한 국립극단의 연극 <파우스트 엔딩>에서 악마 ‘메피스토’로 분한 배우 박완규(왼쪽). 국립극단 제공

매년 4~5개 작품씩 꾸준히 출연하며 활발히 활동해온 그는 “올해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난 것 같다”고 말했다. “작품성을 평가하는 것은 당연히 관객과 평론가의 몫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의 기준은 내가 이 공연에 얼마나 뜨겁게 매진했고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가예요. 제게 <붉은 낙엽> <파우스트 엔딩>도 그랬고, 9월 공연한 <밑바닥에서>는 극단 백수광부 25주년 기념 공연이라 의미가 남달랐죠. 이성열 연출이 4막은 ‘네가 책임져 보라’고 해서, 극단 후배들과 함께 뜨겁게 작업했고 평도 괜찮았던 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고요. 여기가 내 집이구나, 내 가족들이구나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올해로 배우 생활 20년. 박완규는 “평소 농담처럼 아침에 일어나기 싫고, 쳇바퀴처럼 출퇴근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 같아서 연극을 시작했다고 말해왔는데, 20년간 연기하면서 저를 좋아해주시는 분들도 생겨나고 어느 정도는 해내고 있다는 성취감도 생긴 것 같다”며 웃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대로, 닥치는대로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고전에서도 못해본 역할이 많고, 점점 나이가 들면서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이 있을 테고요. 아직 해본 것보다 못해본 것이 훨씬 많습니다.”(웃음)

배우 박완규. 김영민 기자

배우 박완규. 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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